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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공가, 환대

레 비탈 <재개발 옆 경로당>

권나은

제246호

2023.11.30

당신이 나와 연갑이라면 ‘분신사바’라는 오컬트 놀이를 들어본 적이 있으리라. 책상에 종이를 내려놓고, 상대방과 눈을 감고 연필을 맞잡은 채로 주문을 외워 귀신을 부르는 놀이 말이다. 우리 지역에서도 이 놀이가 유행했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자리를 깔고 주문을 외웠다. 나는 가끔 연필을 몰래 움직였다. 저급한 장난이라 여겼는데 속는 애들이 있었다. 한 친구는 연필이 움직이자 기겁하며 울었다. 장난이라며, 귀신은 없다며 친구를 안심시킨 기억이 난다. 문제는 나였다. 겉으로는 비과학적인 현상에 휘둘리지 않는 척했지만 나는 귀신의 존재 가능성을 늘 의식하고 있었다. 귀신은 없다. 과학 선생님이 없다고 말했으니까. 그렇지만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도 될까? 그는 단지 직업윤리 때문에 귀신을 부정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정은 언제나 불길한 망상을 동반했다. 나는 조악한 오컬트 주문이 소환할 혼령의 얼굴을 상상했다. 언젠가 보았던 호러 만화에 따르면 귀신은 나와 친구들을 해할 수 있는 존재였다. 두려움에 맞서는 의미로, 나는 연필을 먼저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귀신이 이곳에 도착했는지, 도착하지 않았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귀신도 문간에 선 채로 이 광경을 웃고 넘기지 않을까? 이건 그를 향한 내밀한 환대의 표시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고백이 되니까.

서울특별시 은평구 통일로 935. <재개발 옆 경로당> 포스터에 이 주소가 적혀 있었다. 카카오맵에 주소를 검색하자 은평요양병원 장례식장이 떴다. 왜 출발 지점이 장례식장일까? 망자를 소환하는 연극인 걸까? 의문을 뒤로 하고 목적지로 향했다. 장례식장 앞 도로에 버스 한 대가 서 있었다. 한 무리의 상복 입은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맨 앞 사람은 영정을 들고 있었다. 한눈에 그들이 누군가의 유가족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과 나는 우연히 지척에서 대열을 이뤘다. 내 옆에서 어떤 사람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일개 행인인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고 싶지 않았다. 잠시 장례식장 건물로 피신했다. 로비 전광판에 어제오늘 죽은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 나이, 가족 명단이 적혀 있었다. 잠깐 멈춰 서서 화면의 정보를 하나씩 읽었다.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고인과 관계가 있는 사람뿐이었다. 고인의 가족이거나, 가족의 지인이거나. 나는 고인도 가족도 조문객도 아니었다. 이 공간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다시 대로로 나왔다.

<재개발 옆 경로당>의 공연 사진. 어두운 저녁, 굳게 닫힌 철제 대문에 검은색 래커로 ‘공가’라는 글자가 위로 한 줄, 아래로 한 줄 적혀 있다. 
            대문의 두 손잡이는 굵은 철사로 묶여있고, 대문 옆 기둥에는 <재개발 옆 경로당>의 포스터가 한 장 붙어있다. 
            대문에서 이어지는 옅은 분홍색 담벼락에는 ‘갈현로 343’이라는 도로명주소가 적힌 명판이 있고, 
            페인트를 칠하다 만 갈색 벽돌 담장에는 노란색 래커로 ‘출입금지’라고 적혀 있다. 
            대문 앞에 서 있는 커다란 가로수에 ‘출입금지’의 마지막 글자 ‘지’가 가려져 있다.

그즈음 안내 요원이 도착했다. 안내 요원은 우리에게 이곳에서 연극을 못하게 되었다며 임시 처소로 가라고 했다. 우리는 박석고개교차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세븐일레븐이 위치한 내리막으로 걸어갔다. 길은 고요하고도 음산했다. 곳곳에 재개발 반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죽은’ 상가들이 보였다. 그런 상가의 출입구나 유리창, 벽에는 어김없이 ‘공가(空家)’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누군가가 실제로 거주 중인 동네에 대해 이렇게 서술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리는 그나마 남아있는 몇몇 가게들–세탁소, 미용실, 간판 가게, 한복집–을 확인하며 끊임없이 걸었다. 박석어린이공원 골목 어귀에서 다른 안내 요원을 만났다. 그는 우리에게 여기에서 다시 대기하라고 했다. 먼저 도착한 익명의 동지들과 공원을 빙글빙글 돌았다.

