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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비평

2023 리뷰 필진 프로젝트

김민조, 진송, 팔도

제248호

2023.12.21

2023년 한 해 동안 웹진 연극in의 리뷰 지면을 담당해주었던 고정 필자들은 개별 공연의 리뷰 작성 외에도 ‘연극’, ‘비평’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찾기 위한 스터디를 지속해왔습니다. 각자 공연을 볼 때 좋아하는 순간들을 모으는 데에서 시작한 이 스터디는, 그것이 왜 우리의 눈과 마음을 잡아끄는지, 어떤 의미를 생산하는지를 고민하며 한 지점에 도달하였습니다. 이 글은 김민조, 진송, 팔도 세 필자의 공동집필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순간들

1.
여성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무대에 나와 자기소개를 한다. 자신의 병명을 강박증으로 소개한 한 배우가 무대 한쪽에서 가방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다른 배우가 이쪽으로 오라고 부르지만 그 배우는 빗자루로 바닥을 쓸어내는 일을 한동안 계속한다. 서로 익숙한 일인 듯, 배우들은 실랑이를 마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극단 애인 <우리, 여기 있어요>(2018)

2.
‘휴게실 내 금연’이라고 써 붙여진 메모 보드 앞에 선 페이는 한 팔에 붕대를 둘둘 감고 있다. 몇 차례의 실패 후에 그는 기어코 담뱃불을 붙이고 만다. 집요하고 천천히 메모 보드 앞으로 이동해 금연 표지를 놀리듯 연기를 내뿜는다. 극이 한참 전개된 후에 페이는 어색한 박자로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밝힌다. 그 단어를 내뱉는 순간, 조명 아래 선 배우의 얼굴과 손의 주름이 선명해지는 듯하다. 배우와 배역의 신체가 뒤섞이는 시간이다.
극단 적 <스켈레톤 크루>(2023)

3.
<매머드머메이드 주주총회>에서 김은한은 자신의 옛사랑 이야기를 하다가 펑펑 울어버린다. 김은한의 옛사랑 이야기는 자투리 연극‘들’의 모음 가운데 뚱딴지처럼 튀어나와 그것이 김은한 본인의 실화를 기반으로 한 ‘썰’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를 분간하기 힘든 형태로 전개된다. 그러다 김은한은 감정에 북받친 듯 연극을 끝내버린다. 김은한이 터뜨린 울음을 마지막으로 연극 역시 끝이 나 버리기에(허구―사실 사이의 긴장에 ‘연극 끝!’이라는 마침표를 찍어버리기에) 나는 이 울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분하지도 못하고(연기였던 것인지, 그가 ‘정말로’ 울어버린 것인지!) 우는 얼굴을 앞에 두고 차마 진위 여부를 판가름하지도 못하는 채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는 연기’와 ‘정말로 우는 것’을 도무지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통제 불능’ 상태라니, 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이보다 매력적인 장면이 있을 수 없다.
매머드머메이드 <매머드머메이드 주주총회>(2022)

<매머드머메이드 주주총회>의 공연 사진. 노란 조명과 벽면을 따라 줄지어 놓인 초록잎의 화분들이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이다. 
            카멜색 코트를 입고 동그란 안경을 쓴 김은한이 보면대를 앞에 둔 채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매머드머메이드 <매머드머메이드 주주총회>
(사진 제공: 송유경)

