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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안팎, 기어코 사랑

극단 돌파구 <키리에>

장기영

제248호

2023.12.21

내가 나만이지 않을 때 ‘사랑’은 가능한 말이 된다. 연극 <키리에>는 사랑을 발음하기 위하여 온전한 ‘나’를 의심한다. 모든 시점을 넘나들 수 있는 시선과 문장의 주체가 되는, 강력하고도 철저한 단수형 주어로서의 ‘나(I)’ 말이다. 타자가 배제된 최소 단위, 타자가 범접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로서의 ‘나’의 세계는, 마치 ‘사랑’을 능동태로 발음할 수 있게 하는 듯하다. 그러나 ‘홀로 능히’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랑은 능동과 피동의 혼합물이고, 그러기 위해서 주어는 분화되어야 했다. <키리에>는 ‘나’의 안팎 곳곳을 분열시킨다.

나의 ‘안’에서라야

독일의 어느 검은 숲, 생의 마지막을 매듭짓고자 하는 이들이 찾아오는 이곳은 ‘종착점’이다. 이곳을 관통했다는 이의 이야기는 듣기 어렵기 때문이다. 검은 숲에 다다른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사람을 삼키고 생을 매듭짓는 이곳. 검은 숲 근처에는 집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검은 숲에 가장 가까운 집, 검은 숲과 연결되는 또 다른 통로를 가진 집. 이 집은 검은 숲을 닮았다. 그래서 집의 내부를 묘사하고 있는 무대도 온통 까맣다. “이기적인 에고이스트”의 캄캄한 의식, 사람을 삼키는 어둠의 숲을 모두 담아야 하는 이 무대는 천장, 벽면, 바닥까지 온통 검정으로 가득했다. 집의 내부이자 외부. 집과 숲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이 무대는, 그 둘이 상응하는 공간임을 표지한다.
그러나 무대는 곧 화자가 된다. ‘말’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죽어서 집이 되고도 자의식이 있다는 게, 이기적인 에고이스트에게 주어지는 형벌일까?”

‘집’(최희진 분)은 이 극의 최초 발화자이다. 집의 첫마디는 극의 ‘시점(始點, 視點, 時點)’이 된다. 무대 바깥에서 음성으로 그 존재감을 표지하던 최희진 배우는, 많은 말들을 품으며 무대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집’은 인물이다. ‘집’은 살아생전, 이 집을 허물고 다시 지었던 건축가였다. 30대에 과로사했던 그는 생전 사랑을 줄 줄도 받을 줄도 모르던 사람이었다. 추억할 것이 많지 않아 비슷한 혼잣말을 되뇌던 그는, 자신이 사랑을 모르던 사람이었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소중한 이들을 위하여 “집을 지어줄”지언정 정작 “집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그 지독한 사실.

<키리에>의 공연 사진. 검은 바닥과 어두운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의 모서리에 로브 주머니에 손을 넣은 ‘집’이 서 있다. 
            그는 무채색 어두운 목폴라와 회색 바지, 무릎을 덮는 기장의 도톰한 로브를 입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응시한다. 
            그의 왼편으로 목재 등받이 의자 하나와 작은 찻주전자가 바닥에 놓여있고, 오른편으로는 회색 목도리가 삐져나온 연갈색 여행용 가방과 조명기, 흰 베개가 놓여있다.

그러나 25년간 방치되었던 이 집에 ‘엠마’(유은숙 분)가 등장한다. 엠마와 그 남편에 이어, 관수(백성철 분), 목련(조어진 분), 분재(윤미경 분)도 이곳을 찾아온다. ‘집’은 자신 ‘안에’ 들어온 이 이질적 존재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들의 등장 후 ‘집’의 언어는 온통 그들을 바라보는 말뿐이다. 생전 “살아있는 존재들은 너무 감정이 많고, 징징대고, 부산스럽다”고 생각해왔던 그, 그리고 울음이 많지 않았던 그는, 타자들의 삶에 연루됨에 따라 ‘누수’가 가능해진다. 25년간 추억할 것도 응시할 것도 많지 않았던 그의 말은, 자의식에 갇힌 독어였다. 그러나 자신 ‘안’에 들어온 타자들을 부단히 응시했고, 이제 그의 독어는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를 가진 그는 이제 반응(reaction)할 수도 있다. 의식에 따라 움직이던(조명을 깜빡이고 벽지를 떨어뜨리는 등) 동작(action) 그 자체로서의 움직임이 아니라, 상대의 행위에 ‘대응하는’ 반응적 행위이다. 특히 그는 사랑하는 침입자 엠마의 죽음 앞에서 초연히 행동한다.

“나는 이제 알 수 있어. 내가 완전히 무너져야, 엠마를 살게 할 수 있다는 걸, 기쁘게 알 수 있어. 무너져야 해. 무너질 시간이야. 나는 비로소 나를 끝장낼 수 있어.”

