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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짐의 즐거움, 연극의 즐거움

다이빙라인 <단델re:ON>

진송

제247호

2023.12.07

극장에서 나는 언제나 사라지는 순간들을 붙잡는 상황에 처한다. 이는 연극의 가장 주요한 장르적 특성 중 하나가 현재성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 단 연극의 현재성이란 기묘한 것이라, 연극은 현재적인 것이되 현재에 머무르지 않는다. 연극은 반복될지언정 되감아 재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재와 과거를 구분하는 한 필연적으로 모든 연극은 과거에 있게 되며, 모든 연극비평이 어느 정도 연극에 대한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을까? ‘사라짐’ 또한 연극의 주요한 장르적 특성 중 하나요, 사라짐은 연극에 본질적이다.
극단 다이빙라인의 연극 <단델re:ON>은 몹시 실험적인 연극의 모양새를 띠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델re:ON>으로부터 ‘본질적으로 연극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단지 <단델re:ON>이 극장을, 그리고 극장의 사라짐을 연극의 중심부로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단델re:ON>은 사라짐을 기억하거나 기록하지 않고 체험함으로써, 즐김으로써, 그리고 사라져감으로써 연극적으로 아름다운 순간을 구성해내고 미래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한다.

<단델re:ON>의 공연 사진. 검은 커튼이 쳐져 있는 검은 블랙박스 공연장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걷는다. 
            손전등을 든, 검은 바람막이와 검은 바지를 입은 무대감독이 선두에 서 손전등으로 어딘가 위쪽을 비추며 응시한다. 
            일렬로 그의 뒤를 따라 걷는 이들도 고개를 들어 무대감독의 손전등이 비추는 곳을 바라본다. 그 뒤에 빈 휠체어와 이를 끄는 이들도 보인다. 
            사람들의 오른편으로 사다리꼴 모양의 무대 벽 두 개가 서로 맞대어진 채 세워져 있고, 그 뒤로 3m 정도 높이의 철제 구조물이 있다.

<단델re:ON>은 극장 투어로 시작된다. 무대 위 ‘극장 투어 장면’이 아니라 이동식 ‘극장 투어’로 연극이 시작한다는 점은 무척 독특하다. 과거에서 온 듯한 한 인물이, 관객들이 대기 중인 극장의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는, 그야말로 텅 빈 극장으로 관객들을 안내한다. 인물은 자신이 우화사 극장에서 연희를 하던 배우라 밝히며, 폐관을 앞둔 우화사를 관객들에게 속속들이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연극의 시작은 특정한 설정들을 전제로 한 재현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임의의 관객들을 끌어들인 채 실제 현장에서 리얼 타임으로 진행되는 극장 투어의 층위가 덧대어져 있다는 점에서 비재현적이고 우발적인 현실 그 자체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인물의 삶을 관망하는 위치에서 벗어나 인물과 함께 연극의 시공간에 스며 있는 것들을 직접 감각하게 된다.
이렇게 극을 우발적이고 비재현적인 현실의 위치로 이동시킨 <단델re:ON>은 돌연 재현적 서사를 활용하여 현실의 극장에 과거와 현재라는 어긋난 두 시간성을 동시에 포개어 놓는다. 과거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극장 투어와, 우화사 극장이 폐관되고 난 이후 다시 그 자리에 극장이 생긴 시점에서 다른 인물이 진행하는 극장 투어가 번갈아 가며 관객들을 이끌도록 한 것이다. 천연덕스럽게 과거와 현재를 연기하는 두 인물은 관객들에게 선형적인 시간 속 인과적인 것으로서의 과거와 현재가 아니라 극장이라는 하나의 입체적인 공간에 ‘공존’하는 복수적인 시간에 대한 신비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단델re:ON>의 공연 사진. 푸른 조명이 비치는 연습실에 대형 모니터 하나가 설치되어 있다. 
            모니터에는 두 개의 빈 의자, 흰색 발레 바와 책상이 놓인 연습실에서 회색 옷을 입은 두 배우가 나란히 쪼그려 앉은 뒷모습이 영사되고 있다. 
            빈백, 휠체어 또는 바닥에 앉은 관객들은 저마다 다른 곳을 바라본다. 
            사진의 오른편에 모니터를 바라보는 한 관객의 뒷모습이 드러나 있고, 모니터 앞에 앉은 관객은 오른편을 응시한다.