시놉화

1.
연극 비평에서 연극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거의 필수적인 일이다. 연극 비평이 일회적인 사건으로서의 연극에 대한 기록의 기능까지도 수행하기 때문이다. 비평의 독자는 줄거리 요약을 통해 보지 않은 연극까지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연극 비평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줄거리 요약에 의지하는 비평은 1978년도 『필름코멘트』 7-8호에 수록된 영화비평가 조너선 로젠봄과의 대담 「<욕망의 모호한 대상>: 논-내러티브에 대한 즉흥 세션」에서 언급되는 바 (본 맥락에 맞게 변형하자면 연극을) ‘시놉화(synopsize)’할 위험이 있다. 이 대담의 참여자들은 “시놉시스는 덜 용기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구명 장치일 뿐만 아니라, 영화를 읽도록 “상정된” 방식의 플라톤적 모델이자 읽히도록 “상정된” 영화들의 플라톤적 모델”1)이라고 주장한다. 영화 비평에서처럼 연극 비평 또한 연극의 시놉화를 통해 관객이 줄거리를 중심으로 연극을 읽게 할 위험이 있다. 요약된 줄거리는 이미 연극의 비(非)서사적 요소들과 길항하는 과정에서 구성된 것이며, 비평가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을 때에도 비평가 본인이 그것을 반성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 역시 또 다른 위험성이다. 줄거리 요약은 이미 연극의 결말을 아는 상황에서 연극 전체를 굽어보며 행해지기 때문에 조감도를 그릴 때처럼 안정적인 하나의 시선과 직선적인 시간성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은 인식과 경험의 사각지대를 만들어낸다. 서사로 환원될 수 없는 연극을 ‘서사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서’ 더 잘 ‘시놉화’하기 위해서라도, 연극의 비서사적 순간들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와 비평이 필요하다.
이때의 ‘비서사적 순간들’에 대한 분석은 연극의 ‘형식’에 대한 분석과는 다르다. 형식과 내용이 구분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전제하고서, 형식은 하나의 구조처럼 서사를 감싸고 있거나 서사에 녹아들어 있고, 혹은 서사의 구조 자체를 일컫는다.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종합이 가능한 것, 그래서 특정한 방식으로 연극을 ‘읽게끔’ 유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의 향유를 허락하며 시공간에 개방되어 있는 보다 파편적인 순간들이다.

2.
비평이 제공하는 “시놉시스는 덜 용기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구명 장치”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반박하거나 왜곡하고, ‘장난’ 걸 만한 재료, 말하자면 다른 비평을 위한 재료가 되어줄 수도 있다. 서사를 요약하고 장면을 묘사하고 ‘캐릭터를 과도하게 설명’하는 바로 그 지점들에는 이미 비평가의 해석이 개입되어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다른 지평을 열어줄 수 있다. 제아무리 치밀하고 야망 큰(?) 비평이라도 비평 대상을 정복하는 것, 비평 대상에 대한 모든 가능한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비평 또한 어디까지나 읽히는 사람에게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으니까. 결국 ‘시놉화’하는 비평보다도 하나의 ‘시놉’을 완전한 것으로 닫아놓는 데에 집착하는 비평이 문제가 된다. 이런 비평은 하나의 서사로만 읽히기를 바라는, 연출 의도에 정확히 부합하는 독해/감상만을 바라는 연극 혹은 어떤 다른 예술 작품과도 다르지 않다. 비평을 창작으로 이해한다면 말이다.

우로보로스

1.
우로보로스는 통상적으로 ‘꼬리를 삼키는 존재’로 이해되지만 사실 우리는 알 수 없다. 꼬리가 머리에 삼켜지는 것인지, 꼬리가 머리를 뚫어버릴 듯이 침투하고, 머리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있는 것인지. 무엇이 무엇을 집어삼키고 있는 건지 토하고 있는 건지 판명할 수 없도록 하기에, 서로의 속에 들어간 모양이 기이한 조화를 이루기에 우로보로스는 오랜 시간 매력적인 기호로, 상징으로 상상력을 자극해왔으며 이 글에서는 연극의 ‘서사적인 것’과 ‘비서사적인 것’의 불확정적인 관계에 대한 비유로 채택되었다. 우로보로스의 모호한 몸체는 그것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전체를 굽어보며 조감도를 그릴 수 없도록 만들고, 도대체 그것의 소화 기관이나 배설 기관(있기는 한 건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할 수 없도록 한다.

