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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자본론』을 읽는다는 것

옵/신 페스티벌
리미니 프로토콜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김민관

제247호

2023.12.07

『자본론』이라는 묵중한 그리고 흐릿한 배경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이하 <자본론>)은 2009년 옵/신 페스티벌의 전신인 페스티벌 봄에서 기상연된 작품으로, 무려 14년 만이다. 공연 중 소개에 따르면 “업데이트”(강신준) 버전이면서 메타 퍼포먼스ㅡ“(지난) 연극에 대한 렉처 퍼포먼스”(윤한솔)ㅡ이다. 이번 옵/신 페스티벌은 “가장 과감한 확장을 시도해 온” ‘지난 이십여 년간의 공연예술’을 호출해 오며 이를 “회고전”이라는 개념으로 명명했으며, <자본론>은 그 성격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우선 <자본론>의 국내 출연자로는 『자본론』의 번역자인 강신준이 중앙에, 그리고 이번에 처음 출연하는 윤한솔과 초라초륜이 각각 그의 양옆에 자리하며, 가로로 길고 평행한 세 개의 테이블이 무대를 점유한다. 대극장 전면을 채우는 거대한 책장과 독일 출연자들은 이제는 없다. 무대의 깊이와 배면, 극장을 울리던 다양한 목소리 대신에, 흐릿한 이미지와 더듬거리는 발화가 속삭이듯 관객을 향한다. 규모가 대폭 줄어든 데 비해, 시간(성)은 확장된다. 과거의 공연이 중간중간 영상으로 흘러나오며 역사의 순간들로 기입되는 가운데.

강신준이 관객의 수요를 조사한 결과와 같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이는 예전보다 드물고, 『자본론』은 자본주의를 독해하는 일종의 성경 같은 지위를 공고히 한다. 이른바 『자본론』은 읽기 힘든,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 미지의 심연과도 같은 대상이다. <자본론>은 『자본론』의 일부를 복사해 줄 친 문장들을 읽어나가고, 지난 공연에 나왔던 현실의 사례들과 자신의 서사들을 거기에 덧붙여 나간다. 각 퍼포머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에 자리한 『자본론』의 페이지를 띄엄띄엄 넘길 때마다 이는 스크린으로 투사되고, 빨간색 글자의 각기 다른 연도가 적힌 책은 내용 대신 숫자의 연대기를 이룬다. 공연이 진행될수록 과거에서 현재로 시간이 비약적으로 좁혀지게 되고, 지금으로부터 10년이 흐른 2033년에서 공연이 닫힌다.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공연 사진. 책상 앞쪽으로 나와 공연 대본을 들고 서 있는 강신준. 청바지에, 갈색조의 체크무늬 셔츠, 베이지색 재킷을 입었다. 
            위쪽으로 검은색이 들어간 반무테 안경을 썼다.

종합하면, <자본론>은 『자본론』을 즉물적으로는 시간의 표층에 가려지는 배경 이미지이거나 일종의 ‘벽돌 책’으로서, 그것에 읽기 힘든 까다롭고 숭고한 대상 혹은 뼛속 깊이 자본주의에 물든 이들을 일깨울 미약한 희망의 단초라는 상징적 지위를 부여한다. 역설적으로 <자본론>은 동시대와 연동되지 않는 『자본론』을 읽는 것의 시대착오성을 드러내는 것 같다. <자본론>은 『자본론』에 대한 전면적인 독서를 개진하거나 독해를 추동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자본론』에 대한 ‘렉처’는 일어나지 않는데, 이를 두고 이 책을 거의 읽지 않은 독자의 언어 층위에서 기입될 수 있는 언어들을 검토하고 사유한다고 긍정하기에는 마르크스의 언어도, 이와 연결된 개별자들의 서사도 선명해지지 않는다.
나아가 <자본론>은 책을 해체하거나 전복하지도 않는다. 『자본론』은 막연한 가능성의 매체로 전제되고 유예되며, 이와 관계된 세 명의 생각이나 행위에 대한 서술이 드러날 뿐이다. 또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대안적 실천을 위해 책이 전유되는 것 역시 아니다. 각 연도와 관련된 개체들의 숙고와 경험의 차원은 책에 관한,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로 국한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자본론>은 자본주의 이후, 그리고 2009년 이후 우리의 역사적 흐름을 상기시키는 기억의 경합과 투쟁에 대한 여지를 열어두는 느슨한 작업으로, 2009년과 같이 “렉처 퍼포먼스”로 소개되었지만, 지난 버전의 작업을 전유하는, ‘그 자체로는 동력이 없는’ 현재의 토크에 가깝다.

