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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문화의 기원을 찾아서

[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박해성_연출가

제128호

2017.11.23

의사가 인기직업 리스트에 터줏대감으로 군림하게 된 데는 유구한 역사와 이유가 있겠지만, 소박하게는 TV드라마의 몫도 어느 정도는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옛날 <사랑이 꽃피는 나무>, <종합병원> 부터 <하얀거탑>, <골든타임>, 바다건너 <ER>, <그레이스 아나토미>까지, 종합병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은 당대 청춘스타, 초간지 배우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훈훈하면서도 인류애적 소명의식을 다하는 멋진 직업으로서의 의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의사가 인기직업이 된 데는 안정적인 수입이나 사회적 지위 등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돕는 직업이라는 훈훈한 이미지가 크게 작용하지 않나 싶다. 실제로 종합병원에서 의사들을 자주 만나보면 그 이미지는 달라지지만.

미국 응급실의 흔한 의사(출처: imdb.com)

종합병원 의사의 상당수는 피곤에 찌든 데다,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군더더기라고는 없는 의사소통으로 환자를 대한다. 나의 고통과 그것이 영향을 끼친 내 인생에는 1도 관심 없다는 듯, "1부터 10까지로 볼 때 통증이 얼마정도예요?"류의 질문으로 말문을 막히게 하는 식이다. 4의 통증은 어느 정도고 7은 어느 정도인가. 아플 때마다 자동차속도계처럼 어디 숫자라도 뜬단 말인가. 예약을 하고 몇 달을 기다려서 겨우 만난 특진 의사는 나의 지난 수개월간의 고통과 공포, 우울 등을 몰아치는 몇 개의 짧은 질문만으로 진단한다. 결국 질문폭풍에 어버버 하다 2분 만에 특진실에서 나오고 나서야 증상에 대해서 준비했던 대사들이 생각나 땅을 치게 된다. 환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교감하며 인류애 뿜뿜하던 최수종, 신은경, 이선균, 조지 클루니는, 우리의 닥터 셰퍼드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의사의 일이란 것이 결국은 환자의 증상과 예후를 통해 병을 진단하고 그에 맞는 치료전략을 수립하고 오차 없이 수행하는 것이다. 결국엔 엄밀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정밀한 진단을 해야 하는 과학자이며, 임상 매뉴얼에 맞는 치료를 수행해야 하는 기술자이다. 한명 한명의 환자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거나 동요되면 이 엄밀한 작업에 지장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의사 자신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최대한 거리를 두고 환자를 객관적인 '대상'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창의적인 의술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환자의 위험을 걸고 하는 도박일 수밖에 없으며, 가장 보수적이고 기계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만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환자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법일 것이다. 어쩌면 기계적이고 보수적이고 차가운 의사들의 태도는 의학이라는 업무의 본질과 목적에 가장 부합하게 진화된 조직문화일 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예로 군대를 들 수도 있겠다. 예비역들이 우스개소리로 군인은 인간이 아니라 보급품이라고 얘기할 때 군 특유의 그 몰개성적이고 획일적인 문화에 대해서 넌덜머리를 낼 수밖에 없겠지만, 그게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군이라는 직업의 본질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명 한명의 군인은 상황에 따라 살인을 할 수도 있고, 살해당할 수도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전제로 한 존재이다. 내가 누군가를 죽여야 할 때 나의 인간성과 대상의 인간성을 염두에 둔다면 그 감정적인 고통을 군인이 혼자 감내해야 할 것이고 전장은 슬픈 배경음악 깔리는 눈물바다가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임무수행에 지장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군대라는 조직의 업무 자체가 몰개성, 몰인간성을 전제로 해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 군대의 흔한 사병(출처: battle.net)

조직문화라는 것은 원래 그 조직의 본질적인 정체성과 목적에 맞게 진화된 구성원들의 태도와 행동방식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조직문화는 학습되고 재생산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재생산이 본질과 동떨어진 방향으로 진행되는 경우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상황에 따라 방법이 달라져야 하는데, 상황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방법은 같아서 오히려 목적지향에서 멀어지는 경우이다. 또는 그 문화가 왜 생겨났는지도 모른 채 껍데기만 강화되는 경우이다. 전투보다 평화유지를 주임무로 하는 군대는 그 본질에 맞는 조직문화로 진화되어야 하는데, 월남전 때 쓰던 M16을 아직 예비군 훈련에 쓰듯, 맞지 않는 조직문화가 아직도 강고하게 남아있는 식이다.

새 학년 새 학기, 무릎까지 오는 과잠을 입은 공연전공 학생들이 복도에서 발성훈련 하듯 선배들에게 깍듯한 인사를 외치는 장면은 예술학교에서는 흔한 풍경이다. 전공학생들이 많이 보러오는 공연장에서도 이런 장면은 종종 볼 수 있는데, 뭔가 다른 전공에 비해서 공연전공이 추위를 더 타는지, 학교별 기수별로 꼭 과잠을 맞춰 입고 다니고 인사성도 밝다. 학교에 따라 전공에 따라 차이가 크지만, 어떤 경우는 거의 의사나 군대사회 정도의 유니폼과 위계질서를 추구하기도 한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본질, 무슨 목적을 위해 진화된 조직문화였을까. 극장은 여러 장치와 시설, 언제든 흉기로 바뀔 수 있는 기구와 도구들로 가득 차 있으며 불특정다수가 짧은 시간동안 동시에 이용하는 시설이다 보니, 잠시의 방심이나 태만이 사고로 이어질 잠재적인 위험을 지닌 공간이다. 따라서 극장시설의 운용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운용돼야만 하고, 안전을 위해 엄격한 규율이 필요하다. 그래서 극장의 기술분야는 지금도 위계질서와 규율이 남아있는 편이다. 허나 이것은 극장에서만 국한되는 일이다.

창작 자체는 위계질서와 규율과는 하등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자유로운 문제설정이나 협력작업을 방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그게 이전의 극장질서에서 온 문화이건 군부독재시절 문화이건 그 공고한 위계질서, 주로 연출 중심의 일인집중형 권력구도, 가부장적 질서에 기반한 공동체 문화 등은 창작의 본질적인 정체성과 목적을 볼 때 오히려 조직의 건강을 해치는 문화일 수밖에 없다. 결국 조직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문화에 대해 생각해야만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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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박해성 연출가
상상만발극장에서 연출
트위터 @theatreimag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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