2.
배우의 몸짓과 표정, 의상, 무대에 놓인 소품, 조명, 음향 같은 것들은 몇십 분 동안 약속된 역할을 수행하도록 되어있지만 규칙들은 오직 그것이 뒤흔들리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어긋날 가능성 안에서, 통제 불가능성을 예감하면서만 작동한다. 연극 속 서사가 자꾸 완성되려고 한다면, 혹은 적어도 자꾸 어떤 방향으로 가려고 한다면 비서사적 순간은 그것을 불러 세운다. 규칙이 위반 없이 홀로 설 수 없듯이 연극은 비서사적 순간 없이 홀로 작동할 수 없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언급한 <우리, 여기 있어요>의 한 장면은 우리가 연극에 대해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을지도 모를 어떤 생각, 즉 연극이 사전에 계획된 대로 통제될 수 있고 통제되어야만 한다는 관념에 균열을 일으킨다. 신경다양인 관객에게 ‘정숙한 관람’이라는 에티켓이 억압적일 수 있듯이 어떤 출연자에게 주어진 순서대로 행위를 조절하고 통제하라는 요구는 비현실적일 수 있다. 공연미학의 차원에서 의식적으로 추구되고 장려되는 ‘라이브니스’와도 구별되는 지극히 육신적인(corporeal) 경련들. 연극이라는 이름의 시뮬레이션/재생 장치의 규율에 의해 통제받지만 완전히 복속될 수 없는 미세한 꿈틀거림들.
결국 자꾸만 비서사적 순간들에 머무르게 되는 이유는 연극이 서사에만 봉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 스스로가 위반, 중지, 왜곡, 탈선, 미완결성과 불확정성에 놓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연극의 변태적인 숙명(연극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은 창작자가 거부한다고 해서 배제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서사성은 그것을 거부하는 몸짓 속에, 연극의 운동 속에 여전히 거기에 있다.

3.
연극의 비서사적 순간들은 서사의 직선적인 움직임을 교란하는 힘으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비서사적 순간들과 서사의 흐름이 완전히 반대의 방향을 향해 있을 때도, 이를 반작용이 아니라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연극 <애 개 아파트>(2023)에서, 먼 미래를 상상하거나 오래된 과거를 회상하는 서사의 흐름과 달리 배우들의 몸짓은 반복적이며 제자리를 맴돈다. 제자리를 맴도는 몸짓들이 있기에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슬픔들이 서로의 곁에 머무르게 된다.

4.
그러나 연극에서 ‘서사적인 것’과 ‘비서사적인 것’이 단지 평행선을 그리는 대립항으로만 이해되어야 할까. 가령 게오르그 짐멜은 『배우의 철학』(1908)이라는 글에서 배우가 외부에서 미리 그려진 각본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과, 배우가 무대에서 자발적으로 솟아오르는 충동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이 양립 가능하다고 썼다. 짐멜이 보기에 오히려 연기 예술의 창조성은 이 모순처럼 보이는 원리들이 조화를 이루는 순간에 나온다.2) 어쩌면 순전히 계획대로 재생될 수도 없고 순전히 충동적인 행위에 의존할 수도 없다는 이중적인 제약 조건이야말로 연극에 생산적인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여기 있어요>의 공연 사진. 나무 벤치와 테이블, 책장 등이 듬성듬성 놓인 무대. 
            흰색 반소매 블라우스에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오는, 흰색과 검은색 줄무늬가 사선으로 들어간 치마를 입은 여성이 무대 가운데 서 있다. 
            이 여성은 주머니가 있는 앞치마를 허리춤에 두른 채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내려다본다. 무대 뒤쪽 의자와 책상에 걸터앉은 두 여성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극단 애인 <우리, 여기 있어요>(2018)
사진 제공: 극단 애인

