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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푸른밤

[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박해성_연출가

제130호

2017.12.21

J.R.R.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을 처음 읽던 날을 기억한다. 도서관 서고를 어슬렁대며 이런 저런 책을 계통 없이 마구잡이로 쑤셔 넣던 나른한 시절이었는데, 『반지전쟁(당시출판제목)』이라는 난데없는 제목의 세권짜리 소설이 눈에 들어왔다. 뭐랄까 궁극의 부부싸움과 이혼 및 재산분할소송에 관한 책 치고는 모양이 과하게 정색을 하고 있던 바, 그중 특히 두꺼웠던 1권의 딱 1/3 정도만 너덜너덜했고 나머지와 2, 3권은 거의 손도 안 댄 새 책에 가까웠다. 그게 무슨 집합 명제부분만 손 때 묻어 새까만 수학의 정석을 보는 것 같아 묘하게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데다 뭔가 또 『규화보전』 같은 걸 손에 넣은 것만 같아 은밀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300명 정도가 한 번에 교양수업을 듣는 대형 강의실에 앉아있었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이런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심지어 수업 중이었음(출처: 핀터레스트의 바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 우리 각자의 타임라인을 생성한다. 같은 책도 누가 읽는지, 언제 읽는지에 따라 시간의 속도가 달라지고 맥락이 달라진다. 심지어 모두가 같은 맥락으로 읽으라고 강요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교과서마저도 누구에게는 베개가 되기도, 누구는 "교과서 위주로 공부해서 수능을 만점 받"기도 한다. 수학정석의 집합 명제 부분만은 분명히 손때가 새까맣게 묻도록 읽었음에도, 여전히 집합 명제가 무슨 얘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성공을 위한 수억 가지 방법에 대해 다루는 책을 백날 읽어도 우린 성공하지 못하며, 『시학』을 백번 천 번 읽어도 우린 『오이디푸스』를 쓰지 못한다. 책이란 것이 결과적으로 어떤 줄거리나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그 정보가 전달되거나 받아들여지는 양상은 모두에게 다를 수밖에 없다. 어쩌면 모든 책은 모두에게 각자 다르게 존재한다는 전제부터가 '독서'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애석하게도 그런 독서를 학교에서 배워본 적은 없지만.

따지고 보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할 이유도 없다. 사실 수학정석의 집합, 명제만 보고도 우리는 수학이 내 인생에 어떤 부분을 차지할 지 직감할 수 있었으며, 나머지 부분을 읽을 필요가 없다거나 집합, 명제만으로 우주의 원리를 깨우쳤다는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반지전쟁』의 1권의 1/3만 읽고도 그 책은 이미 내 타임라인에 어떤 방식으로든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속도전 물량전처럼 마치 책 한권을 해치워야 한다, 책 한권에 들어있는 정보를 내 머리 속에 쏟아 넣어야 한다는 룰은 애저녁에 존재한 적이 없다. 올 한해 책을 몇 권 읽었는가보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느냐가 아마 더 중요할 것이며, 알고 봐도 쓸데없는 잡다한 지식을 얼마나 많이 아는지보다 내 타임라인의 순간순간이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잔뜩 사놓거나 빌려놓고 읽지도 않은 책을 쳐다보며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각자가 상대적인 시간의 타임라인으로 살아가는 독서에 비해, 공연은 좀 다를 수도 있겠다. 현상적으로 공연은 특정인원을 특정 공간에 가둬놓고 전화기도 못쓰게 하면서 특정시간을 강요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많은 공연은 무대와 객석 사이에 "제 4의 벽"을 두고 배우는 관객이 없다는 듯 연기하고, 관객은 자신이 없다는 듯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훔쳐본다. 많은 공연은 그 시간동안 관객으로 하여금 "시간이 어떻게 갔는 줄 모르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소수의 공연은 그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하여, 관객 각자의 타임라인의 한두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는다. 그런데 우리의 타임라인이 그 동안 정말로 사라진 것이었을까. 정말 우리 모두는 그 동안 같은 것을 바라보고 같은 생각을 했을까. 우린 거기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는 존재를 잊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성공에 대한 책을 읽고 있으면 내가 왠지 성공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처럼, 우리는 각자 어떤 의도와 맥락에 따라 자발적으로 타임라인을 저당 잡히고 롤러코스터에 올라가 특정한 '기분'을 소비한 것은 아닐까. 그 순간에도 그렇게 우리의 타임라인은 모두 다르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목적과 맥락은 우리 모두 다르다.(출처: imbc.com)

돌이켜보면 지금도 이불킥을 하게 만드는 인생의 순간들이 있다. 그 때 공부를 좀 했어야 했는데, 좀 놀았어야 했는데, 그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비트코인에 돈을 넣었어야 했는데, 혹은 빨리 뺐어야 했는데 등등. 그런데 막상 같은 상황과 맥락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즉 우리 타임라인의 같은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선택이 달라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타임라인은 그 순간의 상황과 맥락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불킥은 그 타임라인이 한참 쌓인 현재시점의 이야기이고, 현재를 살고 있는 지금의 '나'님과 역시 현재를 살고있었을 뿐인 과거의 '나'님은 절대 같은 생각이나 판단을 할 수 없는,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다. 이 사실을 자꾸만 잊어버리는 바람에 지나간 과거를 두고 이불킥하거나 오지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다 흘려보내곤 하지만.

그렇듯 과거의 자신한테도 한마디 할 수 없는 게 우리인데,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다른 사람, 다른 타임라인에까지 오지랖을 떠는 스웩일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청춘은 무엇인가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최종상태이다. 어떤 사람은 마치 자신이 과거에 힘든 고난을 이겨냈고 그것이 개연적으로 자신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얘기하겠지만, 그는 아마 자신의 타임라인을 한번도 면밀히 되돌아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 고난이 최종상태였던 순간의 고통을, 행여나 끝이 있다는 걸 알더라도 그 끝이 언제인지 모른다면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그러다 우연찮게 얻어걸린 걸 두고 마치 자신이 차곡차곡 성공의 개연성을 쌓아나갔다고 말하겠지만 그런 각색을 과거의 자신에게 들려준다 하더라도 돌아오는 것은 현실킥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타임라인을, 각자의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의 현재가 다른 누군가의 과거일 수 없으며, 누군가의 현재가 또 다른 누군가의 미래일 리도 없다. 우리는 각자 타임라인에서의 지금을 각자의 맥락과 방식으로 공유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지 그 고통을 짐작하고 안타까워하는 것뿐이다.

누군가의 푸른밤(출처: imb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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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박해성 연출가
상상만발극장에서 연출
트위터 @theatreimag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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