<키리에>는 철저히 그(30대에 요절한 천재 건축가이자, 죽어서는 집이 된 그)의 이야기다. 죽어서도 죽지 못한 그는, 그간의 ‘나’를 넘어서는 절대적인 1인칭으로 존재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나’라는 역할은 주어지지 못한다. ‘나’를 수행할 몸이 없기에. 그러나 죽음 이후에도 지독한 자의식 속에서 ‘나’의 언어를 뛰어넘는 전지적인 언어로 존재했던 그의 강력한 말은, 타자들에 의하여 무력해진다. 나의 바깥에 있던 타자들이 아니라, 나의 ‘안’에 있는 강력한 타자들이다. 엠마와 그 남편, 관수, 분재와 목련이 보여주는 삶―죽음의 경계선을 넉넉히 목격하며 간간이 개입함으로써 그는 이 암담했던 자의식을 맺는다. 강력한 타자들을 응시하며 자의식은 부수어진다. 그는 그간 바라볼 수밖에 없던 엠마를 품에 안는다. 무너진 자신의 위로 엠마는 살아남는다.

<키리에>의 공연 사진. 검은 무대에 흰 코트와 밝은 회색 목도리, 흰 목폴라 니트, 밝은 회색 바지를 입은 엠마가 연한 갈색의 여행 가방을 들고 허공을 바라본다. 
            그의 왼쪽 뒤편에 놓인 원목 등받이 의자 위에 베개가 하나 얹혀있고, 그 뒤에서 ‘집’이 천천히 걸으며 유심히 엠마를 관찰한다.

나 ‘바깥’으로써

집이 이렇게 스스로 자의식을 맺어버린 일은 ‘불행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곧 ‘행복한 다음’을 막연하게 기대하는 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키리에>가 탁월했던 것 중 하나는 ‘삶/죽음’에 놓인, 너무나도 단순하여 참혹했던 분할선을 흐릿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데에는 ‘중요한 타자(significant others)’들이 있다.
이 타자들은 ‘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끄른다. 특히 분재와 목련의 이야기는 이 ‘중요한 타자’의 관계를 잘 드러낸다. 새해를 3일 앞둔 날, 둘은 이 집에 함께 들어왔다. 제각기 죽음을 호출하며 등장한 이 둘은 아주 달랐다. 상반된 옷차림, 말투, 성격, 표정, 그리고 과거까지. 그들은 ‘쌍둥이처럼’ 달랐다. 거울을 사이에 두고 반대로 존재하는 듯한 ‘같은 다름’이다. “주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기능이 없다”던 분재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스스로 뺨을 때렸다. 반면 “나를 사랑해주면 그게 남자든 여자든 상관 없”다며 잠꼬대하던 목련은, 사랑했던 이에게서 뺨을 맞았다.
검은 집, 아니 검은 숲과 가까운 이 집은 이상한 곳이었다. 사랑을 갈구하던 이들 옆에서 늘 죽은 듯이 자던 목련은 이곳에선 시끄럽게 잠꼬대를 했고, 근 10년간 성직자 생활을 하며 자기 연민과 가해의식 사이에서 스스로를 처벌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던 분재는 넉넉히 잤다. 덕분에 분재는 깊은 무의식 속에서 유체를 이탈한다. 오랜만의 깊은 꿈, 분재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바라본다. 꿈속이자 자신의 ‘바깥’,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잠든 목련의 얼굴이다. 그는 잠을 이룬 상태에서야 잠든 자신을 “또렷이” 응시하고, 잠든 목련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다. 그는 드디어 자유로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는 그곳에서 목련을 바라봤다. 그리고 분재의 실체 없는 시선은 목련에게 감지된다. 둘의 이 초월적이고도 긴밀한 연결은 ‘사랑’으로 명명된다. 둘은 이 연결감을 “형제 같은” “쌍둥이 같은” “너의 몸은 나의 몸 같은” 것이며 “우주만큼 큰” 사랑이라 가늠한다.
이들의 연결은 검은 숲을 관통하던 곳에서 다시 발현한다. 검은 숲을 빠져나오기 직전, 그들은 ‘함께’ 유체를 이탈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이들의 의식적 단위가 복수가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함께로서 존재하며 같은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들의 시점은 복수가 되었고, 그 복수로서의 시점은 하나의 초점으로 모아진다. 어제의 함께다. 함께 곤히 자던 어제를 바라보던 그들은, 어제가 “불쌍하고도 귀여워” 보인다. 하나‘처럼/로서’ 연결된 이 둘은 죽음을 잊었고, 검은 숲을 관통한다. 이제 검은 숲은 종착점이 아니다.