청소하는 극장

연극은 극장에 놓인 사물에 흔적을 새기고, 서사가 지나간 발자취를 남기며 상연된다. 그러나 다음날 연극이 다시금 상연되려면 그 흔적을 지워내어 개막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하루의 공연이 끝나면 창작진들은 어지럽게 흩뿌려진 꽃가루를 쓸어 담고, 넘어진 의자들을 세우고, 분분하게 일어난 먼지를 잠재우기 위해 공중에 분무기를 뿌린다. 극장이 서사가 쓰였다가 지워지기를 반복하는 일종의 빈 서판으로 기능할 수 있으려면 누군가는 그 공간을 매일 같이 치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극장을 청소하는 행위’를 보는 경험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배우가 분무기와 대걸레를 들고 무대 곳곳에 새겨진 서사의 흔적을 지워내기 시작할 때, 관객은 문득 극장이라는 서판이 물질적으로 거기 있음을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침묵이 언어를 쓸어내는 예외적인 시간 동안 우리는 서사의 언저리로 물러나 무대에서 노동하고 있는 자의 모습을 우두커니 응시하게 된다. 극장은 채워지는 공간임과 동시에 ‘지워내는 공간’임을 새삼스레 상기하며.
지금아카이브의 <결투>(2019/2023)에서 극장은 본체와 분리체의 결투가 벌어지고 둘 중 하나가 죽어서 치워지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연극이 시작되면 결투 진행요원이 청소 카트를 밀고 나와 죽은 사람들의 핏자국을 문질러 지운다. 진행요원은 자신이 맡은 청소 업무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할 뿐, 한 사람이 둘로 분열되는 현상과 자신이 매일 같이 치우는 시신들의 의미에 관해서는 조금도 의식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공중에 뿌린 물방울을 바라보며 아이처럼 천진하게 미소 짓는 진행요원의 얼굴은 관객의 마음 한구석을 서늘하게 만든다. 극장은 인간의 흔적을 비정하게 씻어내는 아레나(arena)이며, 우리는 어젯밤에 치워진 것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여기 모여 있다. 진행요원의 미소는 앞으로 관객들이 보게 될 서사와 이미 지워진 서사를 날카롭게 가르는 섬광 같은 이미지로서 각인된다.
그러나 극장을 청소하는 행위가 서사의 말소라는 효과로 귀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모든 것을 무(無)로 쓸어내는 일이 아니라 사물들의 배치를 복원하는 일로서, 청소는 이미 벌어진 사건과 앞으로 도래할 사건 사이에서 조정과 돌봄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래빗홀씨어터의 <마른대지>(2018/2020)에서 중년 남성으로 보이는 관리인이 등장하여 에이미와 에스터라는 소녀들이 수영장 라커룸에 남기고 간 임신중절의 흔적을 오랫동안 말없이 지워주는 장면이 그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관리인은 에이미와 에스터가 구축해온 서사의 흔적을 지움으로써, 다시 말해 두 소녀를 괴롭힐 만한 후일담이 시작되지 않도록 무대를 비워내는 방식으로 그들의 서사가 완결되도록 돕는다. 그렇게 극장은, ‘지워냄’이라는 행위를 둘러싼 정치성에 대해 사유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사물