극장 투어에 이어지는 연습실 체험은 또 다른 방식으로 비선형적이고 파편적인 연극의 시간성을 손에 닿을 것처럼, 관객이 그 시간성의 사이를 자유롭게 누빌 수 있게끔 생생하게 발생시킨다. 배우들의 안내를 따라 들어간 연습실에서는 여러 가지 장면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정신분산적으로 동시 재생되고 있다. 좌우 반전된 채 빔프로젝터로 영사되고 있는 배우들의 인터뷰 영상과, 관객들이 자신의 모습과 함께 그 영상의 반전되지 않은 원본을 시청할 수 있게끔 연습실 벽면을 덮은 거울, 큰 모니터 화면에 재생되는 연습 장면, 작은 화면에 재생되는 식물을 심는 영상과 내레이션이 저마다의 존재감을 뽐내며, 관객들과 그 영상들의 가운데서 배우들은 천연덕스럽게 연극의 대사와 몸짓을 연습한다. 현실과 이야기는 보다 본격적으로 구분 불가능해지고, 연극의 순간들은 ‘과거―현재―미래’를 따르는 선형적 시간의 질서에 구애받지 않은 채 불규칙적으로 흩어져 있다. 완결된 대상으로서 관조되거나 이해되기보다는 감각되고 체험되는 이 시간성들은 연습실 공간을 자유로운 자세로 점하고 있는 관객들의 몸을 깨우며 몹시 유희적으로 극장의 공간을 점한다.
또다시 배우의 안내를 받아 연습실 밖으로 이동한 곳에는 연극이 시작될 때만 해도 비어 있던 극장이 무대와 객석을 갖춘 곳으로 변해 있다. 무대에서 진행되는 연극은 파편화된 모양새로 연습실에서 체험했던 장면들을 일부 포함하며, 또 극장 투어와 이어지며 구심력을 갖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동시에 그 이야기는 극장 투어와 연습실에서 이미 현실로서, 파편화된 시간성으로서 체험되었던 것에 힘입어 결말로 치닫고 마는 이야기의 작용을 탈피하는 원심력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단델re:ON>은 비선형적이고 역동적인 시간성을 입체적으로 극화하여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모습과, 더 나아가 시간이 과거와 현재로 구분될 수 없게끔 미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단델re:ON>의 공연 사진. 검은 커튼이 쳐진 블랙박스 무대에 바퀴 달린 덧마루가 3X3 배치로 자리 잡고 있다. 
            덧마루 위에 두 배우가 검은 바지와 흰색 상의를 입고 각자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옆으로 엎드려 있거나, 삽으로 흙을 파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덧마루의 뒤편, 커튼 앞에 3m 가량의 철제 구조물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 극장을 자유롭게 날뛰는 <단델re:ON>의 시간들 중 가장 의미심장하고 기묘한 것, 그리고 신비로운 것은 바로 미래다.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까지도 ‘지금―여기’를 점할 수 있을까? 미래가 마치 과거처럼 현재와 공존할 수 있을까? 선형적인 시간성을 벗어난다면 - 과거가 잊혀가지 않고 현재처럼 이곳을 점하며, 현재가 사라지지 않고 이곳에 잔존한다면, 따라서 미래 역시 현재적이고 동시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아직 없다고 여겨진 미래를 통해 이미 사라졌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여전히 여기 있음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단델re:ON> 속 이야기에는 해를 넘기지 못하는 여러해살이풀인 꽃치자 나무와 절대 죽지 않는다는 괴담 속 한해살이풀인 민들레가 등장한다. 한해살이풀인 민들레가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불가능하기에 괴담적이지만, <단델re:ON>에서 민들레의 단명과 민들레의 불멸은 모순되지 않는다. 민들레는 사라지는 존재인 그 자체로 살아남는다. 보이지 않지만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극장 한켠의 얼룩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민들레는 영구히 잔존한다.
<단델re:ON>은 복수의 시간성을 현재적인 것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연극의 힘을 보여주었다. 선형적인 시간의 질서를 벗어나 비선형적 시간의 역동성과 생명력을 살아갈 때, 미래는 불가지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의 대상이 된다. 사라진 과거의 극장 위에 사라지는 현재의 극장이 덧대어지듯이, 미래의 극장 역시 사라진다 할지언정 ‘지금―여기’에 덧대어지며 괴담 속 불멸의 민들레처럼, 괴담 속 극장의 얼룩처럼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복수성을 신뢰하기에 사라지는 것들에 안녕을 고하면서, 사라짐을 슬퍼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매만지고 유희할 수 있다. 사라지는 것들의 현재성을 즐기는 것. 유한한 극장 공간 내부의 모든 것과 그에 깃든 무한한 복수의 미분적 시간성들을 감각하는 지극한 놀이. 그러니 세상도 연극도 이보다 슬프고 즐거울 수 없을 것이다.

<단델re:ON>의 공연 사진. 흰 원피스 위에 초록색 카디건을 입고,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성이 허공을 바라본다. 
            그의 옆에 ‘일렉트로닉 민들레’가 빛나고 있다. 일렉트로닉 민들레의 화분은 은박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빨강, 노랑, 파랑, 초록, 회색 등 다양한 색의 전선들이 얽혀 줄기를 이룬다. 
            민들레 잎은 은박지로, 민들레 홀씨는 불이 들어오는 광섬유로 만들어져 있다.

[사진 촬영: 조상백]

다이빙라인 <단델re:ON>
  • 일자 2023.11.18 ~ 11.26
  • 장소 천장산우화극장
  • 출연 박이슬, 조세라 작/연출 이수림 구성작가 김은한 무대감독 이효진 공간 디자이너 장성진 조명 디자이너 윤혜린 사운드 디자이너 목소 영상 디자이너 김예찬 움직임 허윤경 접근성 매니저 이청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자율도 회계 류소설 사진 기록 조상백 영상 기록 강수연 CD 박은지 PD 김민수 주최/주관 이수림 제작 다이빙라인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 관련정보 https://fabletheater.net/?p=3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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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송

진송
2020년 7월 『문장웹진』에 「남자 없는 여자들」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비평 콜렉티브 ‘누워있기협동조합’에서 재미있는 기획들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의 구성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블로그 ‘진진송의 블로그(blog.naver.com/zinsongzin)’를 운영 중이다.
zinsongz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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