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단지 더 잘살고 싶었던 사람을 기억하며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의붓자식: 100년 만의 초대>

정다현

제246호

2023.11.30

“나는 단지 더 잘살기 위하여 나의 이상을 찾을 뿐입니다.” 1)

김명순의 문장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드라마터그 작업을 계기로 김명순과 처음 조우했던 2020년에 이 문장을 읽고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드라마터그의 글에도 이 문장을 인용하면서 울고 싶었던 이유가 뭔지 정확히는 몰라도, “그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 더 잘 살고 싶었던 한 여성이 보였다”라고 적었다.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기분의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이를 계기로 나는 김명순과 신여성에 꽂혀 졸업 논문을 썼다.

한 해에 걸쳐 완성한 논문은 동시대 한국연극에서 신여성을 소재로 한 연극의 재현 양상에 관한 내용이었다. 조선에서 신여성은 소설, 희곡, 신문, 잡지 등 다양한 매체에서 소재로 전락하여 부정적으로 형상화되었지만, 동시대 한국연극에서 신여성을 새롭게 재조명함에 주목한 논문이었다. 말미에 사회적 죽음으로 내몰렸던 신여성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각기 다른 전략으로 그들을 재현한 것이 유의미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논문의 결론에서 오늘날 여전히 신여성이 무대로 소환되는 이유는 “여전히 여성들의 목소리가 다른 방식으로 지워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급한 갈무리를 한 이 논문은 3년 전 울고 싶었던 기분의 단초를 찾기 위한 여정 중 하나였다.

<의붓자식>의 공연 사진. 백색 원피스를 입은 성실이 꼿꼿하게 서서 오른손 손바닥을 바닥으로 향한 채 팔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리고 있다. 
            턱을 살짝 들고 먼 곳을 바라보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의 오른쪽 뒤편으로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고, 
            왼쪽 뒤편에는 옅은 갈색의 투 버튼 원피스를 입은 단발의 여성이 성실을 바라보고 있다. 
            갈색 원피스의 여성 뒤로 꽃바구니가 올려진 작은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가 놓여있다.

문화다방 이상한 앨리스의 연극 <의붓자식: 100년 만의 초대>(이하 <의붓자식>)는 부제목에서도 드러나듯 100년 동안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던 - 혹은 못 했던 – 작가 김명순의 희곡을 무대화한 작품이다. 김명순의 첫 번째 희곡 「의붓자식」(1923)2)을 커다란 골자로 가지고 각색하였는데, “세상의 의붓자식”이었던 김명순 자신이 내면과 삶을 드러냈던 소설, 수필 등의 글들을 작품 곳곳에 인용하였다. 가령 원작 「의붓자식」에는 없는 극중극 장면이 추가되어 주인공 성실은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물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와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이며 예술가로 그려진다. 극중 성실이 쓴 희곡을 연습하는 극중극 장면은 실제 김명순의 두 번째 희곡 「두 애인」(1927-1930년 추정)의 내용을 빌려온 것이다.

연극 속에 김명순의 다른 작품들의 문장들이 녹아있는 건 김명순이 썼던 서사의 원천이 김명순의 생애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대해 짧게 들여다보자면, 김명순은 1920년대 호기심과 동경, 질투와 경멸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1세대 신여성이다. 동시에 그는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다. 허나 그는 기생의 딸이라는 이유로,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라서 ‘탕녀’로 낙인찍힌 채 몇십 년 동안 줄곧 비난받았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부당한 비난에 대항하는 자전적인 글들을 썼다. 타인이 자신에게 부여한 얼룩을 자신의 언어로 지우고자 한 것이다. 김명순이 생전 발표한 두 희곡 「의붓자식」과 「두 애인」의 주인공을 모두 신여성이다. 이는 자신을 투영시킨 것으로, 가부장적인 시대에 의해 가로막혀있던 현실과 다르게 김명순에게 글쓰기의 허구적 공간은 자유로운 공간이었음을 뜻한다.