궁극적으로 <자본론>은 『자본론』을 읽는 게 어떤 의미일지 혹은 그것을 읽는 게 여전히 유효할지에 대한 질문을 향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이전의 <자본론>이 『자본론』과 맺는 관계에서 시작되었다면, 이번에는 그 이전 버전의 공연에서부터 사실 이 공연이 시작되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자본론>이 『자본론』을 의심하거나 비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물론 그러한 행위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자본론』이라는 이미지를 다루거나 예컨대 지난 작업에서의 캐릭터들을 전사로서 가져오고 그들에 관한 후일담을 들려주며 책 바깥의 틈새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자본론』은 일종의 맥거핀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 틈새는 과거와 현재의 아득한 거리, 그리고 현재 자체의 아득함에서 기인한다. <자본론>은 『자본론』과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기이한 동거, 곧 자본주의 세계 내에서의 『자본론』이 가진 기이한 생명력과 존재론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신비화하고, 책의 이념 대신에 책이 담지 못하는 개인의 서사들을 끄집어내는 가운데, 정작 『자본론』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한다.

『자본론』이 아닌 <자본론>을 경유하여

세 명의 출연자는 책을 설명하는 자보다는 단지 책을 읽을 수 있는 존재에 가깝다. 처음 극장에 입장할 때 나눠준 책의 일부에 관한 복사본에서 한 명씩 줄 친 부분을 읽을 때 극장의 조명이 밝혀진다. 다시 말해, 그것을 읽지만 그것은 독해되지는 않는다. 곧 그들은 무지한 관객의 자리에 위치한다. 다만 그것을 시간을 들여 내가 읽는 것은 가능하다는 사실을 건넨다. 그 문장들이 무언가 진리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전후 맥락과 연결하자면 묘연하거나 막연하다. 또한 그들은 『자본론』과 <자본론>을 경유하며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모두가 그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 것도 아니고, 셋의 어떤 공통점을 토대로 섭외되었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자본론>은 책에 관한 전문적인 주석을 달지 않기도 하지만, 출연자들이 극장의 문법을 체화한 배우로서 말하는 것 역시 아니다. 미리 써놓은 대본을 바탕으로 한 충실한 낭독은 가령 현장에서 구어체로 발화할 때 발생하는 어색함까지 감수한다. 구어체를 읽는 또는 연기하는 방식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이 셋의 관계 속에 조합되며 어색함은 증폭된다. 이 셋의 연관 없음은 자본주의 질서를 살아가는 다양한 표본을 끄집어내기 위한 합목적적 기획에 따른다. 공통성이 없음이 주는 약한 연결고리의 특징, 또는 특별한 서사의 지평을 가지지 못한다는 차원에서의 캐릭터의 평범함은 그 자리에 누구도 위치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게 한다. 그리하여 『자본론』은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범박한 사람들의 서사로 귀결된다.

사실, 각각의 서사들은 자신들의 서사를 바탕으로 하므로, 곧 그 자신을 스스로 역할로 삼는 까닭에 이것을 배우처럼 잘 발화한다는 것은 부차적인 차원이 된다. 그러니까 애초에 왜 이다지 연기도 발화도 모두 이상한 것일까, 라고 해도, 그것을 비판할 근거나 비교의 근거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분명 어색하다. 전문 배우들이 자신의 음성으로 대사를 체화한다면, 이들은 스크립트 읽기와 발화 사이에서 음성의 경로를 충분히 숙련하지 못해서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의미에 대한 이해가 단지 음성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필요조건이라고 착각해서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 읽기는 말하기가 갖는 작위성에 대한 은폐를 더 직접적으로 방해한다.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공연 사진. 무대에는 가로로 긴 테이블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고, 
            왼쪽에서부터 각각 초라초륜, 강신준, 윤한솔이 책상을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있다. 
            책상 뒤쪽으로는 오른쪽으로 스탠드형 칠판이 하나 놓여 있으며, 무대 뒷벽의 스크린에는 
            2009년 당시 리미니 프로토콜의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공연 영상이 영사되고 있다. 
            볼에 검은색 핀마이크를 부착하고 노란색 단발머리에 빨간색 재킷을 입은 여성 퍼포머가 앉아 있는 모습이다.

