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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극장 한가운데서 다시 만난 당신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 설유진 신작 <이런 밤, 들 가운데서>

이의자

제249호

2024.01.25

이번 호 [리뷰]에 게재된 글은 ‘2024년 웹진 연극in [리뷰] 코너 필자 공모’의 선정작입니다. 공모에 선정된 필자는 2024년 한 해 동안 [리뷰] 코너의 고정 필진으로 활동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무대와 객석이 경계가 없다. 가변 극장인 스페이스111에서 종종 봐왔던 방식이지만 구역별 단차를 두지 않고 중심을 향해 바닥에 의자를 몇 개씩 붙여 놓았다. 연습실 형태와 다르지 않은 무대는 배우들에게 좀 더 익숙한 공간일 것이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왈츠 2번’의 선율에 맞춰 의자 사이를 오가는 춤사위 역시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고 편안하다. 대신 의자에 걸어놓은 외투 소매를 스치듯 오가며 체감하는, 매회 관객마다 다른 반응은 모닥불을 크게 때로는 작게 일렁이는 호흡일 것이다. 성글고 열린 무대처럼 보이지만 꽤나 정교할지도 모르겠다.

극장 중앙에 둘이 서면 옷깃이 닿을 듯 작은 원형 무대가 계단 하나 높이로 솟았지만 내 앞에 앉은 관객으로 인해 시야가 가린다. 하지만 처음부터 물결이 퍼지듯 원형으로 배치한 구도는 온전히 배우에게 집중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배우는 물방울처럼 파동을 일으키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그릇에 담긴 물처럼 관객들과 구분 없이 한 호흡이 된다. 그렇게 배우가 지워질수록 보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좁지만 함께 또 같이 곁에 붙어 앉아서 작은 온기라도 만들 수 있는 공간’으로 풀어보면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앉은 셈이다. 배우마다 한 차례씩 연기를 하고 나면 차례가 올 때까지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데, 어스름한 객석 너머로 그이를 의식하는 사이 그 옆에 앉은 당신이 보인다. 앞서 무대를 가린 채로 움직이지 않는 바위처럼 조형물이었으면 했었다.

<이런 밤, 들 가운데서>의 공연 사진. 목재 바닥은 중앙의 십각형을 중심으로 언덕처럼 솟아있고, 그 주위로 평평한 바닥에는 띄엄띄엄 의자가 놓여있다. 밝은 회색 상의와 어두운 바지를 입은 한 배우가 십각형 위에 서 있고, 다른 배우들은 주위의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본다. 둥글게 솟은 무대 위쪽으로, 가로로 긴 문자통역 판에 ‘소란 진취적이고 긍정적이고 자만적으로’라는 텍스트가 쓰여 있다.

당신은 낯설고 어색한 존재였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형태만 흐릿하게 보이는 유령이 아닌, 배우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표정과 집중해 맞잡은 손을 본다. 이태원 참사 추모 기도회를 재현하는 동안 당신의 눈가도 젖었을 텐데 보이지는 않았으나 알 수 있었다. 모닥불이 꺼지면 훌훌 털고 일어나 각자의 길로 나설 나그네들이지만 그 순간은 유독 모닥불이 뜨겁게 타올랐던 순간이었다. 평상복을 입은 배우들과 관객 구분은 점차 의미가 없어진다. 이제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는 ‘당신’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연출이 말하는 ‘더 큰 우리’,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듣고 느낀 감정은 불씨가 되어 설유진 작/연출이 위로를 받았던 노랫말처럼 ‘내 맘의 창가에 불 밝히면 평화는 오리니’.

뒤에 앉은 너의 기침 소리가 불편하지 않고, 옆에 앉은 너가 눈가를 훔치려고 손을 들어 올릴 때 네가 사라졌으면, 빈자리였으면 바랐을 여느 극장에서와는 마음가짐이 조금 다르다. 공감대는 이 연극이 공동체의 슬픔을 추모하는 방식이다. ‘온종일 불던 바람 잠들고 어둠에 잿빛 하늘도 잠든’ 이런 밤, 저 멀리 성냥불처럼 보이는 모닥불은 온기가 닿지 않아도 이정표만으로 반가운 것이다.