『대항성 선언』에서 폴 프레시아도는 손, 팔꿈치, 발, 머리 같은 성기 외의 신체 부위나 사물을 ‘딜도화’ 해보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관점이 신체를 “단일한 의미론적―성적 축을 중심으로 조직”하는 이성애 중심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교란할 수 있기 때문이다.3) 남성성을 남성기로부터, 쾌락을 삽입섹스와 재생산중심적 섹스로부터 분리해 사유하도록 돕고 신체와 사물의 상호의존성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딜도화’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연극에서도 ‘딜도화’의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배우의 신체가 “표면과 영토로, 즉 딜도의 자리바꿈과 자리잡음의 현장”4)이 되고, 그것의 속도, 강도, 떨림, 방향에 개입하는 사물의 존재감이 무대를 장악하는 장면을. 연극은 배우의 신체라는 무대 위에, 그리고 극장 무대 위에 오른 ‘소품’이 일반적인 의미의 ‘소품됨’을 초과하는 찰나를 현시한다. 연극이라는 상황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스켈레톤 크루>(2023)를 여는 첫 장면에서, 떡하니 금연 표지가 붙은 직원 휴게실에 도착한 주인공 페이는 깁스를 한 손으로 담배를 잡고 불을 붙이기 위해 고전한다. 의도치 않은 부상 때문에 두텁게 붕대를 두른 배우의 팔, 그에 비해 너무 작은 라이터, 서툴고 둔한 손놀림, 다음 장면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페이가 담배를 피워야만 하기에 하염없이 지연되는 듯한 극장의 시간, 그 와중에도 계속 헛도는 라이터 휠. 이 장면은 한참 후에 밝혀지는 페이의 퀴어함에 대해서 어떠한 대사도 없이 ‘말’해주며, 오랜 기간 노조 대표를 맡아온 자동차 공장 노동자이자 노년에 접어든 레즈비언 부치인 페이의 서사와 결합되면서는 일종의 페티쉬로서 관객에게(어쩌면 나한테만⋯) 다시, 계속 출몰한다.

그러니 결국 불붙는 담배는 페이의 반골 기질이나 장난스러운 성격 따위를 암시하는 소품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하는 손 덕분에, 즉 외설적이고 추방당한 불편한 몸짓으로 노동 도구와 합쳐지고, 탁월하게 기계를 조작하며, 뜻밖에 기계와 짝을 짓고, 몸의 배관공사를 손쉽게 해내고, 다정하게 군림함으로써 여성성을 배신하는 손 덕분에 자신의 여성적 조건에서 벗어”나는 “미국 다이크”5)의 닳고 다친 손의 연장이 된다. 이 장면은 페이가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소리 내어 더듬거리며 밝히는 장면과 맞부딪치면서, 사물과 상호의존해 온 페이의 역사야말로 ‘정체성’이라는 표지보다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남긴다. 그리고 극 결말부에서 끝내 공장 기계들의 부품들을 훔쳐 달아나는 페이는 더 이상 무대 위에 없지만 무대에, 극장 안에 자신이 사물, 기계, 딜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지극히 퀴어한 비밀을, 연극 또한 그러한 존재라는 비밀을 한 줌 남겨놓고 간다. 그렇게 나는 어쩌면 노화에 의해서, 노동 중에 사고로 인해서, 혹은 격렬한 섹스 탓에 팔을 다쳤을 페이를 상상한다. 그러면서도 결국 기계 부품을 이고 지고 어디론가 떠난 페이의 노후에 대해 생각한다. “[장애로 인해] 부치로 살 능력을 잃게 되는 상황에 부딪치면? 빌어먹을, 농담도 심하지”6)라는 핑켈스타인의 음성이 페이의 음성과 겹치는 환상을 본다. 그 음성을 강애심 배우가 연기하는 페이의 둔탁하고 주름진 손과 담배 위에 덧대어보게 된다. 다시, 또다시.

<새빨간 스피도>의 공연 사진. 수영장의 타일 무늬를 본뜬 패턴의 무대 바닥과 뒷벽. 
            흰색, 하늘색, 검은색으로 구성된 무대와 달리 붉은색과 검은색 조합의 반신 수영복을 입은 레이가 오른 다리를 뒤로 접어 올린 채, 오른손을 하늘 위로 힘차게 뻗고 있다. 
            그의 왼편에는 바지를 정강이 중간까지 접어 올린 양복 차림의 인물이 누워있고, 레이의 앞에는 숫자 4가 적힌 흰색 출발대가 놓여있다.
극단 신작로 <새빨간 스피도>(2023)
(사진 제공: 극단 신작로)

