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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들어야 맺어지는, 타들어야 살아지는

창작공동체 아르케 <화전>

조혜인

제250호

2024.02.29

황량한 무대 위, 불타는 소리가 장렬하게 들린다. 산이 타고 있다. 산을 불에 태워 생계를 이어가던 강원도의 화전민(火田民)들이 멍하니 산불을 바라본다. 잠시 함께했던 사람들이 떠났어도, 사랑이 실패했어도, 자식이 죽었어도 타오르는 산불과 같은 아픔을 간직한 채 생을 이어가야 한다. 그렇게 잿더미가 되어버린 자리에 씨앗을 다시 뿌려야 하니까. 그것이 화전민의 삶이니까. 연극 <화전>은 서로 다른 인간 군상 간의 대립이 낳은 비극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연민과 공존이 깃들어 있다. 무대 바닥은 황토색의 천으로 덮여 있고, 천장에는 네 개의 잿빛 천이 무대의 깊이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무대에는 아무것도 없다. 산을 태워야만 살아갈 수 있는 화전민들에게 맑은 날씨는 마치 허락되지 않는 듯 하늘이 누리끼리하다. 대가 지불된 무대. 화전민이 낯선 유신 공동체를 받아들인 대가도 치러야만 했다.

<화전>의 공연 사진. 대도구가 없이 빈 무대 위에 아홉 명의 인물들이 정면을 향하고 하늘을 바라본 채 모여 서 있다. 모두 맨발이며, 의상은 저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채도가 낮은 회색, 초록색, 갈색 계열이다. 무리의 가장 앞에 선 촌장은 회색 체크무늬 셔츠 위에 갈색 털조끼를 걸쳤고, 그의 왼편 초록색 셔츠를 입은 남성은 커다란 갈퀴를 어깨에 메고 있다. 촌장의 오른편에는 자신의 팔 길이만큼 되는 나뭇가지를 쥔 이가 쪼그리고 앉아있다.

촌장의 포용에 따라 유신 공동체는 산속에서 은둔생활을 한다. 촌장과 진오륜(유신의 리더)의 첫 만남부터 연극적 강렬함이 라이브 악사의 연주와 함께 피어오르는데, 본 공연에서는 인물들 간에 대화가 이뤄질 때면 대부분 정면(객석)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장면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무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소통 방식을 통해, <화전>이 지닌 연극적 강렬함은 인물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몸을 열고 눈을 바라본 채로 대화할 때 나타난다. 특히 두 공동체는 확연히 다른 환경과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화전민들은 강원도 정선의 한 산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하며 지내면서 성격이 다소 억척스럽고 생활력이 강하다. 반면, 유신들은 점잖고 배운 것이 많으며 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절개를 지키기 위해 산속까지 도망 온 자들이다.
이런 극의 배경을 바탕으로, 연극적 강렬함이 솟아나는 때는 크게 세 지점이다. 첫째는 공동체의 리더들끼리 대화하는 순간이고, 둘째는 이랑(화전민)과 전연(유신)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 셋째는 돌치(화전민)와 전연이 목숨을 건 대립을 할 때이다. 본 공연에서 ‘눈을 바라보고 하는 대화’란, 수많은 등장인물 중 인물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이루어졌을 때 나타나는 것 같다. 서로를 마주 보는 순간의 강렬함에는 첫 불씨만큼의 스파크가 존재한다. 서로의 마음이 일치하는 순간이든, 서로를 숙적으로 인식하는 순간이든 시선이, 그리고 몸이 열린다. 다른 환경, 학식과 신분의 차이를 가진 두 공동체가 소통한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닐 테다. 더군다나 같은 공동체 내부에서도 소통의 어려움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 사이에 어떠한 접점이 분명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 사이에 대화가 되고 있고, 마음이 연결되고 있다. A지점에서 산을 태우고, B지점에서 산을 태웠을 때 C지점에서 불길이 만나는 것처럼. 각자의 마음속에 타오른 불이 만나 서로를 맺는다.
<화전>에서는 나와는 다르다고 믿고 다르다고 자부했지만, 결국 다르지 않은 인간의 본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돌비가 산짐승(고라니)을 잡아 와 유신 공동체에게 낫자루를 건네며 짐승의 목을 따라고 조롱한다. 비장한 느낌의 라이브 국악이 고조로 치달으며, 전연은 두려움에 몸서리친 채 고라니의 목을 벤다. 이제 야만성은 화전민의 것만이 아니다. 평생 몸으로 노동해 본 적 없는, 붓을 쥐고 글을 읽었던 유신도 생존 앞에서는 선택지가 없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젖어 들고 순응하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이 장면은 본 공연에서 일품 가는 장면이다. 공존을 말하고 있는 본 공연에서, 함께하는 과정 동안 인간에게 어떠한 변화가 나타나는지를 날것으로 보여주었다. 전연이 산짐승의 목을 따고, 무대는 붉은 조명으로 물들여지며 피비린내가 금방이라도 극장에 진동할 것 같았다. 촌장이 말한다. “마카1) 산 사람들이 다 됐어요”.

