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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나

극작가동인 괄호 <다른 부영>

성수연

제249호

2024.01.25

이번 호 [리뷰]에 게재된 글은 ‘2024년 웹진 연극in [리뷰] 코너 필자 공모’의 선정작입니다. 공모에 선정된 필자는 2024년 한 해 동안 [리뷰] 코너의 고정 필진으로 활동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거울을 본다. 거울 안에는 내가 있다. 나는 하나일 수밖에 없는데 거울을 볼 때마다 또 다른 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거울 밖의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이렇게 말한다. “진짜 왜 그렇게 생겼어?” 거울 속 자기도 나랑 똑같이 생겼으면서. 유아기를 지나 거울을 보기 시작할 때부터 나의 시선은 타인의 시선이 되어 칼처럼 나에게 돌아온다. 그렇게 나와 똑같은 모습의 적이 하나 생긴다. 그는 거울을 볼 때마다 나타날 것이고, 곧 거울 밖을 활보하며 타인의 시선을 대변하며 내가 나 자신을 검열하게 할 것이며, 이내 나의 내면에 정착하여 안에서까지 나를 공격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와 평생을 함께 할 것이다.
<다른 부영>에는 주인공 부영과 ‘다른 부영’이 나온다. 다른 부영은 거울 속 부영의 이미지가 거울 밖으로 걸어 나온 것 같다. 거울을 열심히 보기 시작한 사춘기에 처음 부영의 앞에 나타난 그는 부영의 눈에만 보인다. 다른 부영은 홍콩영화에 심취해 커서 따거(큰형) 주윤발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부영의 욕망을 반영하듯 주윤발처럼 선글라스와 가죽 코트를 입고 있다. 무대에는 시종일관 홍콩 느와르 영화의 주제가들이 흐르고, 부영은 보이지 않는 범죄조직들의 총알을 피하다가 실감 나게 보이지 않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다른 부영은 배우를 찍는 영화감독처럼 계속해서 드라마틱한 죽음을 연습하는 부영의 모습을 캠코더에 담는다.
이처럼 다른 부영은 부영 내면의 욕망을 반영하는 분신이기도 부영 자신을 바깥에서 관찰하는 시선이기도 하다. 부영이 배우 지망생으로 커가며 다른 부영은 액션장면의 연습 상대가 되어주기도, 부영의 짝사랑을 응원하기도, 카메라 감독처럼 연기에 대해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어릴 적 상상의 친구 같은 다른 부영 덕분에 부영은 외롭지 않지만 그의 피드백과 디렉션은 계속해서 자신을 의식하게 한다. 부영은 마치 배우가 감독의 시선을 의식하듯 항상 그의 시선을 의식한다.

<다른 부영>의 공연 사진. 흰색 일인용 소파와 바퀴 달린 등받이 의자가 있고, 그 앞에 부영과 다른 부영이 마주 본 채 쪼그려 앉았다. 부영은 빨간색 후드티에 흰 줄무늬 세 줄이 들어간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었고, 다른 부영은 검은 가죽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반투명한 선글라스를 썼다. 바닥엔 꽃가루와 리모콘 등 작은 소품이 어지럽게 놓여있고, 뒷벽엔 영화 <영웅본색>의 포스터가 하나 붙어있다.

여자-되기와 무한히 추락하기

영화에서 카메라의 시선이 가진 권력을 이야기한 로라 멀비는 “영화는 여성이 보여지는 대상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 이상으로 여성이 볼거리로 보여지는 방식을 만들어간다”1)고 한다. 스크린에 비춰지는 영상이 카메라의 시선으로 찍혔다는 사실은 가려진다. 가부장제의 프레임과 남성 관객의 욕망을 그대로 탑재한 카메라는 투명해지고 그 시선으로 찍힌 장면만 재현의 힘을 빌려 진실된 것으로 남는다. 이에 더해 내러티브와 시공간을 편집할 수 있다는 영상적 자유는 여성이 보여지는 방식, 즉 시선까지 형성한다.
<다른 부영>은 부영의 성장을 따라가며 여성이 가부장적 시선을 내면화해가는 방식을 보여준다. 사실 자신의 욕망과 사회의 욕망은 구분하기 쉽지 않으며 그에 저항하는 것은 스스로와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청소년기 부영이 목욕탕에 가면 ‘어머나 우리 부영이가 가슴이 생겼네’하며 들려오는 코멘트들처럼, 세상은 여자아이에게 끊임없이 과도한 시선을 준다. 알겠다. 알겠다. 스스로 알아서 잘 감시하고 있다. 24시간 다른 부영이 부영을 카메라로 찍고 있다. 따거를 존경하던 부영도 점점 따거와 자신의 입장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간다. 부영과 똑같이 배우를 지망하는 부영의 남자친구는 입장이 다르다.
부영이 어렸을 때 장만옥이 아니라 주윤발이 되고 싶어 한 이유도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남성인물은 성적 대상화라는 짐을 견딜 수 없다. 남성은 자신과 유사한 인물이 진열되어 보여지는 것에 저항한다. 그래서 볼거리와 내러티브의 분열은 스토리를 진행하고 사건을 발생시키는 능동적 인물로서의 남성의 역할을 지탱해준다.”2) 부영은 아빠를 연기하고, 전화 부스에서 피 흘리며 전화하는 장국영을 연기하고, 주윤발 버전으로 <갈매기>의 니나를 연기하며 장렬히 대학 연기과 입시에서 떨어진다.