이 연극이 내내 아픔을 공감하는 데 주목한다면, 사람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그 태도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대사를 하기 전에 배우는 반드시 이름을 먼저 말한다. 고통을 견디는 수많은 이야기가 겹치지만 배우는 같은 이름을 외친다. 일인다역에서 겹치는 이름은 혼란만 줄 뿐이니 단역에게 배역 이름을 주지 않는 게 익숙했다. 그러나 당연한 건 아니다. 잠시 얼굴을 비치고 사라지는 당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당신도 이름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불리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관객과 배우가 배역처럼 일렁이는 극장에서는 더더욱. 특정 서사에 고정되지 않은 이름은 물결이나 온기처럼 자각하는 것이지 기억의 대상이 아니다. 단차가 없는 객석 구조나 배우가 이름을 먼저 말하는 방식이나 두 기둥 사이 한글 자막은 극장에 좀처럼 오지 않는 당신을 위한 준비(barrier-free)이기도 하다.

<이런 밤, 들 가운데서>의 공연 사진. 언덕처럼 솟은 무대 중앙에 회갈색 점프수트를 입은 배우가 무릎을 굽혀 몸을 살짝 낮추고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공연 시작을 알리는 정도로 흘려들었던 주의사항을 자막으로 보여주고, 배우들이 또박또박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낭독하는 순간, 안일한 방심과 대처가 참사로 이어졌던 세월호 침몰 사고와 이태원 참사가 상기된다. 새삼 당신에게 편한 구조(barrier-free)는 나에게도 편한 게 당연하다. 배우 다섯이 돌아가면서 키 높이, 얼굴 생김새, 머리 모양, 옷차림새 등 인상착의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사고가 났을 때 그를 기억하는 목격자가 나일 수 있다. 연대는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는 시그널은 연극의 도입부에서 드러난다. 연극은 사회에 트라우마로 남은 참사를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4월 16일, 전국에 비가 내릴 것이고, 10월 29일, 가을 하늘은 대체로 맑고 일교차가 클 것이라며 일기 예보를 시보처럼 짧게 전달한다. 내년 그날도 예보처럼 날이 흐리거나 일교차가 클 것이다. 이제 나는 작은 우산이나, 가벼운 겉옷을 챙길 텐데 9년 전 봄에도 작년 가을에도 당신은 그랬을 것이다. 나는 바닥을 보고 걷는 대신 멈추어 서서 당신을 바라본다. 타인일 수밖에 없는 당신의 고통을 단정 짓거나 판단하는 대신, 참사를 섣불리 소환해서 소모하는 대신 차곡차곡 모은 설유진의 일상 안에서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나를 발견한다.

<이런 밤, 들 가운데서>의 공연 사진. 다섯 명의 배우들이 둥글게 모여 각자 오른손을 쫙 편 채 하늘로 치켜들었다. 팔꿈치는 살짝 접고, 손바닥은 치켜든 얼굴과 마주하는 자세다.

[사진 ⓒ박태준]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 설유진 신작 <이런 밤, 들 가운데서>
  • 일자 2023.11.21 ~ 12.9
  •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 작·연출 설유진 프로듀서 송미선 조연출 조다은 출연 곽지숙, 옥자연, 윤현길, 최정현, 하영미 안무 하영미 음향디자인 목소 음향오퍼레이터 류혜영 음향크루 정명군, 탁승빈 무대디자인 신승렬 무대제작 에픽(APIC 대표: 전종혁) 무대팀 최세현, 이현정, 채근주, 이주은, 편운장, 전진우 조명디자인 신동선 조명어시스턴트 정우원 조명오퍼레이터 이진우 조명크루 정주연, 김휘수, 정하영, 김슬기, 김민지, 이현직, 김민기, 이지은 의상디자인 우영주 분장디자인 장경숙 분장크루 김다현 영상기술감독 강경호 영상크루 김현영 무대감독 박진아 접근성매니저 박세련 접근성모니터링 해랑, 이성수 자막제작 조다은 자막오퍼레이터 오의택 티켓매니저 양기쁨 그래픽디자인 유나킴씨 프로필 사진 정희승 영상촬영 및 공연/연습 사진 박태준 접근성 영상 및 음성파일 제작 목소 목소리 하영미, 옥자연 공동제작 두산아트센터, 907(구공칠)
  • 관련정보 https://www.doosanartcenter.com/ko/performance/1550?q.displayStatus=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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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자

이의자
연극 <산재일기>(23.04)에서 무대와 객석 사이에 있는 이 의자는 산재 앞에 누구도 제3자일 수 없다는 경고인 동시에 관객의 시선이 관습에 머물지 말라는 의도라고 봤다. 연극이 동사라면 ‘이 의자’는 무대에서 말하는 순간 ‘잇자’가 될 수도 있다. gubos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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