극장의 몸들은 서로에게 사건성을 부여한다. 몸이 몸으로 존재함으로써, 연극은 몸과 몸이 마주치는 현재적인 사건이 된다. 마주침이라는 사건은 때로 죄의식을 통해 그 발생을 알리기도 한다. 예컨대 ‘보았다’가 아닌 ‘봐 버렸다’는 감각. ‘(보도록) 허락받지 않은 것을 보고야 말았다’는 다소 죄스러운 목격의 감각.
관객은 어둠 속에, 그리고 다중 속에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시선의 불평등 속에서 일방적으로 무대의 조명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배우를 바라본다. 배우는 자신이 관객의 눈이라는 카메라에 담기로 결정하지 않은 것까지도 노출할 수밖에 없는 무방비의 상태에 처해 있다. 숨길 수 없는, 계획하지 않은, 통제할 수도 없는 몸이 식은땀을 흘린다. 눈물을 흘리다가 콧물을 흘린다. 손끝을 바들바들 떤다. 또는 목소리가 떨린다. 부끄러움 없는 조명이 피부의 잔털을, 흉터를, 여드름을 비춘다. 분명히 조명의 세례를 받고 있으나 주목을 요청하지 않는 그것들에 내가 주목하는 순간, 우연한 사건은 일어나고야 만다.
몸은 극장이 서사의 논리적 흐름에 따라, 연출에 따라, 배우의 의지에 따라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한 잔여로 가득 차 있음을 끊임없이 들키면서 누설한다. 앞서 언급된 <매머드머메이드 주주총회>(2022)에서 김은한이 연기 도중 터뜨려버린 눈물(혹은 눈물을 터뜨려버리는 연기)도 우연한 마주침을 유발하는 것이자 우연한 마주침의 참여자인 몸의 일종이다. 혹은 몸의 통제 불능성을 다룬 연기이다. 한편 이 통제 불능성이 작가이자 배우인 김은한에 의해 연출되고 연기되었다는 점은 ‘통제 불능성’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는 것을 매우 난감하게 만든다. 김은한은 통제 불능의 상태를 관객 앞에 숨김없이 내보이며 한없이 취약해짐과 동시에 이야기와 현실, 그리고 연기와 실제 사이의 혼란을 야기함으로써 관객이 지닌 시선의 권력을 따돌리는 해석 불능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새빨간 스피도>(2023)에서 남성 수영선수인 ‘레이’ 역할을 연기한 경지은의 몸, 그리고 그 몸과 마주하는 관객의 몸은 또 어떠한가? 성별이 모호한, 근육질로 단련된 배우 경지은의 몸 위에는 딱 달라붙는 수영복이 입혀져 있다. 관객들의 시선은 경지은의 성별을 판독하기 위해 바삐 움직인다. 경지은의 입에서 ‘여성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첫 대사의 순간까지도 몸을 해석하고자 하는 다소 폭력적인 의지는 멈추지 않는다. 배우의 몸은 관객의 시선으로부터 숨을 길 없이 무방비하다. 몸은 몸을 탐색하는 게걸스러운 시선들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 무방비함, 통제 불능성은 남성 혹은 여성으로 배우의 몸을 해석하고자 하는 관객의 시선과 쉬이 해석되지 않는 불분명한 신체 간의 불화를 만들어낸다. 대상을 포착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폭력적인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이 불화는 분명히 <새빨간 스피도>가 구성하는 퀴어함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퀴어한 것은 기존의 성별이분법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틀로부터 벗어난 것, 그 틀과 불화하는 것, 따라서 ‘이상한(queer)’ 것이다. <새빨간 스피도>는 연극에서의 역할에 대한 젠더 규범, 그리고 몸에 대한 젠더 규범과 불화하는 경지은의 몸을 무대에 세운다. 아니, 경지은의 몸이 젠더 규범과 불화하도록 그를 무대에 세운다. 관객과 마주하는 것, 해석을 향한 관객의 욕망과 마주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하는 ‘통제 불능’의 몸은 몸을 통해 해석의 의지를 맞받아치며 기존의 규범으로는 ‘해석 불능’한 퀴어한 몸을 만들어낸다. 이렇듯 팽팽한 긴장 속에서 몸을 통해 퀴어함이 구성되는 방식은 통제 불능과 해석 불능의 경첩에 있는 연극적 순간이 무대와 관객 간에 얼마나 상호적인지를, 서사가 말하지 않는 것을 얼마나 생산적으로 발생시키는지를, 따라서 사건적인지를 보여준다.