<자본론>은, 2009년의 공연을 그 ‘원본’1)으로 둔다면, 그 원본과의 거리감 속에 자리한다. 이는 대규모 스펙터클이 가능했던 당시 페스티벌 봄의 위상과 지난 공연들의 재상연이 프로그램의 대다수를 이룬 이번 옵/신 페스티벌의 현재를 반영한다. 또한 독일 프로덕션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함께 한 퍼포머들과 그들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자본론’이 아닌, 지난 공연 혹은 『자본론』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퍼포머들의 차이, 스스로를 연기하는 것과 스스로에 대해 발화하는 것의 미세한 차이도 모두 그 거리감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거리는 『자본론』과의 여전한 거리감을 확인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공연에서는 예술이 사회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 자체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지만, 현재의 공연에서 그때 그 질문의 근거와 규준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본론>은 현재의 질문을 유효하게 만들어내고 있는가. 과거와의 거리감과 현재의 서사가 지닌 매력의 불충분함은 허허한 시대정신 자체를 은폐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고 있다. 박근혜 탄핵 구호를 다시 한번 외쳐보자는 강신준의 말은 희망과 자부심을 품은 시대의 커다란 변화로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 참담하게도 그 말은 세월호 참사의 이미지로 직결되지도 않으며, 그 말을 하는 강신준이라는 주체가 기이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 희망의 단초로 여겨졌을 하나의 정부가 부지불식간에 지나갔다.

<자본론>이 하지 않은 이야기들에 대해

그럼에도 또 다른 시간의 분절이 가능하다! 현재를 말하는 데서 좌초되는 것이, 끝이 없는 회의와 절망과 부정이 우리의 눈을 가로막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선 현재에 대한 시차적 거리를 먼저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라면, 미래의 뜬금없는 호출은 약간의 브레인스토밍과 함께 우리의 현재를 분절하는 상상의 조건을 구성할 것이다. 2033년이라는 가정 아래, 윤한솔은 작은 식당을 하고 싶다고 한다. 이는 더할 나위 없이 ‘쿨하고 힙하게’ 느껴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예술을 하는 대표적인 주체의 자리를 벗어난 행위가, 무심한 그의 답변에서처럼 무목적적이고 자율적이며 생산적인 양식으로서 예술의 자리를 점유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강신준은 마르크스 저작의 모든 번역을 완수하는 것을 무덤에서라도 보고 싶다고 한다. 무엇보다 강신준은 <자본론>의 숭고한 주체로서 자리한다. 지난 공연에서 천진난만하게 무대를 열던 그의 모습은 시간이 흘러 변화한 이미지임에도 활자로 된 영원한 시간을 쌓기 위한 순수한 정념으로 연장된다. 적어도 미래의 <자본론>이 반복된다면, 강신준의 자리만큼은 반복되어야 할 것 같지만, 윤한솔의 자리, 곧 『자본론』과 결코 약한 연결고리라도 맺을 수 없을 것 같은 대다수 관객의 자리에 비해 그는 너무 거대해 보인다. 또는 시대착오적인 인상을 준다.

그가 부르짖을 것 같은 마르크스에 대한 진정성 있는 독해에 대한 열망은, 책의 희미한 연결과 어렴풋한 영향력을 확인하는 것에 그치는 이 공연에서는 사실 드러나지 않는다. ㅡ다시 한번 『자본론』은 일종의 명목에 불과한 것 아닐까. 아울러 윤한솔이 연출로서 목소리를 내던 연극의 형식은 구현되지 않는다. 무대가 열리기 전 초라초륜은 <자명>을 부르지만, 그 노래가 불리던 투쟁 현장의 맥락은 무대가 열리고 나서 설명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와 관련해 현재적 목소리를 내던 9명의 지난 화자들은 적어도 『자본론』이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사회 자체에 대한 하나의 논평이나 상징, 기호 그 자체가 되었다. 반면, <자본론>의 현 주체들은 공회전하는 『자본론』, 묵직‘했었던’ 그렇지만 희끄무레해진 과거의 자리로서 <자본론>에 대해 분명한 제스처를 전파하지 못하거나 그러한 행위를 하더라도 하나의 캐릭터로 소비되고 마는 느낌이다.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공연 사진. 세 개의 테이블 앞쪽으로 초라초륜, 강신준, 윤한솔이 각각 공연 대본을 들고 서 있다. 
            무대 뒷벽을 압도적으로 채우는 영상 이미지 속에는 빨간색 매직으로 2033이라고 쓰인 『자본론』 책이 펼쳐져 있다.

