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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 밖에서 진화하다

직업을 창조하는 두 88만원 세대 이야기

고재열_시사IN문화팀장/블로그‘독설닷컴’운영

웹진 12호

2012.11.15

  • 일전에 어떤 한의사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비옥한 로키산맥에 가서 인삼을 기르면 무만큼 커진다고. 그런데 약효도 무만큼 밖에 안 된다고. 약효는 성장이 아니라 성숙에서 나온다고. 봄바람과 여름폭풍, 가을햇볕 그리고 겨울추위를 두루 맞으며 안으로 응축해야 약효가 생긴다고. 88만원 세대는 그런 세대가 아닌가싶다. 지금은 가장 고통 받는 세대지만 안으로 응축한 이들이 언젠가 우리 사회의 주역이 될 것이다.

    스펙 강박에 시달리는 이 세대에서 새로운 희망의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미 세상이 짜 놓은 체스판 위에서 살지 않고 자신만의 팝업창을 여는 88만원 세대가 나타나고 있다. 컴퓨터 화면에 팝업창을 새로 열듯이 새로운 플랫폼을 까는 것이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기성세대가 깔아놓은 플랫폼에서 한계를 느낀 그들이 새롭게 플랫폼을 깔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고 있다.
  • 문화기획자 김국희씨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직업이 심하게 많다. 도시골프로젝트 연구소 연구원이자 문화도시공동체 쿠키의 활동가이면서, 영등포 달시장(예술시장) 라디오 DJ이자 정릉 생명평화마을 활동가, 제주 월평 제주재주랩(빈집)의 집사이자 동대문 ‘봄장’의 기획자에다 장인의 맛있는 음식을 이야기와 함께 배달하는 운짱의 딜리버리(woonjjang's delivery)의 전남, 제주 지점장이다.

    그녀의 일을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그녀가 꿈꾸는 것은 도시의 모더니티와 시골의 훈훈함이 공존하는 ‘도시골’이다. 어느덧 우리의 관념 속에서 사라진 마을을 복원하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이 ‘도시골’을 만들기 위해 쿠키 멤버들과 함께 제주 서귀포 예술시장과 서울 영등포 달시장에서 라디오 DJ를 본다. 방송 내용은 서귀포 예술시장과 달시장에 나와서 자신이 만든 수제품을 파는 예술가들에 관한 것이다.

    서울 정릉 생명평화마을과 제주 월평마을에서는 새로운 손님을 맞으며 임대업을 한다. 그런데 임대료가 없다. 마을을 더 재밌게 더 아름답게 더 살 만하게 만들 예술가나 활동가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빈집을 개조해 정릉에 시냇물랩·타일랩·수리중랩을, 제주에서는 제주재주랩과 큰나무랩을 무료 레지던시 형태로 운영한다. 서울과 제주를 왔다 갔다 하면서는 장인의 음식도 배달한다. 이런 바쁜 와중에 올가을 서울 동대문에서 열리는 ‘봄장’의 기획자로도 참여하고 있다.

    이번 달에 제주에 내려갔을 때 그녀가 운영하는 '제주재주랩'에 묵었다. 집은 허름했지만 앞서 머물던 사람들이 이런저런 흔적을 남겨놓은 집이어서 재밌었다. 무엇보다 동네 명소를 개발해 두어서 제주도 시골마을의 운치를 만끽할 수 있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가 새롭게 보이던 마을 산책로, 그리고 자연이 만들어준 라운지인 월평포구에서 마신 막걸리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무대에 서는 사람, 무대를 바라보는 사람, 그리고 무대를 만드는 사람. ‘모티브하우스’ 서동효 대표는 세 번째를 택했다. 무대에 서는 사람이 못 되어 무대를 바라보기만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무대를 만드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서 대표는 친구들이 대학에 갈 때 스스로 대학을 만들었다. ‘독서대학’이라는 이름을 지은 이 대학은 책을 읽는 대학이었다. 그는 10권의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친구들이 비웃었다. 계속 했다. 100권의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올렸을 때는 TV 뉴스와 신문 기사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친구들도 놀랐다. 그리고 읽은 책 좀 빌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만든 독서대학을 2년 만에 졸업했다.

    스스로 만든, 혹은 설정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직업을 구하지 않고 직업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직업을 ‘라이프 디자이너(Life Designer)’라고 이름 지었다. 당신의 꿈을 응원한다는 의미였다. 신이 나서 어머니에게 “저 취직했습니다. 제가 대표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머니의 반응은 “지랄하네”, 친구들의 반응은 “밥은 먹고 다니냐”였다.

    그래서 꿈을 만드는 회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꿈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초등학생 꿈 1위는 교사였다. 중학생 꿈 1위도, 고등학생 꿈 1위도 교사였다. 사람들은 꿈을 잊고 있었다. 그는 꿈을 팔기로 결심했다. 9월9일을 ‘꿈의 날’로 제정하자는 운동도 벌였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꿈이 팔렸다. 여기저기서 꿈을 찾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지금 그가 만든 ‘모티브하우스’는 가장 잘 나가는 사회적기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사람들은 ‘안정적인 미래’를 꿈꾼다.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안정적인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위해서 안정적인 대학을 다녀야 한다. 그렇게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면 다시 안정적인 노후를 준비해야 하고 자녀들의 안정적인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나의 오늘이 곧 나의 미래다’라는 생각으로 오늘에 충실할 수 없다면 안정이라는 파랑새는 결코 잡을 수 없다.

    모두가 이들처럼 직업을 만들면서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준 도전은 신선하고 또한 이들이 이룬 성취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모두가 세상이 내준 문제를 풀고 있을 때 이들은 자신들이 문제를 제시했다. 1인자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만의 링을 만들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결하도록 룰을 정하는 것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이들의 모습에서 88만원세대의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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