<키리에>의 공연 사진. 핑크색과 보라색이 섞인 니트를 입고 가슴께까지 오는 긴 파마머리를 늘어뜨린 목련과 
            검은 원피스에 머리를 단정히 묶은 분재가 나란히 바닥에 엎드려 대화를 나눈다. 
            두 사람 모두 팔꿈치를 바닥에 대어 상체를 살짝 일으킨 상태이며, 두 사람의 사이 뒤편으로 바닥에 납작 엎드려 팔을 모아 턱을 괴고 이들을 바라보는 ‘집’이 있다. 
            분재가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목련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응시한다. 바닥엔 흰 꽃가루가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키리에>에서는 죽음에의 모든 계획이 실패한다. 관수, 분재, 목련은 삶을 포기했던 마음을 다시 포기한다. 엠마의 계획은 ‘집’에 의해 포기되었다. 당장의 죽음을 요청하던 엠마의 남편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죽을 수 있었다. 이 실패들이 곧 죽음을 꿈꾸는 절박한 생애들에게 “죽지 말고 꿋꿋이 살아”로 해석되지 않길 원한다. <키리에>가 그린 ‘집’은 죽음을 실행하러 오는 이들의 잠시간의 휴식 장소였다. 삶과 죽음의 사이를 ‘/(슬래시)’로만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두 단어를 ‘―(하이픈)’으로 잇는 곳이다. 삶을 ‘다음이 있는’ 곳으로, 죽음을 ‘다음이 없는’ 곳으로 가두지 않는 것이다. 둘을 대타항에 몰아넣고 그에 따른 결말을 막연히 기대하지 않는다. 이들의 ‘다음’은 상상할 수는 있되 예고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 연극은 이처럼 절대 뒤섞일 수 없어 보였던 개개들을 매듭짓는다. 이때 ‘매듭’은 종결을 의미하는 수사적 표현이 아닌, ‘묶인 자리’ 그 자체다.
이 묶임은 ‘나(살아있던 이로서의 1인칭)’ 아닌 ‘집(죽은 후 배경이자 관찰자가 된 그)’에서라야 가능했다. ‘나’를 이루는 유사성, 동질성, 일관성은 침입자들에 의하여 무력해진다. 중요한 타자들이 강력히 연결되는 이곳1), 이 집은 기실 접촉지대이다. 타자를 타자로만 남겨둘 수 없는 이곳에서, 죽음을 기획했던 강력한 ‘나’들은 그 자의가 무색해졌다. ‘나’를 가능하지 못하게 만드는 타자들이다.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약속해주지 않는다. 행복을 보증해주지도, 결말을 선연히 제시해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서로 필요로 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그물코가 되어 그물망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나’는 무용해지고 ‘너’는 흐릿해진다. <키리에>는 중요한 타자들이 가능한 세계에서라야, ‘삶’과 ‘삶 아님’에 대한 모호하고도 왜소한 상상력이 풍부해질 수 있음을 역설한다. 타자가 배제된 최소 단위, 타자가 범접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로서의 ‘나’의 세계는 나마저도 배제해버린다. 그래서 ‘집’은 스스로 부서졌다. 그는 지독한 자의식이 붕괴된 후에야 안도하며 웃을 수 있었다. 이 붕괴는 엠마를 구하는 포옹이자, 25년 전 제대로 안아주지 못했던 조카를 향한 포옹이 되기도 한다. “건물의 잔해 속에서” 그리고 “시간의 바깥에서” 이름을 잃어버린 후에야, “아무도 아닌” 채 비로소 웃는다.
기어코 사랑이다.

<키리에>의 공연 사진. 엠마와 관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한 베이지색 반소매 셔츠를 입은 엠마는 흰 이불을 접어 들고 서서 허공을 보며 말하고, 연한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 안에 회색 티를 받쳐입은 관수는 앉은 채로 엠마를 바라본다. 
            관수의 무릎 위에는 파란색 백팩이 하나 있으며, 그의 오른손에는 작은 강아지 인형이 하나 들려있다.

[사진 제공: 국립정동극장]

극단 돌파구 <키리에>
  • 일자 2023.11.30 ~ 12.11
  • 장소 국립정동극장_세실
  • 작가 장영 연출 전인철 출연 최희진, 유은숙, 백성철, 조어진, 윤미경 드라마터그 전강희 무대 박상봉 조명 최보윤 의상 김우성 분장 장경숙 안무 지경민 음악 베일리 홍 자막해설 이청 조연출 황성현, 김엄지 제작PD 조유림 주최,주관 (재)국립정동극장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중장기창작지원 작품개발 극단 돌파구
  • 관련정보 https://www.jeongdong.or.kr/portal/bbs/B0000252/view.do?nttId=7653&menuNo=200002#
  1. “중요한 타자들의 생태계는 함께 식탁에 앉은 식사 동료를 포함하고, 소화불량이 으레 따르기 마련이지만, 위, 아래, 앞, 뒤로부터의 목적론적인 용도라는 편안함은 없다. 이것은 (중략) 죽을 운명의 존재로서 책임 있게 사는 것에 관한 것이다.” (도나 J. 해러웨이, 『종과 종이 만날 때』, 최유미 역, 도서출판 갈무리, 2022, 97쪽) “중요한 타자라는 말 속에는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는 현저한 타자성에 대한 인정이 내포되어 있다. 상대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전제되지 않으면 진실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최유미,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도서출판b, 2020,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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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영

장기영
한국문학을 공부했고 여러 종류의 글을 쓰고 있다. 공연/영화/전시/문학 등에 대한 연구와 평론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주중에는 주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주말에는 쓰고 싶은 글들 혹은 써야 하는 글들을 쓰고 있다.
kalce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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