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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탕아의 귀환

지금아카이브 <남자사랑 레즈비언>

김민조

제247호

2023.12.07

에이드리언
시커먼 동굴 좋지. 근데 우린 거기 안 살잖아. 지금 여기 살고 있다고.
남자 여자 그 그녀 같은 단어를 쓰는 이 세상에. 내가 딱 하나 바라는 건,
그런 단어들이 쓰이는 이상 그 단어들이 나한테도 쓰이는 거야.1)

<로테르담>의 ‘조쉬’는 인류가 만약 서로의 외형을 확인할 수 없는 캄캄한 동굴에서 살았더라면 남자나 여자라는 말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라 가정한다. 그러나 FTM 트랜스젠더 ‘에이드리언’은 그런 가정법에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젠더라는 라벨이 허구적인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동굴의 비유’는 원론적으로 참일 수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보기에 우리는 이미 젠더와 관련된 단어들이 주체의 욕망과 정체성을 구획하는 강력한 인식 체계로 작동하고 있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젠더와 불화하는 경계인은 자기 자신을 반영하는 “그 단어”를 찾아가는 지상의 여정을 중단할 수 없다. 단어들의 위력을 증오하고 경계하면서, 한편으로는 단어들이 개시하는 새로운 쾌락의 가능성을 탐문하면서.
<남자사랑 레즈비언> 또한 존재와 단어의 불일치라는 고전적인 퀴어 주제를 다루는 연극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벽장’을 박차고 나오는 서사로부터 일탈해 있으며, ‘벽장’으로 돌아가는 서사는 더더욱 아니다. 차라리 엄격하게 분리된 두 구역 사이에 가로놓인 ‘담장’에 올라타기를 감행하는 자의 연극이라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마리아 프라마기오레는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에 놓여 있는 바이섹슈얼의 문화적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 ‘담장의 인식론(Epistemology of the Fence)’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던 바 있다. 담장의 인식론에 따르면 담장은 지도에 나타나 있지 않은 구조물로, 이쪽과 저쪽을 볼 수 있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사이와 비결정의 장소이다.2) 남성 시청자들을 주요 타깃으로 온라인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남자사랑 레즈비언>의 주인공 ‘나’ 또는 ‘BJ 엘레나’는 이성애 사회와 레즈비언 커뮤니티 사이의 담장에 위태롭게 걸터앉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매일 밤 남성 시청자들의 환심을 살 만한 ‘아름답고 관능적인 여성’을 연기하며 도네이션을 받는 레즈비언 존재에 대해서라면, 생식기를 통한 성관계의 차원을 떠나 우정과 동지애를 포함한 다양한 여성 간 사랑에 주목하며 레즈비언 연속체(lesbian continuum) 개념을 제시했던3) 에이드리엔 리치 같은 페미니스트도 잠시 망설일지 모른다. ‘BJ 엘레나’의 방송은 여성 간 사랑의 영역을 자발적으로 이탈한, 어쩌면 레즈비언 자긍심에 대한 ‘배반’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남자사랑 레즈비언>의 공연 사진. 흰 벽의 모서리 부근, 붉은 반소매 티셔츠와 검은 긴바지를 입은 ‘나’가 스탠드에 꽂힌 핸드 마이크 앞에 앉아 있다. 
            오른쪽 무릎을 접어 발목을 왼쪽 허벅지에 올린 채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다. 
            오른쪽 벽에는 흰색 별이 그려진 파란색 풍선의 이미지와 그 아래 ‘별 팡팡!’이라는 문자가 영사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남자사랑 레즈비언>이 바이섹슈얼 서사조차 아니라는 점이다. 남성 시청자와 오프라인에서 만나 성관계를 맺는 일을 수 차례 반복하면서도 ‘나’는 남성에 대한 사랑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나’에게 있어 남성은 자신을 ‘여성’으로 받아들이는 존재, 목소리만 노출했는데도 너무나 쉽게 자신과의 연애나 성관계를 갈망하는 존재, 궁극적으로는 ‘여성’으로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바이섹슈얼 서사에 기초한 연극 <240 245>가 이성애와 동성애에 모두 접속할 수 있기에 도리어 양쪽 사회로부터 배척받는 경계인의 이야기라면, <남자사랑 레즈비언>은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에 둘러쳐진 펜스를 뚫고 넘어가 이성애 관계가 보장하는 쾌락의 일부만 착즙하는 ‘밀렵꾼’의 이야기에 가깝다. 그래서 <남자사랑 레즈비언>은 남자와 관계를 맺을수록 자기 자신이 확고부동한 레즈비언임을 깨닫게 된다는 웃지 못할 아이러니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애초부터 이성애로 향할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기에 ‘나’는 헤테로 관객에게도 바이섹슈얼 관객에게도 동족성을 호소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레즈비언 관객이 여전히 ‘나’ 또는 ‘BJ 엘레나’를 동족으로 여길 수 있느냐일 뿐이다.
연극은 BJ 엘레나의 사과방송 내지는 은퇴방송으로 시작해 ‘나’가 라디오 방송을 하게 된 경위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갤러리 산수의 벽면에는 ‘나’가 여자를 만나기 위해 접속한 레즈 어플 화면이 투사되는데, 레즈 시장에서 잘 팔리는 ‘식’에 맞는 사진을 올리지 않고 일상적인 사진을 프로필로 등록한 ‘나’는 어떤 여자와도 매칭되지 못한다. 머리 짧은 부치 스타일도 아니고, ‘일스(헤테로 여성처럼 보이는 스타일)’도 아니고, ‘내외적으로 건강’하지도 않은 데다가 별로 환영받을 구석이 없는 ‘예술레즈’이기까지 한 주인공은 결국 자기가 영영 여자들에게 여자로서 사랑받을 수 없을 거라는 자괴감에 사로잡힌다. 결국 ‘나’가 ‘BJ 엘레나’로 변신하게 된 계기에 레즈비언 커뮤니티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루키즘(lookism)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의 이성애 밀렵은 비자발적 자발성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남성들이 좋아할 만한 여성 이미지를 그림 AI에 주문해 ‘BJ 엘레나’의 프로필 사진을 만들어낸다. 프로젝터로 투사되는 이미지와 관객의 눈앞에 현존하는 출연자 사이의 간극이 심해질수록 ‘나’는 이성애와 동성애의 치안 지대로부터 벗어난, 기이하고 불온한 존재가 되어간다.

