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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함에 대한 미련

[독자반론]고재열의 '반상차별론'에 대한 변명

백승무_연극평론가

웹진 5호

2012.08.02

고재열 편집위원은 비평과 언론이 서자, 상놈 취급당하는 '대중극'에 대한 무시와 차별의 편견을 걷어내고 취할 건 취하고 배울 건 배우라는 '통섭론'을 주장했다. 부당한 차별이 있으면 철폐돼야하고, 유익한 차이가 있으면 보고 배울 일이다.

본 글은 지난 7월 5일 발행된 고재열의 리플레이 ‘왕후장상의 연극이 따로 있지 않다면’ 칼럼에 대한 반론으로 백승무 연극평론가가 보내온 글입니다.

  • 고재열 편집위원은 비평과 언론이 서자, 상놈 취급당하는 '대중극'에 대한 무시와 차별의 편견을 걷어내고 취할 건 취하고 배울 건 배우라는 '통섭론'을 주장했다. 부당한 차별이 있으면 철폐돼야하고, 유익한 차이가 있으면 보고 배울 일이다. 하지만 역할과 기능이 다르고, 자질과 특성이 이질적인 두 경향을 무리하게 저울대에 올려 균형을 잡으려 하고, 균형이 맞지 않으면 통섭의 이름으로 혼종교잡까지 해야 한다는 그 논지는 무리이고 억지이다. 일단 필자는 고 편집위원이 ‘반상론’의 주범으로 지목한 비평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고자 한다.

    우선 비평은 왜 오픈런 공연 리뷰에 인색한가. 한국 연극평단의 특성상 보통 개막 첫 달에 비평이 쏟아지기 때문에 초기에 비평의 눈에 띄지 않으면 리뷰 수혜(?)를 받기가 사실상 힘들어진다. 단기 공연과는 달리 입소문에 의지하는 오픈런의 경우 개막 첫 달에 바로 비평의 눈에 포착되기란 쉽지 않다. 서둘러 공연을 봐야한다는 강박도 덜한지라 첫 달 한판승부에서 밀리기 십상이다. 그래도 공연이 좋으면 리뷰를 쓸 만하지 않겠는가? 맞다. 그런데 누가 쓰나? 없다. 평론가가 없다. 당장 써야할 단기 정극도 많은데 오픈런까지 오지랖을 넓히는 평론가는 극히 드물다. 생계형 전문 평론가가 없기 때문이다. 2순위, 3순위 작품까지 필력을 발휘할 생산력 높은 평론가가 없다. 현재 연극판은 생계형 평론가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생산량과 품질을 양손에 쥘 수 있는 평론가가 없다. 공연 수에 비해서 비평 수는 태부족이다. 적은 자원으로 최대효과를 달성하는 현 체제를 비판하려면 오픈런까지 손을 뻗지 못하는 비평의 게으름과 무능력을 탓할 일이지 오픈런이 무시당한다고 오해할 일은 아니다.

    “왜 오픈런은 항상 2순위, 3순위인가? 당신도 역시 반상주의자다.” 예술의 목적과 기능을 고려할 때 오픈런이 그 대중성과는 무관하게, 그 진지함과 진정성과는 무관하게 예술 서열의 말단에 위치하는 것은 엄연한, 그리고 당연한 사실이다. 반상차별론이 상업극의 경제적 욕망(?)을 정당화하는 탕평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의 우열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욕망의 우열만은 공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비평은 서열관계에 있어서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차별은 안 되나 차이는 인정해야 한다. 오픈런이 그 차이를 지우려면 경제적 욕망 대신 연극학 개론을 펼치고 다시 시작해야한다.

    생계고에 찌들리는 정극 연출가들은 자주 오픈런의 유혹을 받는다. 그래도 안 한다. 예술과 상업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배고픔은 정극 연출가들의 자존심이고 숙명이다. 덕분에 비평이 관심을 가진다. 아니 전제가 잘못 됐다. 자존심 가져도 되는 작품을 올리기에 비평이 관심을 가진다. ‘그 대중성과는 무관하게, 그 진지함과 진정성과는 무관하게’ 비평의 마음을 끄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픈런이 비평의 불공평에 딴지를 거는 것은 정극이 관객들의 외면에 불평을 하는 것과 형식구조상 별반 다르지 않다. 오픈런이 관객을 차지하고 정극이 비평을 점유하는 것은 형식논리상 공평하다. 이 형식논리를 혁파하기 전에 불공평 타령을 먼저 하는 것은 관객 양극화의 고착화나 예술의 질적 하락을 의미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고 편집위원의 의도는 오픈런의 작품성을 인정하라는 주문이 아니라 문화경영학적 접근을 해보라는 충고였을 것이다. 관객을 흡인하는 ‘뭔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차용하는 지혜로움을 가지라는 권고이고 비평과 언론이 그 길을 터주라는 취지이다. 따뜻하고 충정이 느껴지지만 그건 기획자에게 할 말이지 창조자에게 할 말은 아니다. 배고프고 힘드니 오픈런 비법 몇 개를 갖다 쓰라는 건 소에게 동물성 사료를 주는 행위와 같다.

    고 편집위원 말대로 연극판은 힘들다. 그렇기에 살 길을 택하라? 아니다. 그렇기에 손쉬운 대안의 유혹을 물리치고 더 멀고 더 가파른 길을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연극이 그렇게 살아왔고 연극인은 그런 미련한 부류라고 믿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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