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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을 줍고 붉은 꽃을 심는

극단 북새통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

팔도

제248호

2023.12.21

연극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에 나자닌 데이히미는 없다. ‘진짜’ 나자닌 데이히미는 없지만 그의 삶과 각자 다르게 분절된 사람들이 있다.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라는 ‘극중극’의 배우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무대 여기저기에서 끊임없이 백색소음을 생산하면서 움직이고, 나 자닌과 수감생활을 했던, 유일하게 그를 ‘실제로’ 만났던 연출가 아바는 공연 리허설의 시간을 멈추고 자신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기를 반복한다.
아바의 기억: 나자닌을 향한 교도관의 폭력, 나자닌과 다른 여성 수감자들과 함께 준비했던 아리엘 도르프만의 연극 <죽음과 소녀>, 빠올리나를 향한 남편 헤라르도의 폭력, 아바를 향한 남편의 폭력. 엘리트 여성 나자닌의 단식 투쟁이나 그녀의 연극을 향한 열정에 무심했던 여성 수감자들이 죽어가는 나자닌에게 몰래 나누어 주던 음식. 움직일 수 없을 지경으로 건강이 악화된 나자닌의 몫을 나누어 가지고 교도소 담장 아래 붉은 꽃을 심던 여자들의 몸짓. 정치범 나자닌과 거리를 두려던 아바, 그럼에도 함께 <죽음과 소녀>를 공연하는 상상을 나누던 나자닌과 아바.
‘연극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에 나자닌 데이히미는 없다’고 쓸 때, 나는 이 연극이 나자닌과의 불가능한 인터뷰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쓴다. 인터뷰어 아바와 인터뷰이 나자닌 따위의 구도는 없다. ‘극중극’에서 나자닌 배역을 맡은 인물은 ‘나자닌을 실제로 인터뷰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그런 인터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니와 연극이 진실로 지향하는 바도 아니다. 연극은 나자닌을 일종의 순교자처럼 상정해 그의 ‘명예로운’ 죽음에 경의를 표하는 식으로 애도하기보다는 흩뿌려진 그의 조각들을 줍거나(마치 나자닌의 수첩을 줍듯이) 심던(마치 붉은 꽃을 심듯이) 여자들, 석방 후에도 아이를 인질 삼는 남편에 의해 끌려갔거나 그나마 아바처럼 어딘가로 망명했을 바로 그 여자들과 나자닌의 삶을 잇는 방식으로 애도하려 한다.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 공연 사진. 나자닌 역을 맡은 배우가 쓰러져 있고, 그 위에 카키, 갈색 담요가 여러 겹 둘러있다. 
            그의 발치에 수감자 역을 맡은 두 배우가 나자닌의 노트 묶음을 넘겨보고 있다. 
            뒤편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또 다른 수감자 역을 맡은 배우가 있으나, 그의 모습은 어두워 잘 식별되지 않는다.

아바를 위한 인터뷰

하지만 애도는 수월하지 않다. ‘극중극’의 소품들이 계속해서 삐걱대기 때문이라거나, 극 초반부터 불길하게 카메라를 향해 총 쏘는 시늉을 하던, 헤라르도 배역을 맡은 인물(계속해서 ‘배역을 맡은 인물’이라는 거추장스러운 표현을 반복하는 이유는 관객이 ‘극중극’ 안에서 배우를 연기하는 이들의 ‘진짜’ 이름을 정말로 알 수 없기 때문이며, ‘극중극’이 또다시 <죽음과 소녀>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이 극 막바지에 이르러 아바의 스토커로 밝혀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극중극’의 배우들은 나자닌에게도, 아바에게도 대단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생활이 앞서고 배우로서의 경력이 앞선다. 로베르토 배역을 맡은 인물이 이 지점을 명확히 드러내는데, 그는 리허설 중간에도 다른 공연 오디션 관련 전화를 받기 위해 망설임 없이 뛰쳐나가고, 틈날 때마다 다른 연극의 대사를 빌려와 배우들과 장난치고 떠든다. 연습실 바깥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고, 배우들은 그저 빨리 리허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니 배우들 중에서 나자닌과 아바의 이야기에 가장 지대한 관심을 쏟는 건 스토커 헤라르도인 셈이다. 로베르토 배역을 맡은 인물의 입으로 말해지기로, 헤라르도는 아바가 여태까지 쓰고 연출한 연극을 빠짐없이 관람한 엄청난 팬이다. 그는 <죽음과 소녀>의 헤라르도는 물론 로베르토의 심정까지도 지나치리만큼 ‘리얼’하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 듯하며, 자신만의 인물 해석을 덧붙여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애드리브까지도 불쑥불쑥 삽입하기 때문에 연출 아바와 갈등을 빚기도 한다. 이 갈등은 자신이 ‘진짜’를 알고 있고, 알 수 있으며, 모른다면 알아낼 권리까지도 있다고 은밀히 확신하면서 자신을 심판자, 인터뷰어, 궁극적인 연출가로 위치 지으려는 헤라르도와 아바의 차이를 드러낸다.
헤라르도는 결국 모두가 연습실 혹은 극장을 떠날 때를 노려 아바를 납치해 ‘아바를 위한 인터뷰’를 연출한다. 그녀의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고 녹음기를 트는 헤라르도의 모습은 나자닌, 아바, 나스린, 빠올리나 등 여성들을 가족 제도 안팎에서 구속해왔던 온갖 남성들의 얼굴을 조금씩 다 닮아 있다. 한편 극장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퇴근하려던 이름 없는 여러 여배우들은 뒤늦게 아바가 기척 없이 사라졌음을 깨닫고 그를 찾아 헤맨다. 이들은 아바와 헤라르도를 찾아냈을까? ‘인터뷰’라는 이름을 빌린 심문이요 고문인 그것을 중지시킬 수 있었을까?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 공연 사진. 무대 바닥에 파란 조명이 들어오고, 그 위에 쪼그려 앉은 헤라르도의 얼굴에 붉은 조명이 비친다. 
            검은 바지와 흰 셔츠 위에 흰색 조끼를 입은 헤라르도는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앉아 분노에 찬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무대 뒤편에는 헤라르도가 앉은 곳보다 높은 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곳에 눈을 가린 채 의자에 포박된 아바가 있고, 그의 앞에는 삼각대에 설치된 캠코더 한 대가 놓여 있다.

