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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은 없지만

백승무의 “고재열의 ‘반상차별론’에 대한 변명”에 대한 해명

고재열_시사IN문화팀장/블로그‘독설닷컴’운영

웹진 5호

2012.08.02

연극in 3호에 게재한 칼럼, “왕후장상의 연극이 따로 있지 않다면-가치의 발견에는 경계가 없다”에 대해 백승무 연극평론가는 “미련함에 대한 미련 - 고재열의 ‘반상차별론’에 대한 변명”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왔다. 백승무 평론가가 보내준 글은 반론이라기보다는 필자가 보지 못한 연극계 이면을 지적한 보론의 성격이 강했다.

본 글은 백승무 연극평론가의 '독자반론-미련함에 대한 미련'의 재반론글로 구성되었습니다.

  • 연극in 3호에 게재한 칼럼, “왕후장상의 연극이 따로 있지 않다면-가치의 발견에는 경계가 없다”에 대해 백승무 연극평론가는 “미련함에 대한 미련 - 고재열의 ‘반상차별론’에 대한 변명”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왔다. 백승무 평론가가 보내준 글은 반론이라기보다는 필자가 보지 못한 연극계 이면을 지적한 보론의 성격이 강했다. 연극계에 한 발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방외자 입장에서 쓴 글에 대해 연극계 본류의 입장을 대신 전한 것으로 해석했다.

    ‘대중극’ ‘상업극’ ‘통송극’으로 불리는 ‘오픈런 공연’의 장점을 활용하자는 필자의 주장에 대해 백승무 평론가는 “대중극에 대한 무시와 차별의 편견을 걷어내고 취할 건 취하고 배울 건 배우라는 통섭론을 주장했다. 부당한 차별이 있으면 철폐돼야하고, 유익한 차이가 있으면 보고 배울 일이다. 하지만 역할과 기능이 다르고, 자질과 특성이 이질적인 두 경향을 무리하게 저울대에 올려 균형을 잡으려 하고, 균형이 맞지 않으면 통섭의 이름으로 혼종교잡까지 해야 한다는 그 논지는 무리이고 억지이다.”라고 비판했다.

    평론가들이 오픈런 공연을 외면하는 이유에 대해 백승무 평론가는 “한국 연극평단의 특성상 보통 개막 첫 달에 비평이 쏟아지기 때문에 초기에 비평의 눈에 띄지 않으면 리뷰 수혜(?)를 받기가 사실상 힘들어진다. 단기 공연과는 달리 입소문에 의지하는 오픈런의 경우 개막 첫 달에 바로 비평의 눈에 포착되기란 쉽지 않다. 당장 써야할 단기 정극도 많은데 오픈런까지 오지랖을 넓히는 평론가는 극히 드물다. 생계형 전문 평론가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연극평론 시장의 부재’를 원인으로 지목했는데 여기에는 언론의 책임도 크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논쟁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연극 시장의 위축과 연극평론의 부재는 궤를 같이 한다. 어느 순간 연극은 문화의 변방으로 밀려났다(연극이 변방으로 물러나서 연극 지면이 좁아진 것인지, 연극 보도가 줄어서 연극의 쇠락을 부채질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상파 방송에서도 역시 연극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연극을 잘 만든다고 해서, 연기를 잘 한다고 해서, 연극의 메시지가 강력하다고 해서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기는 극히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대학로에서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아무리 연출을 잘해도, 아무리 극본을 잘 써도 대중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간에 매개체가 되어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연극계는 움츠려 있다. 뮤지컬 시장이 지방 공연장까지 두루 대작 뮤지컬을 공연할 만큼 성장한 것과 대비된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 연극계는 최소한의 시장을 지켜내고 있다. 물론 ‘시장 내 시장’이라 할 수 있는 연극영화과 학생들도 많다. 요즘 대학로에 가보면 딱 봐도 연극영화과 학생들로 보이는 관객이 많다. 그러나 다른 예술 장르가 동원으로 학생들을 공연장에 이끄는 것에 비해 자발적으로 이끄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시장 내 시장’에 머물지 않고 유의미한 관객층을 확보하고 있는 대학로 연극에 경의를 표한다.

    백승무 평론가는 비평의 역할에 대해 ‘연극수준을 높이고 그 역량을 강화, 관극문화를 고양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비평의 영역에는 ‘발견’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임권택이 어떤 영화감독이었나? 출발부터 그가 예술영화 감독으로 인정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도 기계적으로 상업영화를 찍어내는 감독 중 한 명일뿐이었다. 그러나 그를 끝없이 발견해주는 노력에 그는 진정성으로 화답하고 거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대학로 대중극 중에 발견해줄 만한 작품이 연출이 배우가 한 명도 없었을까?

    그리고 “생계고에 찌들리는 정극 연출가들은 자주 오픈런의 유혹을 받는다. 그래도 안 한다. 예술과 상업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배고픔은 정극 연출가들의 자존심이고 숙명이다. 덕분에 비평이 관심을 가진다. 아니 전제가 잘못 됐다. 자존심 가져도 되는 작품을 올리기에 비평이 관심을 가진다.”라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한국적 연극 현실에서 비평의 역할에 하나가 더해지는 것 같다. 바로 ‘위무’다. 연극적 순수성을 지켜온 연극인들에게 ‘비평’이라는 위무가 가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관객몰이에 혈안이 된 연극에까지 이런 위무를 해줄 필요는 없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지만 임권택을 임권택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스스로 임권택이 되지 못할 때, 임권택이 될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발견해 줄 수는 없을까?

    백승무 평론가는 정극과 대중극의 선긋기를 명확히 한다. 그는 정극 연출가를 관객에게 아부를 하는 게 아니라 싸움을 거는 기질을 가지고 있고 비평 눈치도 보고 자신의 경제적 욕망이 들통날까봐 자기검열도 하는 사람들로 규정한다. 그래서 오픈런 공연을 참고하자는 주장에 “따뜻하고 충정이 느껴지지만 그건 기획자에게 할 말이지 창조자에게 할 말은 아니다. 배고프고 힘드니 오픈런 비법 몇 개를 갖다 쓰라는 건 소에게 동물성 사료를 주는 행위와 같다”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런 선긋기가 역으로 정극 연출가들의 창작성을 가둘 수도 있다고 본다. 그것이 국가권력이든 상업주의든 자기검열은 감옥이다. ‘평론가들이 어떻게 볼까?’ ‘이런 방법은 정극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편법이 아닐까?’ ‘정극 연출가는 이런 것은 안 돼’라고 인식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 또 상상력의 감옥이 되지는 않을까?

    어찌되었건 백승무 평론가의 말대로 만병통치약도 없고 즉효약도 없다. 그래서 그의 글이 반론이 아니듯, 이 글도 재반론이 아니다. 답은 극본에, 연출에, 연기에 있을 것이다. 연극계 방외자로서 미력이나마 보태기 위해서 본 연극은 트위터에, 페이스북에, 블로그에 열심히 소개하고 있다. 쓴 만큼, 만든 만큼, 해낸 만큼, 연극인들이 인정받는 그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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