순간의 분유

우리는 공동창작의 방식으로 구성한 이 글에서 ‘순간비평’, 즉 공연 내에서 목격한 연극의 순간들을 분유(分有)할 수 있는 비평의 가능성에 대해 함께 상상했다.
‘순간비평’은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 연극의 ‘순간들’에 주목을 요한다. 연극에 대한 순간비평적 관점은 연극 감상의 영역을 포착되기 어려운 미시적인 곳까지 확장한다. 배우의 근육의 미세한 떨림, 사물에 녹아 있는 세월의 흔적이나 관객의 마음을 찰나 스쳐 간 죄의식처럼, 순간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연극의 심원한 일부로서 풍부하게 향유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순간비평은 연극에 대한 논의를 미시적인 차원으로 확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연극 일반에 대한 이론을 정치하게 펼쳐 나가는 데에도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순간비평이 주목하는,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 시공간의 현재성과 일회적인 사건성은 연극의 장르적 개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순간비평은 연극비평이 연극의 안팎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포털이 될 수 있다. 순간비평은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 연극 고유의 물질성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자 한다. 물질을 통해 구현되는 장르로서의 연극은 장애학, 퀴어 이론, 객체 지향 존재론, 신유물론 등 물질과 관련된 다양한 담론들과 생산적으로 호흡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다.
순간비평은 작품을 통어할 수 있는 하나의 시선이자, 객관적이고 권위적인 조감도로서 기능하던 연극비평을 탈안정화하고자 한다. 순간비평적 관점은 연극의 참여자들이 동일하게 공유 가능한 단일 객체로 연극을 바라보지 않는다. 순간비평에서 연극은 공유 가능한 단일 객체가 아닌 복수의 인상들로, 순간들로 분유된다. 따라서 연극을 조감하는 연극비평의 권위는 불가능해진다. 이는 궁극적으로 기존의 연극비평을 탈안정화할 뿐 아니라 창작자의 권위, 그리고 완결된 해석 대상으로서 간주되는 연극 그 자체를 탈안정화할 수 있다.

  1. 함연선, 「[비평의 비평] ‘씨네21식 비평’ 비판」, 『마테리알 온라인』(https://ma-te-ri-al.online/archive/746/)에서 재인용.
  2. 게오르그 짐멜, 신소영 역, 『배우의 철학』, 연극과인간, 2010 참조
  3. 폴 프레시아도, 이승준, 정유진 옮김, 『대항성 선언』, 포이에시스, 2022, 81쪽.
  4. 위의 책, 73쪽.
  5. 위의 책, 242쪽.
  6. 제인 갤럽, 김미연 옮김, 『퀴어 시간성에 관하여』, 현실문화, 2023,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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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김민조
협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비평가를 지향합니다.
동시대 퀴어, 페미니즘, 장애, 포스트휴먼 연극의 흐름에 대한 반응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기와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를 잘 못해서 큰일입니다.
wingmn1k@gmail.com

진송

진송
2020년 7월 『문장웹진』에 「남자 없는 여자들」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비평 콜렉티브 ‘누워있기협동조합’에서 재미있는 기획들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의 구성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블로그 ‘진진송의 블로그(blog.naver.com/zinsongzin)’를 운영 중이다.
zinsongzin@gmail.com

팔도

팔도
누워있기협동조합의 조합원. 비평과 번역, 아카이빙 행위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연극과 공연에도 관심이 생겼다.
트위터 및 블로그 @todkdlel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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