‘관객’이라는 단어에서, ‘객’은 ‘손 객(客)’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연극은 관객을 극진히 모신다. 관객은 극장에 진입하는 순간 유니폼을 입은 하우스 어텐던트들의 환대를 받는다. 관객은 입장 때까지 대기석에 앉아 편안히 쉬기만 하면 된다. 그에 비해 <재개발 옆 경로당>은 관객을 편안하게 두지 않는다. <재개발 옆 경로당>의 관객들은 점진적으로 미끄러지고, 밀려나며, 민망한 상황과 마주한다. 관객은 연극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죽은 사람들(장례식장의 망자들) 혹은 죽어가는 장소들(X 표시가 칠해져 있거나, 출입 금지 팻말이 붙어 있는 곳)을 한껏 응시한다. 이는 ‘손님’에게 보여주기에 적절한 풍경은 아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죽음은 ‘추’의 이미지와 연동되기 때문이다. 망자는 ‘부패한 시신’을 연상하게 하며, 죽어가는 장소들은 ‘청결하지 않은 곳’으로 치부된다. 죽음은 당연하게 금기시된다. 이 연극은 관객들을 금기 안으로 끌어들인다.

훈련된 관객이라면, <재개발 옆 경로당>이 관객을 상대로 옅은 장난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의 알레고리가 비교적 명징하기 때문이다. 연극은 미끄러지고 밀려나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며 관객은 ‘미끄러짐’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존재다. “이 공간을 못 쓰게 되었다”라는 안내조차 하나의 연출적 장치다. 흥미롭게도 누구 하나 “이거 설정이죠?”라고 반문하지 않는다. 안내 요원의 언어는 허구이지만, 이 언어는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바탕으로 직조된 것이다. 관객은 은평구 갈현동의 장례식장과 재개발 상가 일대를 걸어오면서 연쇄적 죽음들을 목격한 당사자다. 안내 요원의 말에는 주술과도 같은 힘이 실린다.

<재개발 옆 경로당>의 공연 사진. ‘갈현어버이경로당’이라는 흰 현판 옆으로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철제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난간 턱에는 불이 붙어 한쪽으로 기울어 타고 있는 제법 큰 양초와 손전등, 다소곳하게 포개진 <재개발 옆 경로당>의 포스터 여러 장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난간 안쪽으로는 세 개의 화분과 두 개의 우산이 무심하게 놓여 있다. 
            난간 바깥쪽에는 검은 천이 씌워진 오브제 위에 ‘안전제일’이라고 쓰인 붉은 빗금이 들어간 테이프가 구겨져 있고, 
            그 옆에 온전한 모습의 안전제일 테이프와 주황색 종이테이프가 놓여 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안내 요원은 드디어 우리를 공원 옆 경로당으로 안내했다. 불이 꺼진 경로당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거실 오디오에서 노인들의 대화를 녹음한 파일이 재생되고 있었다. 대화 녹음본은 과거의 누군가가 물리 법칙을 뚫고 보낸 무전처럼 음질이 좋지 않았고, 알아듣기 어려웠다. 안방의 텔레비전은 켜져 있었다. 탁자에는 화투 더미가 있었다. 그렇지만 어디에도 산 사람은 보이지 않았으며 누구도 우리를 환영해 주지 않았다. 우리는 자리를 찾지 못한 귀신들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다시 10분 정도가 지나자, 별안간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불렀다. 소리가 울려 정확하진 않았지만 “거기서 뭐 해? 같이 놀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 1층 부엌 식탁에서 남자 A와 남자 B가 화투를 치고 있었다. 그들은 젊은 남자의 육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몸짓과 말투는 노인에 가까웠다. 노인의 영혼이 그들의 젊은 외피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노인들 앞에 객석이 마련돼 있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우리가 2층에서 들은 소리가 일종의 오컬트 주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례식장에서 경로당까지 걸어오는 내내, 우리는 미끄러지고, 밀려나고, 튕겨 나가기를 반복했다. 배제를 거듭 경험하며, 우리는 ‘유사 귀신’이 되었다. 그런데 1층의 남자들이 무슨 이유인지 이 귀신들을 다시 호명하고 있었다. 들뜬 환대의 언어와 함께.