목격자를 향하는 인터뷰

부디 그럴 수 있었기를 상상하고 바라는 것 외에 관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대의’를 위해 싸워왔던 것만 같은 나자닌과 자신은 다르다고 중얼거리던 아바, 그러나 나자닌의 수첩을 줍고 그와 함께 연극을 꿈꾼 아바. 글을 읽을 줄 아는 나자닌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수군거렸지만 그녀의 몫까지 고된 노동을 감수하던 여성 수감자들, 아바가 시달리는 스토킹에 대해 그 무엇도 확신하지 못하지만 분명 비슷한 일을 겪은 또 다른 여자들을 아는 배우들, 아바와 헤라르도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아바의 이름을 외치며 헤매는 여배우들… 이 목록의 끝에 관객을 추가할 수 있을까? 관객을 더해보아도 좋을까? 연극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는 결국 ‘극중극’에서 움직이는 주변자들, 목격자들을 향해 있으며 이들을 목격하게 되는 관객을 향하므로.
다시. 타인의 열망과 좌절이 담긴 기록과 우연히 마주쳐본 적 있고 그것을 주워 본 사람들. 그것으로부터 구체적인 상상을 나눠받은 사람들. 그것을 다시 땅에 심는 사람들. 교도소 담장 뒤에 있은 여자들을 ‘실제로’ 만나지 못하더라도 흔적을 목격하고 마는 가족, 지인, 혹은 완전한 타인들. 헤라르도의 비장한 연출의 반대편에 이것들이 있다. 나자닌 데이히미의 공백 곁에.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의 공연 사진. 검은 무대에 매끈한 흰색 바닥이 깔려 있다. 그 위에 연극을 연습 중인 아바와 세 명의 배우가 있다. 
            가장 왼편에 선 아바는 검은 상하의 위에 무릎까지 오는 갈색 조끼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서 있다. 가운데 두 배우는 무릎을 꿇고 양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채 바닥을 응시한다. 
            두 사람 모두 연한 하늘색 수감복을 입고 히잡을 착용했다. 가장 오른편에 선 나자닌 역의 배우는 갈색 바지와 수감복, 히잡을 쓴 채 아바를 바라본다.

[사진 촬영: 최인호 / Copyright 극단 북새통]

극단 북새통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
  • 일자 2023.12.1 ~ 12.17
  •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 이수민 연출 남인우 출연 권슬아, 서나영, 선명균, 이상홍, 이안나, 주혜원, 최다은, 하별, 황아름 드라마터그 김은선 무대 유태희 사운드 김혜영 조명 이유진 움직임 이윤정 의상 강정화 그래픽디자인 노지호 사진 최인호 영상기록촬영 플레이슈터 조연출 하연수 제작기획 김진희 홍보 (주)퍼포밍아츠네트워크
  • 관련정보 https://theater.arko.or.kr/product/performance/258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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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팔도
누워있기협동조합의 조합원. 비평과 번역, 아카이빙 행위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연극과 공연에도 관심이 생겼다.
트위터 및 블로그 @todkdlel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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