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주문을 외워보자

[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박해성_연출가

제126호

2017.10.26

폭격으로 뼈만 남은 채 파괴된 폴란드 바르샤바의 스산한 시가지 사이로 극한에 내몰린 어느 떨리는 손끝에서부터 쇼팽의 피아노곡이 울려펴진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인간과 예술의 자존감으로 부조화를 조화롭게 만드는 순간을 목격한다. <시학>을 몰아내고 창작자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한지 오래인 로버트 맥기의 <스토리>를 보면, 시학이 오이디푸스를 기준삼듯 영화 <차이나타운>을 기준삼아 섬세한 장면의 세공에 대해 이야기한다. <피아니스트>와 <차이나타운>을 만든, 그야말로 거장 칭호가 착 달라붙는 로만폴란스키 감독은 40년전 저지른 성폭행 처벌을 피해 지금까지도 미국입국을 안하는데, 최근에 또다른 성폭행건으로 유럽에서도 조사에 들어갔다는 새로운 뉴스로 돌아오셨다. 알려진 것만 네 번째라나.

영화 <피아니스트(2002)> 중 한 장면

작품다운 작품 하나 만드는 것도 요원한 일인데, 평생을 그 일을 해오고 대체 불가능한 한 명의 예술가(게다가 거to the장)로 완성되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힘든 일일 것이다. 이는 그 한명의 노력과 재능 뿐 아니라, 그에게 영향이나 영감을 주는 환경, 사건, 역사, 운발 등 그야말로 온 세계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공들여 탄생한 우주대거장이 파렴치한 성폭행범이다. 게다가 그 파렴치함을 정교한 예술적 논리로 설득해낼 수 있을 정도로 확신범이다. 이걸 어쩌나. 예술이 무슨 벼슬이라고 훌륭한 예술가한테는 까방권을 줘야 하나, 아니면 우리의 이 분노와 약오름을 담아 더 단호하게 단도리질을 쳐서 그 거장의 인간으로서 창작자로서의 숨통을 끊어버려야 하나. 어차피 예술이란 게 작품이란 게 그거 하나 없다고 사람 죽는 것도 아니고 거장 하나 사라진다고 세상 무너지는 것도 아니니.

예술가고 나발이고 범죄를 저질렀으면 범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면 그만이라고 깨끗하게 선그을 수 있다. 그야 법치국가에선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위와 같은 명명백백한 경우가 아니라, 범죄사실이 애매한 경우이다. 헤르베르트 폰 카랴안은 전후세대 음악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우주대스타였다. 하지만 그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낸 지휘자로 유명한만큼, 나치에 입당하고 부역했던 이력도 유명하다. 그 누구보다 음반시장의 가능성을 일찍 알아본 비즈니스 감각, 유태인 음악가들이 사라진 빈 자리를 채우며 승승장구한 처세 등 많은 얄미운 개인사가 밝혀졌지만, 그 이유로 카랴안과 베를린필의 음반이 교향악의 '표준'임을 부정할 순 없다. 얄밉지만 어쩔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사에서는 '친일'혹은 '부역'꼬리표가 붙은 예술가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의 작품과 독립운동을 하다 형장에서 요절한 예술가의 작품을 "예술적으로"비교해서 판단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나 기준이 있을까. 악덕건물주로 유명해진 어느 래퍼의 음반을 불매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곡마저도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돼보기는 커녕 구경도 못해본 우주거장 얘기에서 지구로 내려와 보자면, 지구의 창작자들이 으레 한번쯤은 해보는 생각은 '좋은 작품을 만들 것인가, 좋은 사람이 될 것인가' 정도의 소박한 물음일 것이다. 마치 그게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만 같다는 점이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어쨌건 생각은 자유니까. 게다가 창작자들 사이에서 숨 쉬듯 흔한 게 시기와 질투이다보니, 좋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좋은 면보다는 안 좋은 면이 눈에 잘 띄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으레 나오는 대사가 ‘저렇게까지 해서 작품 만드느니...’ 정도다. 여기에는 마치 때로는 못된 짓도 해야, 즉 목적지향적이 되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 혹은 성공하고 유명해진다는 출처 모호한 전제도 슬쩍 끼어든다. 술자리 정신승리처럼 풀긴 했지만, 사실 여기에는 창작자들을 떠나지 않는 고통스런 족쇄가 숨어있다. 바로 창작자로서의 윤리이다.

헤르베르트 폰 카랴안(1908~1989, 출처: karajanmusic.com)

누구나 다 그렇듯 법 어기지 않는 것만이 창작자의 윤리일까. 받은 적도 없는 창작이란 까방권으로 동료들 등파먹지 않는 것만이 창작자의 윤리일까. 양보하고 배려하고 경쟁하지 않는 것이 윤리적일까. 선의에서 비롯된 창작은 모두 윤리적인 것일까. 소심한 창작자들은 오늘도 자기만의 윤리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절치부심하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창작자를 어지럽히는 것은, 그 윤리라는 것이 정해져있지 않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대상에 따라 상대적이고 변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윤리적인 행위 자체가 윤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전자의 윤리는 행동의 주체가 된 내 머리속 윤리이고, 후자의 윤리는 결과적으로 규정된 윤리이기 때문이다. 창작이라는 행동은 늘 불특정다수, 때로는 먼 훗날의 관객까지 범위가 넓어지므로 여기서 결과적으로 규정되는 윤리성을 빠짐없이 예측하는 건 불가능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폭력성을 고발하기 위해서 이름 없는 여성배역을 폭력에 노출시키는 장면으로 점철된 작품을 만든 경우, 이를 선의에 기반해 용인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결과적으로 의도를 관철하지 못한 창작자의 미숙함을 탓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런 윤리적인 이슈 자체에 둔감함을 비난할 것인가. 하긴, 이런 부끄러움은 늘 소심한자들만의 몫이다. 소재를 다루는데 있어서 과연 대상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인지는 아주 중요한 이슈이다. 소재는 이미 다루어지면서 소재주의의 기반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어떤 사건이나 사고를 다루는 작품을 만든다면, 그 창작은 이미 그 사건이나 사고를 기본적으로 이용하는 행동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창작자들은 이를 우회하고자 은유나 완곡의 방법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때로는 그렇게 산 넘고 물 건너 돌아갈 시간과 여유 없이 그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도 있다. 결국 윤리 문제에 있어선 정답이 있을 리 없고 그렇다고 창작자들이 골방에서 생각만 하면서 손가락 빨 수도 없으니, 결국은 잠정적 비윤리성을 껴안고 그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족쇄일 수밖에.

어쩌면 이런 윤리론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하다. 그럴 때 내 자신에게 되뇌이는 주문이 있다.

너나 잘하세요.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 중 한 장면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박해성

박해성 연출가
상상만발극장에서 연출
트위터 @theatreimaginer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