A와 B는 화투를 치고 소주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간다. 둘의 대화는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이들의 대화는 헛소리로 가득하며 결론이 없다. 이들의 대화에서 이들의 삶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A는 젊은 시절 택시를 몰았고, 대외적으로는 점잖다는 평을 들어왔다. 그의 아내는 한때 아주 아팠다. B는 사업가였다.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본인을 ‘공처가’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그뿐이다. 아무리 대화를 들어도 이들이 누구인지 더 알 길이 없다. 블라디미르, 에스트라공과 달리 이들에겐 이름조차 없기에. 이들에겐 자신을 증명할 수단이 거의 남지 않았으며, 이들을 찾는 사람도 없다. B는 김치를 갖다줄 감나무집 사람을 기다리지만, 연극이 끝날 때까지 감나무집 사람은 도착하지 않는다. 대신 이 연극에는 이들의 말을 듣는 청자가 존재한다. 객석의 귀신들이다. A와 B가 귀신들을 환대한 것처럼, 귀신들 역시 대화를 경청함으로써 이들의 마음에 보답한다.

<재개발 옆 경로당>의 공연 사진. 경로당 안의 두 남성을 창문 너머로 촬영했다. 
            두 사람은 모두 붉은색 계열의 줄무늬와 사각형 패턴이 들어간 칼라 티셔츠를 입고 있다. 
            앞에 선 남성은 프라이팬을 들어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고, 밝은 갈색 중절모를 쓴 뒤편의 남성은, 
            초록색 천을 깔아둔 테이블 앞에 앉아 한 손에 화투장을 들고 깔아둔 화투패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화투패 옆으로 소주병 하나와 두 개의 잔이 놓여 있다.

두 사람은 콜라텍에 관심이 많다. A는 콜라텍에 로망이 있지만 용기가 없어서 가지 못한다. 젊은 시절부터 ‘잘 노는 형님’이었던 B는 콜라텍에 종종 간다. A는 B에게 콜라텍 춤을 가르쳐달라고 조른다. B는 춤 재능은 타고난다며 거드름을 피우지만, 취기가 오르자 기초적인 스텝을 알려주기 시작한다. 간단한 스텝도 흉내 내지 못하던 A는 점점 능숙하게 스텝을 밟는다. 연극 내내 노인의 몸으로 존재하던 A는 어느 시점부터 젊은 몸으로 영생하며 빠르고 정확한 동작을 구사한다. 그의 춤에는 신묘한 힘이 개입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굿을 떠올렸다.

한껏 춤을 추던 A와 B는 갑작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별안간 연극이 끊기고 다시 안내 요원이 등장했다. 안내 요원은 우리를 보며 퇴마 주문을 외웠다. 이 공간을 못 쓰게 되었다고. 나가달라고. 커튼콜도 박수도 없었지만, 추방되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극장 밖에 제사 음식(샌드위치)과 노자(약과)가 준비돼 있었다. 음식을 넉넉히 골라 먹고 굿판을 나섰다. 이승을 떠나며 ‘공가’들과 조우했다. ‘출입 금지’ 혹은 ‘X’ 표지가 여기저기 산만하게 붙어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갔다. 잠시나마 죽음을 체험해서일까? 그런 표지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농담 같은 글자들을 한참 응시하다 자리를 떴다.

<재개발 옆 경로당>의 공연 사진. 흰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의 벽에는 화이트보드, 시계, TV, 달력, 경로당 복지 관련 현수막 등이 걸려 있다. 
            그 가운데서 두 남성이 마주 보고 춤을 추고 있다. 사진상 이들의 팔과 다리가 흐리게 드러나 그 움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 제공: 레 비탈, 촬영: 새훈]

레 비탈 <재개발 옆 경로당>
  • 일자 2023.11.1 ~ 11.5
  • 장소 서울 은평구 통일로 935
  • 작·연출 조규혜 배우 강준, 최원재, 성재규 기획·그래픽 박수현 공간구성 서민영 촬영 새훈 음향 공한식 주최·주관 레 비탈 후원 은평문화재단
  • 관련정보 https://www.playticket.co.kr/nav/detail.html?idx=2705
  1. 인류학자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를 패러디한 제목이다. 연극 관람 중 이 책이 떠올랐다. 리뷰에 해당 저서를 직접 인용한 문장은 없지만, 글쓰기 과정에서 이 책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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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나은

권나은
의심을 동력으로 글을 쓴다. 가끔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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