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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어떤 말하기 기다리기

신촌극장 <장기*기억 X 강보름>

성수연(요다)

제251호

2024.03.28

매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극장에서 마주했을 때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민한다. 극장에서 관객이 꼭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 오히려 무엇이 되지 않고 어둠 속에 침묵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곳이 극장이지만 - 자신의 이야기를 그렇게 털어놓은 사람 앞에서 그저 한 명의 관객으로 뒤돌아 극장을 떠나는 기분은 이상하다.

추측하건대 극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이도 그럴 것이다

퍼포머가 자기 자신으로 무대에 서는 공연들을 많이 본다. 하지만 그중에 자신의 고통과 관련된 내밀한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하는 경우는 많이 없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면, 연극은 내밀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기에는 좋은 예술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극이 보편적 인간에 대한 보편적 이야기를 추구하는 - 그리고 오랫동안 비인간들은 모두 배제해 온 - 드라마1)에서 시작된 역사만 봐도 그렇다. 여러 머리들이 모여서 만들고 보는 연극은 알게 모르게 사회적 필요- 연극에서 보편적 인간의 이야기, 카타르시스, 철학적 또는 사회 계몽적인 메시지, 스펙터클, 숭고, 아름다움을 원하는 모든 요구들 -에 강하게 붙들려 있다. 그것들이 연극의 속성이라면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시나 소설 같은 문학을 택하는 것이 낫다.

<장기*기억>의 공연 사진. 검은 긴소매 옷을 입은 강보름이 한 손으로는 천장에 매달린 방광 모양 비닐을, 다른 손으로는 흰 비닐 뭉치를 마주 들고 있다. 천장에 매달린 방광 모양 비닐은 주황색 비닐에 바람을 불어넣어 둥그렇게 만든 모양으로, 두 개의 플라스틱 눈이 붙어 있고, 검은색, 초록색, 파란색 비닐을 꼬아 만든 줄에 매달려 있다. 그의 뒤편으로 관객들이 바닥에 앉아 있다.

추측하건대 <장기*기억>에서 혼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강보름도 이런 고민을 했을 것 같다. 자신의 이야기를 역사화2)하지 않고, 희곡화3)하지 않고, 어떤 시대나 사회의 전달자가 되도록4) 하지 않고, 더 특정하게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관객에게 드러낼 수 있을까. 그 과정은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를 공연화하려는 욕망과 쉽게 공연화될 수 없는 개인사 사이의 갈등일 수도 있다. 공연화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공연할 가치가 있는 어떤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특히 연기, 무대 디자인, 관객 참여와 같은 연극적인 문법을 활용하여 그 어떤 방식으로든 관객들이 그것을 연극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의 전략을 세운다는 것이다.
따라서 추측하건대 보름5)이 자신의 고통을 공연화하기 위해 선택한 전략은 자신을 대신해 자신의 장기가 말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 장기야말로 신체적 고통을 느끼는 주체이다. 공연에는 비닐봉지를 이용해 만들어진 장기들이 여럿 등장한다. 흰색과 검은색 비닐로 만든 뇌, 빨간색 비닐을 꼬아서 만든 용종, 노란색 비닐을 불어 만든 방광. 관객도 주황, 흰색, 검은색, 파란색 비닐봉지가 조각보처럼 깔린 극장 바닥에 앉아 보름과 함께 장기를 만든다. 고통받는 자신의 장기를 만들고 문방구에서 파는 플라스틱 눈알을 붙인다. 내 몸 밖으로 나온 장기는 나와 또 다른 생명력을 가진 주체 같다. 개별적 존재가 된 장기는 내 고통을 겪고 말해줄 걱정인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추측하건대 보름의 이야기는 고통 받았던 장기의 기억 중심으로 진행된다. 보름은 옛 교실의 과학 시간처럼 OHP 필름으로 벽면에 오장육부와 뇌의 그림을 띄워놓고 각 장기들의 기능을 설명한다. 보름의 뇌는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편도체가 제 기능을 못해서인지 기억을 잘 못한다. 불안과 긴장의 상태에는 위가 역류해 토를 한다. 보름의 과민한 대장은 시도 때도 없이 그가 화장실에 가게 한다. 이는 연출을 시작한 뒤부터 생긴 고통으로 보름은 극장 내부의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해 보인다.
하지만 추측하건대 자기 고통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열망은 차곡차곡 쌓아가는 공연의 문법을 뚫고 나온다. 보름의 과거 기억들이 비죽비죽 튀어나온다. 뇌의 편두통, 대장의 불편함, 용종을 떼어내는 고통에 대한 장면들 사이에 극장의 어둠 속에서 녹음파일들이 고개를 내밀고 끼어든다. 비 오는 차 안에서 보름과 보름의 엄마가 싸우는 대화 소리가 들린다. 눈앞의 보름은 비닐봉지로 만든 뇌를 쿡쿡 찌른다. 보름은 직접 말로 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녹음파일로 대체한다. 아직 관객들 앞에서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처럼. 관객들은 다가오는 어떤 말하기를 기다린다.