<화전>의 공연 사진. 어두운 무대에 푸른색의 조명이 한 무리의 인물들을 비춘다. 이들은 모두 목도리, 담요 등을 두르고 바닥에 앉거나 누워 추위를 견뎌내고 있다.

연극을 객석에서 직접 보기 전까지만 해도, 시놉시스를 읽으며 탄탄한 역사적 고증을 기대한 채 극장에 갔다. 사실주의의 짙은 향기가 배어난 미장센을 상상했다. 그러나, 오히려 본 공연에서 무대나 의상을 애써 고증하지 않음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예를 들어, 유신 캐릭터에게 양복을 입혀 등장하게 한다. 이런 연출 방식으로 공동체 간의 갈등이란 지금 시대에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현대적인 감각을 부여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매력 포인트는 극작법이 전통적인 극작술을 따른다는 점이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히 나타나는 치밀한 플롯이 극을 끌고 갈 수 있는 뼈대로서 역할을 한다. 사건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 명쾌하며, 인물들이 선택한 결과에 따라 그 뒤가 철저히 나타나는 연극이다. 이랑을 사랑하며 배신감을 느낀 돌치는 유신들의 비밀을 폭로하게 되고, 결국 자기의 책략으로 인해 죽음까지 이르게 된다. 삶과 죽음을 다루는 본 공연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화전민 마을의 ‘고랑’은 순수하고 어리숙한 역할을 맡아 극의 분위기를 환기해주곤 하는데,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광대를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20여 명이 넘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만큼, 캐릭터 한 명 한 명마다 성격도 다르고 비즈니스2)도 다르다. 그래서 사건 가운데서 반응의 다양함을 보는 재미가 있다.
<화전>은 화전민들의 삶을 그려내면서도, 낯선 공동체와 진정한 연합이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을 관객에게 던진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과연 되었는가를 묻는다. 어느 날 갑자기 서울 도심 한복판에 화전민 무리가 농사 도구를 가지고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들의 눈을 진정으로 바라보고 소통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에게 오히려 낫을 버리고 양복을 입어보라고 조롱하지 않을까? 우리의 몸이 그들을 향해 활짝 열릴까? 산불이 무섭게 타오르고, 살아남은 화전민들은 그 불을 하염없이 지켜만 본다. 다시 그 잿더미에 씨를 뿌리고 살아가야 하는 화전민은 비극 앞에서 요동하지 않는다. 불에 타들어야 살아지기 때문에,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화전민들은 불타는 고통 앞에서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삶을 인식한다.

<화전>의 공연 사진. 촌장과 진오륜이 술병과 술잔 하나씩을 사이에 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들은 모두 활짝 웃고 있다. 그들의 뒤편에는 여러 인물들이 바닥에 앉아 각자 먹고 마시며 들떠 있다.

[사진 제공: 창작공동체 아르케]

창작공동체 아르케 <화전>
  • 일자 2024.2.17 ~ 2.25
  •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 작·연출 김승철 출연 신현종, 조은경, 이경성, 이해성, 김구택, 이형주, 김성일, 신욱, 홍상용, 이홍재, 민정오, 한동훈, 송현섭, 박정인, 김보라, 김태양, 박현민, 이해온, 윤슬기, 경미, 김강민, 성종원, 정영재, 양재범 연주 공양제, 이연우, 정다정, 박재이, 이색, 정가흘, 허유진 음악 공양제 조명 김성구 무대 박상봉 움직임 양은숙 제작지원 박재이 기획 한가을 홍보디자인·그림 지나다 사진 조상백 무대감독 신희존 조연출 김영경 조연출보 김성미, 이정아 조명오퍼 이승민 주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관 창작공동체 아르케
  • 관련정보 https://theater.arko.or.kr/product/performance/258035
  1. ‘모두’의 방언.
  2. 비즈니스란 인물의 작은 동작들이나 어떤 목적을 갖고 하는 행동 등을 포함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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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인

조혜인
퍼포먼스와디자인사이언스연구소 연구원.
연극 저금은 두둑한 통장을 갖는 거만큼 즐겁다. 연극 저금이란 내가 본 연극을 차곡차곡 글로 표현하는 거다. 연극 저금을 남녀노소 누구나 재밌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일단 내가 먼저 열심히 해보고 연극 부자가 되는 비법을 알려주고 싶다.
https://brunch.co.kr/@naegenkrit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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