<다른 부영>의 공연 사진. 바퀴 달린 등받이 의자에 앉은 부영이 A4 사이즈의 대본을 들고 연습 중이다. 다른 부영은 바닥에 앉아 캠코더로 부영의 모습을 녹화 중이다.

추락은 반복될 것이라고 영화감독을 꿈꾸는 기숙사 룸메이트 언니는 말한다. 존경하는 감독의 영화라며 부영과 함께 기숙사 방에서 보는 영화에서도 여자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언니가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나고 부영은 계속해서 여자1, 여자친구와 같이 이름 없는 여성인물들의 얼굴이 된다. 부영이 ‘여성스러운’ 톤으로 연습하는 “나를 사랑해?”라는 대사는 돌아오지 않는 상대의 답을 기다리고, 현실에서 임신을 하게 된 부영은 고맙다는 남자친구의 말이 무색하게 당연하게도 아기를 지운다.
‘젠더는 수행이다’라는 버틀러의 이론은 이제 명제가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부영은 어느새 자신이 맡은 역할의 ‘되기’에 너무 열중하여 다른 부영을 보지 못하게 된다. 운동선수 배역으로 캐스팅되어 정말 운동선수처럼 운동을 하는 부영에게 다른 부영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이유는, 다른 부영의 시선이 들어올 새 없이 이미 하나의 완전한 ‘됨’이 되어버렸기 때문 아닐까.
한 촬영장에서 조직의 보스를 사랑한 여성인물의 자살 장면을 찍는 부영은 계속해서 추락하는 장면을 반복한다. 지금까지 <영웅본색>의 장국영처럼 피 흘리면서 장렬히 죽는 연습을 했건만, 감독은 부영이 그네에서 내리듯이 홀연히 떨어지는 것처럼 연기하기를 바란다. 부영이 추락하는 과정은 어느 한순간이 아니다. 여성성의 수행처럼 반복되며 쌓여간다.

<다른 부영>의 공연 사진. 일인용 소파의 뒤쪽에서 부영과 그의 남자친구가 등을 맞대고 서서 신나는 몸짓을 하고 있고, 그들의 주변에 꽃가루가 흠뻑 흩날린다. 무대 앞에 쪼그려 앉은 다른 부영은 멍하니 정면을 응시한다.

거울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

추락의 무한한 굴레에 빠진 부영을 도와주는 것은 한동안 눈에 보이지 않던 다른 부영이다. 다른 부영은 부영을 툭하고 밀어버리고, 부영은 무언가 되려고 연기하지 않고 자신 그대로 떨어진다. 덕분에 장면이 오케이가 나지만 부영은 오히려 다른 부영에게 왜 도와줬냐며 화를 낸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이 되기 위해서 그토록 노력했는데 왜 다시 돌아왔냐고 하면서.
다른 부영과 부영의 화해는 다른 부영이 그동안 부영의 모습을 녹화한 캠코더 영상을 보여주며, 그 모든 모습들이 부영이라고 하면서 이루어진다. 그렇게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무협영화에 오디션 콜을 받은 부영이 다른 부영과 씬을 연습하는 장면이다. 자신을 거울처럼 닮은 적을 만난 여자 주인공이 적과 대결을 한다. 부영과 다른 부영은 계속해서 대결 자세를 취한다. 결국 무너져있는 부영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다른 부영, 자신과 싸워서 이기고 싶은 마음이다.
<다른 부영>은 부영과 다른 부영의 대결,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 대결에는 단일한 ‘나’ 혼자만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싸움이 아닌 젠더와 ‘나’, 사회의 시선과 ‘나’ 사이의 마찰이 있다. 마지막 부영과 다른 부영의 대결 장면은 계속 반복된다. 영화 <와호장룡>에서 장쯔이와 양자경의 대결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 모습은 승패를 겨루는 대결보다 마주하고 있는 상대에서 또 다른, 무수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춤이다.

<다른 부영>의 공연 사진. 흰색 소파 앞에 다른 부영과 부영이 마주 서 있다. 두 사람은 양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 올려 한 손을 앞으로 쭉 뻗고 다른 손은 귀 근처에 위치시켜 대결 자세를 취한다. 두 사람의 사이로 뒷벽에 붙은 <영웅본색> 포스터가 강조된다.

[사진 제공: 극작가동인 괄호 / 촬영: 문현준]

극작가동인 괄호 <다른 부영>
  • 일자 2023.11.30 ~12.3
  • 장소 나온씨어터
  • 극작 김진희, 도은, 신효진, 이소연 연출 김미란 드라마터그 김민조 출연 백혜경, 이세준, 이영주, 장샘이 무대디자인 송성원 조명디자인 박유진 음향디자인 전석희 자막제작 김미란, 극작가동인 괄호 조명오퍼레이팅 김태령 음향 오퍼레이팅 전석희 자막 오퍼레이팅 김민조 그래픽 장현지 사진 문현준 기획 나희경 기록영상 강수연 주최·주관 극작가동인 괄호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3016242
  1. 변재란, 유지나. 『페미니즘/ 영화/ 여성』, 여성사, 1993, 65쪽.
  2. 같은 책.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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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요다)

성수연(요다)
연극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수다스러운 관객을 지향합니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걱정이며 항상 기억나지 않는 장면을 함께 보충할 동료를 찾고 있습니다. 가끔 요다라고도 불리며 공연을 보고 집가는 길 지하철에서 와랄라 하는 계정(@walalainthesubway)이 있습니다. claire08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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