<장기*기억>의 공연 사진. 색색의 비닐이 깔린 바닥 위에 강보름이 상체를 모두 가리는 커다란 검은 봉지를 뒤집어쓰고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비닐에는 두 개의 플라스틱 눈이 붙어 있다.

추측하건대 그 이야기를 마주한 관객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민할 것이다

그 말하기의 순간에는 모두가 보름을 보고 있다. 보름은 자신을 보고 있는 관객을 볼 수 없다. 보름은 스스로 커다랗고 검은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채 무릎을 꿇고 관객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검은 비닐봉지에 붙어있는 플라스틱 눈이 관객을 바라본다.
사실 말해야 할 이야기는 이것이다. 보름의 엄마는 2017년 한국에서 가장 컸던 다단계 사기에 휩쓸린다. 그리고 사이비 종교에 빠진다. 보름은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자신의 삶에서 많은 결정이 사실 엄마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기숙사 학교에 간 것도 엄마와 함께 있기 싫어서, 엄마 때문에 겪어야 했던 가족 간의 불화. 말하기 뒤에는 긴 울음이 온다. 비닐얼굴이 구겨진다. 앞서 장기와 고통에 대해 만들어간 장면들은 어쩌면 여기서 다 무너지는지도 모른다. 차마 공연화되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옆에서 누군가 울고 있었다. 보름은 안에서 밖이 보일까? 검은 비닐봉지를 안아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공연화의 꺼풀을 넘어서, 공연이 되기 위한 전략들을 넘어서 이러한 말하기의 순간을 마주했을 때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추측하건대 다른 관객들도 그 순간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어떤 이는 더 이상 관객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없다고 느낄 것이다. 어떤 이는 그럼에도 관객으로 남아 있기 위해 보름의 행동을 공연으로 기호화하고 분석하기 위해 노력할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공연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에 대해 의심할 것이다. 이 이야기, 이 순간은 연극인가? 연극이 될 수 있는 걸까?
울음을 끝낸 보름이 검정비닐에 구멍을 낸다. 구멍은 점점 커져서 찢어진다. 눈물 자국이 나 있는 보름의 얼굴이 보인다. 고민하는 관객들의 침묵 속에 보름은 다시 공연을 진행한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공연이 계속된다. ​보름은 먼지떨이를 가져와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장기를 털어준다. 장기끼리 인사를 하자고 한다. 장기들을 극장 문을 열면 있는 작은 베란다에 붙이자고 한다. 함께 있는 장기들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공연이 끝났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그렇게 극장 문을 빠져나가고 몇 주가 지나고 나서도 나는 계속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공연화보다 중요했던 그 순간에 대해 그리고 다시 그 순간을 마주했을 때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할지에 대해.

<장기*기억>의 공연 사진. 신촌극장의 테라스 검은 난간에 관객들이 만든 다양한 장기 모양의 비닐들이 걸려있다. 검은색, 주황색, 파란색, 흰색 등 다양한 색으로 만들어진 비닐 장기에는 저마다 두 개씩 플라스틱 눈이 달려있다. 난간 뒤편으로 신촌극장에서 바라보는 신촌의 전경과 옅은 푸른빛 하늘이 드러난다.

[사진 제공: 프로젝트 레디메이드]

신촌극장 <장기*기억 X 강보름>
  • 일자 2024.3.1 ~ 3.9
  • 장소 신촌극장
  1.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보편적이기 때문에 역사보다 철학적’이라고 한다.
  2. 그린피그 <2024 역사시비 프로젝트-불멸의 이기석> (예술공간혜화, 2024.2.2 ~ 2.9)
  3. 이지형 <사회적 청소년기를 바탕으로 한 창작과정이 인형작업자의 창작과정에 미치는 영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타자’를 중심으로> (두산아트센터, 2024.3.14 ~ 3.16)
  4. 코끼리들이 웃는다 <잠자리 연대기> (아르코예술극장, 2022.10.8 ~ 10.9)
  5. 공연 시작 전에 보름과 관객은 평어를 쓰기로 약속했으므로 보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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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요다)

성수연(요다)
연극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수다스러운 관객을 지향합니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걱정이며 항상 기억나지 않는 장면을 함께 보충할 동료를 찾고 있습니다. 가끔 요다라고도 불리며 공연을 보고 집가는 길 지하철에서 와랄라 하는 계정(@walalainthesubway)이 있습니다. claire08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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