연극 <의붓자식>의 대사 중 등장하기도 하는, 「탄실이와 주영이」(1924) 또한 김명순이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로, 당시 일본 소설 『너희들의 등 뒤에서』(나카니시 이노스케)의 주인공 ‘권주영’이 자신을 모델로 했다는 소문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김명순은 자신을 비난하는 「김명순에 대한 공개장」(김기진)이나 소설 『김연실전』(김동인) 등에 맞서 자신의 글을 통해 투쟁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동력을 가진 그의 글을 주목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붓자식>의 공연 사진. 무대의 중앙에 놓인 육각형 관 모양의 흰색 큐빅 위에 침구와 꽃다발이 놓여 있고, 
            그 주변에 와인병과 가방, 세숫대야, 와인이 담긴 유리잔이 늘어져 있다. 
            큐빅의 뒤쪽에는 붉은색과 검은색, 흰색이 뒤섞인 그림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그 오른편에 뒤에서 영호를 껴안고 있는 성실이 있다. 
            흰 원피스를 입고 맨발인 성실은 머리가 반쯤 흐트러진 채로 회색 코트와 바지를 입은 영호의 어깨와 가슴에 손을 대고 그의 등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다. 
            성실을 등지고 선 영호는 슬픈 표정으로 바닥을 응시한다. 그들의 뒤편 멀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커다란 갓을 씌운 스탠드가 놓인 테이블과 그 아래 쏟아진 책들, 그랜드 피아노,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연극 <의붓자식>에서 흥미로운 것으로, 김명순의 치열한 문장이 뒤섞인 서사 말고도 무대 배치를 들 수 있다. 객석이 무대 공간과 함께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의 무대 위에 올라와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지워져 있었다. 공연 시작 전 배우들은 객석을 오가며 자유롭게 몸을 풀거나 대사를 외우는 모습을 보였다. 원형으로 무대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객석 공간의 형태에 극 중에서도 배우들은 관객들 사이에서 폴리사운드를 내거나 그들을 가로질러 갔다. 이러한 연출은 이를 2023년에 올리는 연극임을 전면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 관객들로 하여금 1923년과 2023년 100년의 시차를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극에 개입하게 하려는 의도인 듯하였다. 또한 배우들은 1920년대 구어체를 사용하고, 시대에 걸맞은 의상을 입었다. 작품은 시대와 싸우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살아간 김명순을 명확히 포커스해서 그의 지난했던 삶을 보여주었다.

한정된 지면상에서 연극의 모든 것을 다 논할 수는 없다만 극의 말미에 영호가 포도주에 가루약을 타주어 성실이 죽음을 향해 가는 장면을 언급하고 싶다. 표면적인 층위에서 이를 읽어낸다면 성실 자신이 사랑하던 영호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쉽게 선택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기진, 방정환, 김동인과 같은 남성 문인들에 의해 김명순이 사회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멸시당한 그 시대를 생각해 본다면, 이 죽음은 결코 쉽고 편안한 선택으로서의 죽음일 수 없다. 마치 입센의 「헤다 가블러」에서 헤다의 손에 쥐어있던 권총처럼, 성실에게 죽음은 주체적인 선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 더 비중 있게 다루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여전히 김명순처럼 사회가 지워버린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의붓자식>의 공연 사진. 어두운 무대에서 흰색 빛을 받으며 성실이 피아노를 치고 노래한다. 
            피아노 의자의 좌우로 책들이 어지러이 쌓여 있고, 일부는 쏟아져 비스듬히 누워있다. 
            피아노 의자의 왼편 책 옆으로 활짝 펼쳐진 채 뒤집힌 흰색 양산과, 빨간 구두가 나란히 놓여있다.