<남자사랑 레즈비언>의 공연 사진. 흰 벽에 푸른색과 흰색의 잔물결이 영사되고 있다. 
            붉은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나’가 분홍 귀가 달린 검은 동물 인형을 양손으로 품 안에 가득 안고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오른쪽 벽에는 거울이 하나 걸려 있고 푸른 영상과 ‘나’의 그림자가 비친다.

<남자사랑 레즈비언>은 레즈비언 존재가 자신을 레즈비언으로 승인해줄 수 있는 바로 그 여성들에 의해 취약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과감하게 노출시킨다. 여자로 패싱되고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다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채울 수 없었던 ‘나’는 남자들이 주는 사랑을 대체품으로 삼아 ‘여자임’의 감각을 보존하려 했지만, 작품 제목이 무색하게도 ‘나’는 끝끝내 대체품에 만족할 수 없었다. “여자를 너무나 싫어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찐레즈”4)라는 정의에 따르자면 ‘나’는 그렇게나 유사 이성애를 반복하면서도 찐레즈임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BJ 엘레나’로 데뷔하고 은퇴하는 과정을 거치며 ‘나’는 자신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를 정직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어떤 레즈비언 친구들에게 드러낼 수 없었던 자존감의 문제를, 어떤 페미니스트 친구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던 욕망의 문제를 스스로 발견하고 인정하게 되는 레즈비언 탕아의 귀환 서사. 그것이 <남자사랑 레즈비언>이라는 수상한 연극의 진정한 본색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귀환 이후에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이상하고 괴팍하고 연대를 망치는 여자들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자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어떤 담장들은 퀴어들이 그리는 불온한 지도에조차 표시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퀴어 재현을 급진화하는 것은 “선을 어디에다 그어야”5) 하는지를 은연중에 판정하는 우리 안의 미시적인 권력을 끊임없이 심문에 부치는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 그 선을 넘어가는 퀴어, 혹은 선을 넘어 돌아오는 퀴어에 대한 연극이 도처에서 번성하는 풍경을 기다린다.

<남자사랑 레즈비언>의 공연 사진. 붉은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나’의 상반신을 촬영한 사진이다. 
            그는 손바닥이 하늘을 보게끔 두 손을 마주 모아 명치 높이에 놓은 채, 손바닥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앞머리를 내리고, 머리를 하나로 모아 묶었으나, 잔머리가 헝클어진 듯 많이 빠져나왔다.

[사진 촬영: 이지수]

지금아카이브 <남자사랑 레즈비언>
  • 일자 2023.11.3 ~ 11.5
  • 장소 갤러리 산수
  • 작·연출·출연 지구 영상 이예진 연기협력 배선희 친한 눈과 귀 김진아 PD 김민수 제작 지금아카이브 후원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 관련정보 https://www.instagram.com/p/CymhEinvp4P/?img_index=1
  1. 존 브리튼, 김수아 역, <로테르담>에서 인용. 프로젝트 이어의 2019년 국내 초연 대본을 참고했다.
  2. 박이은실, 『양성애: 열두 개의 퀴어 이야기』, 여이연, 2017, 37~38쪽 참조.
  3. 이드리엔 리치, 나영 역,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 나영 편역,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 반란, 연대, 전복의 현장들』, 현실문화, 2019, 143~150쪽 참조.
  4. ZOZO, 「여자를 사랑하는 만큼 미워할 수밖에」, 퀴어예술매거진 《them》 3호, 2023, 40쪽.
  5. 제임스 바의 소설 『네 잎』(1950)에 나온 문장. 게일 루빈, 신혜수·임옥희·조혜영·허윤 역, 『일탈: 게일 루빈 선집』, 현실문화, 294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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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김민조
협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비평가를 지향합니다.
동시대 퀴어, 페미니즘, 장애, 포스트휴먼 연극의 흐름에 대한 반응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기와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를 잘 못해서 큰일입니다.
wingmn1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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