<자본론>의 밋밋함 또는 허허함은, 이전 공연 이후의 시간성을 드라마투르기하는 현재 ‘자본론’의 판본이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하고 끈기 있는 질문들이 선행되지 않아서였을 것이라 봐야 할 것인가. 문제의 원인을 애초에 리미니 프로토콜과 한국 출연자들과의 관계에서 찾기보다는 그 한국 출연자들의 다양성과 독특함이 공연에서 『자본론』과의 관계를 넘어 어떻게 연장될 수 있을지까지 상상하고 기획하고 판단했어야 하는 매개의 역할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번 공연은 리미니 프로토콜이 그 대상자들을 적극적으로 물색할 정도로 시간과 자본이 투여되었다고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세 퍼포머의 말의 배치, 『자본론』과 그 언어의 상관관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쌓이면서 확장되어 발생하는 정동과 관점에 대한 정교한 드라마투르기의 절차를 거쳤는지가 아니다. 이 시대 ‘자본’의 의미를 질문하기 위해, 첨단자본주의의 화신이 아닌 그것의 대안적 질서와 주체의 새로운 관점을 언어가 아닌 감각, 곧 그의 삶과 결부 지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주체를 찾는 것, 또는 그 가능성 자체를 탐색하(려)는 어떤 시도, 또는 이전 공연의 무색함과 시대착오성이 현재와 맞물려 드러나도록 만드는 일, 이러한 것들의 전제로서 다양한 주체에 대한 선-매개가 더 중요했으리라 보이는 것이다. 공연에 대한 방향성 자체가 지금 여기의 시대성과 어떻게 맞물리는지 또는 어긋나는지를 판단하는 것 역시 그 매개의 역할일 것이다.

예술의 자율적인 힘의 이상ㅡ“작가의 주체성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내면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재발명하면서도 예술의 자율성을 복원하는 시도들”2)ㅡ을 부르짖는 옵/신 페스티벌은, 정치에 대한 재현적 주체가 아닌 주체의 정치를 새롭게 재발명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러한 주체는 정치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으로부터 벗어난 주체라고 할 수 있을까. <자본론>은 어쩌면 옵/신 페스티벌에서 가장 첨예하게 현재의 이슈와 시간성을 진단하고 고찰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보인다. 말 그대로 다양한 주체를 경유해서, 그들의 일상들이 직조된 새로운 세계의 진공을 통해 ㅡ“세 명의 연출가들은 전문 배우가 아닌 일반인들을 주인공이자 배우로서 무대에 올리며 그들의 크고 작은 인생사를 질료로 삼아 미시적 역사의 작은 결들을 엮어내고, 이를 역사와 사회에 대한 거시적 통찰로 변환”3)시킴으로써.

[사진 제공: © 정길우]

옵/신 페스티벌
리미니 프로토콜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 일자 2023.11.21 ~ 11.22
  • 장소 김희수아트센터 Space1
  • 각본 헬가르트 하우그, 다니엘 베첼 (리미니 프로토콜) 연출 헬가르트 하우그, 다니엘 베첼 (리미니 프로토콜), 윤한솔 퍼포머 강신준, 윤한솔, 초라초륜 제작 옵/신 자료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
  • 관련정보 http://www.ob-scene.com/festival/programs/karl-marx-capital-volume-one
  1. 이는 물론 원본을 절대적인 우위에 두고 복사본을 그것의 열화된 버전으로 구분하는 단순한 전제를 허용하기 위한 표현이 아니다. 당시 무대 위의 열기와 그것이 정체되거나 밋밋해진 현재 분위기의 상대적인 차이는 각 공연의 특질을 보여주기보다는, 시대의 차이를 보여주는 증거로서 현재의 공연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2. 김성희 외, 『우리가 공유하는 시간』, 작업실유령, 2023, 13쪽.
  3. 「리미니 프로토콜에 대한 오마주」, 옵/신 페스티벌 홈페이지, http://obscenefestival.com/festival/programs/karl-marx-capital-volume-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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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관

김민관 아트신 편집장
아트신(www.artscene.co.kr) 편집장. 예술을 체험하고 기록한다. 다양한 예술 관련한 아카이브에 관심을 두고 이를 실천하고자 한다. 좋은 예술이란 무엇일까라는 탐문과 함께 비평적 관점으로 동시대 예술의 계보를 재구성해 나가려고 노력 중이다. 최근에는 비평, 기획, 창작의 교환과 매개에 대한 관심으로, 여러 작업을 병행 중이다. 퍼포먼스 관련 서적의 편집에 다수 참여한 바 있으며, 저서로 『퍼포먼스아트의 다층적 시선』(201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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