연극 <의붓자식>을 보고 나와서의 감상도 3년 전 처음 김명순의 글을 읽고 나서의 관점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연극 속 주인공 성실은 단지 더 잘살기 위하여 이상을 찾는 한 여성이었다. 몇 년 동안 김명순과 여타 신여성의 궤적을 좇으며, 그들을 기록하려고 애쓰면서 내 맘 깊은 곳에는 ‘왜 신여성을 지금, 여기에서 이야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그 시대에 머물러있는 이야기처럼 요원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신여성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지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혹자는 김명순의 창작 능력에 대해 비판하며 그를 희곡 작가로서 보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명순이 자신의 글로써 대항했던 현실은 분명 존재했다. 그의 글들이 남아있으니까. 그리고 그 현실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장-자크 루빈이 인용한 크롬웰의 서문에서 “연극은 렌즈의 초점이다. 세계와 역사 삶, 인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여기에서 굴절되어야”3)한다고 말한 것처럼, 신여성에 대한 연극은 여전히 만연한 사회적 인식을 굴절시키고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고 믿는다. 응당 연극은 그래야만 하며 그럴 수 있기에. “무엇이든 말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4) (신)여성의 서사는 계속 쓰여야 한다. 웰메이드 연극이 아닐지라도 이러한 연극이 고마운 이유다. 나는 3년 전 기분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다. 그 기분의 당위를 찾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저 잘 살아내고 싶었던 한 사람 김명순의 힘에 대해 생각하며, 이 글을 마친다.

<의붓자식>의 공연 사진. 어두운 무대 중앙에 흰색 침구가 덮인 큐빅 위에 흰 옷을 입은 성실이 
            다리를 앞으로 쭉 뻗은 채 앉아 있다. 오른손을 하늘로 들어 올리고, 고개를 들어 눈을 감은 그에게 보라색 조명이 떨어진다. 
            허공에 떠 있는 육각형 관 모양의 스크린에 붉은 손바닥들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얼굴의 일부 영상이 영사된다.

[사진 제공: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김명집]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의붓자식: 100년 만의 초대>
  • 일자 2023.11.3 ~ 11.5
  •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 원작 김명순 예술감독 임형택 각색·연출 윤사비나 출연 옥자연, 강주희, 이재남, 이찬솔, 조정근, 허이레, 이경구, 황재희, 김희정, 이상구, 조인, 김소원 드라마투르그 홍예원 안무 이경구 음악감독 배현정 무대디자인 최병훈 영상감독 Riley O'Neill 음향감독 안창용 음향 엔지니어 김여운 음향 크루 김우람 조명디자인 임효섭 조명팀 조은겨레, 이정근, 이태용, 강혁, 전의준 의상디자인 EDA:MICH 이다혜 분장디자인 Make228 이지연, 김지민 무대감독 A for A 김상엽, 서지원 무대팀 엄경윤, 마정흔 무대장치팀 조영민, 권영현 조연출 조하나 바디퍼커션지도 이상호 보컬감독 김지현 아역지도 김민정 일본어지도 이수연 사진 김명집 공연영상촬영 콘텐츠브릭스협동조합 그래픽디자인 개박하 기획·홍보 이원지, 황소희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3014615
  1. 김명순의 희곡 「두 애인」 중.
  2. 김명순의 희곡 「의붓자식」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성실은 각혈하면 피가 바닥에 흐를 정도로 심한 폐병에 걸려 있다. 그녀는 자신을 담당하는 의사인 영호와 연인이지만 병으로 인해 장래를 약속할 수 없고, 이에 전처의 딸인 성실을 괄시하던 부친은 영호를 현부인의 딸 부실의 정혼자로 삼는다. 영호를 사모하던 부실은 성실에게 영호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하나 성실은 이를 거절한다. 성실을 치료하기 위해 집에 들른 의사 영호가 성실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고, 성실에게 포도주에 가루약 타 죽는 길을 제안하며 자신도 곧 따라가겠다고 말한다.
  3. 장-자크 루빈, 김애련 역, 『연극이론의 역사』, 폴리미디어, 1993, 147쪽.
  4. 리베카 솔닛, 김현우 역, 『멀고도 가까운』, 반비, 2016, 350쪽 재인용.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정다현

정다현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단단한 나의 언어를 가지고 싶습니다. 인간이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데에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https://fhtu.notion.site/FHTY-35d76f50b6a04c9599c245a7d25c466d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