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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답노트

[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박해성_연출가

제134호

2018.02.22

상상해본다. 때로는 힘 빠지게 만드는 부정과 누군가를 눌러야 살아남는 생존경쟁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결국 성공이나 상찬에 상관없이 오로지 나 자신만의 동기부여와 목표를 만들어 묵묵히 그 길에 매진한다. 그런데 그걸 지켜보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어떤 누군가 혹은 누군가들이 있다. 그 누군가 혹은 누군가들이 함께 뭔가를 만들어간다. 그 과정은 끝이 보이지 않고 힘이 들지만, 그 어느 누구의 동기부여나 원칙도 무시되지 않고 그 과정을 함께 감내한다. 그러다가 성공을 하거나 또 실패를 하겠지만, 그 과정과 결과물은 그 누구에게도, 특히 각자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다. 가만, 이런 적이 있었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어떤 국가, 민족, 직업, 출신학교, 조직에 포함되어 있음에 "부심쩔"었을 수는 있겠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서 비롯된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나? 없다. 상상이다. 우리에게 "자부심"은 경험해보지 못한 마음이다.

"자부심을 가져"는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마음은 내 안에서 결과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와 비슷하달까. 그럼에도 우리는 크고 작은 부심을 "가져"왔다. 그런 부심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은 게 우리의 소망일 지도 모르겠다. 내 국가, 민족, 직업, 출신학교, 조직이 가치 있고 뛰어나다고 믿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거기에 속한 나도 우월한 것만 같고, 사랑도 뿜뿜한다. 사랑이 뿜뿜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려가게 된다. 그렇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맹목적으로 엉기다보면 아주 가끔씩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기적이 별건가,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일어나는 게 기적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기적이 다시 권위를 믿음을 종교를 만들어낸다. 이후로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복음이, "옳은 말"이 된다.

이 정도로 종교의 작동원리를 갖추기 시작하면, 비즈니스는 탄탄대로랄 수 있겠다. 개개인의 소박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끝없이 공급될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그저 콩으로 메주를 쑬 뿐인데도 기적이라고 믿게 된다. 종교는 무조건 진리이고 옳기에 권위는 점점 쌓여만 가고, 믿지 않는 이는 권위와 권력에서 배제된다. 이쯤 되면 믿지 않는 이도 헛갈리게 된다. 뭘 저렇게 믿을까, 뭔가 믿을 만 한 구석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만 같은 인지부조화가 발생한다. 하지만 가장 큰 인지부조화는 믿는 당사자에게 발생한다. 나의 경험, 마음, 의심, 나의 고통을 부정해야만 한다. 이 자부심이 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절대로 옳은 것, 뭔가 진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부정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지옥은 이렇듯 종교와 늘 공존한다. 그게 국가이건, 어느 민족, 어느 업계, 어느 패거리이건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우리의 종교가 종교인 줄 모르는 경우도 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은 뭘 해도 다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처럼, 내가 완전하다고 "믿는" 대상의 오점은 으레 우리 눈에 잘 안보이게 마련이다.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치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왠지 인간쓰레기일 것 같고, 내가 지지하는 대상은 왠지 완전할 것만 같다. 간혹 문제점이 보이더라도, 그 대상의 "완전함"에 비하면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흠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로 인해 분명히 고통 받는 이들이 있는데도 아예 보질 못하거나, 그 거대한 완전함을 지켜내기 위해 외면하기도 한다. 심지어 고통 받는 이가 자기 자신임에도 그 고통을 덮고 자기부정을 해야만 하기도 한다. 가정폭력은 "그래도 가족인데", "가족은 지켜야지"라는 이데올로기로 은폐되고 방조된다. 의심받지 않는 믿음은 이렇듯 공고하게 재생산되고 구조화된다.

어쩌면 우린 그가 만천하에 자신의 범죄를 시인하고 반성할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잠깐이나마 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범죄자가 범죄를 부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확신범이 아니어도 그렇지만, 확신범일수록 더욱 그렇다. 범죄자가 죄를 인정하는지 여부와 사법적 응징은 별개의 일이다. 피해자들의 고통과 분노, 그들과 함께하지 못한 실질적 방조자들의 죄책감, 이 거대한 오답에 대한 자괴감과는 별개로,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답노트인지도 모른다. 왜 오답임을 몰랐는지, 알았다면 왜 이렇게 오랜 기간 오답이 유지됐는지, 과연 오답이 이것 뿐인지이다. (주로)연출 중심의 일인집중형 구도나 가부장적 질서에 기반한 공동체문화는 창작 자체에 있어서 족보도 없고 정당성도 없지만, 기적을 이룬(!) 몇몇 선례 때문에 으레 받아들여져 왔다. 견제되지 않는 권력에 폭력이 따라오고, 거기에 위계권력, 젠더권력까지 합쳐져 지옥도가 펼쳐지는 것을 우린 목격해왔지만 "예술", "창작"에 관련해서는 뭔가 다른 기준이 존재할 것만 같은 애매한 믿음이 우리 눈을 가렸는지도 모른다.

정의를 말하고 대의를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폭력과 불의로 점철된 삶을 사는 경우가 있다. 아마 자신이 폭력과 불의의 한가운데 있음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신을 의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가해도, 피해도 신화화된 예술로 정당화돼왔고 묵인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 큰 정의, 완전한 예술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에 인질 잡힌 건 아닐까. 어쩌면 우리가 예술을, 창작자들이 자신의 일을 너무 특별하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예술이란 것이 너무나도 특별하고 위대해서 그 가난과 폭력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갈 가치가 있다고 믿어버린 건 아닐까. 그런 믿음을 이용하여 권력이 생겨나고 착취와 폭력의 지옥이 펼쳐진 건 아닐까. 그렇다면 오답노트는 먼저 그 예술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는데서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닐까.

예술이, 특히나 공연이 어느 특출난 개인의 의심 없는 위대함으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버린다면, 함께 만들어가는 한 명 한 명의 개별성과 창의적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원칙과 시스템을 아주 공들여 만들어나간다면, 공들여 만들어진 그 원칙을 어기고 누군가의 존재나 개별성을 폭력적으로 억누를 경우 누구든 예외 없이, 심지어 그게 자기 자신이라 하더라도 과감하게 배제되는 엄격한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지켜지고 있다는 경험적 확인이 우리 작업에서 조직에서 계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예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긍정하고 그동안 은폐됐던 폭력의 정체에 대해 고발한 분들의 용기가 어쩌면 그 자부심의 시작일 수 있겠다.

2015년 빌코스비의 성폭행을 연쇄고발한 35명의 여성들. 사건을 이슈화하고 성폭력건의 공소시효를 없애는 법을 캘리포니아 주에 도입하고, 결국 코스비를 법정에 세우기에 이른다. 다큐멘터리 <글로리아 올레드: 약자 편에 선다>로 다루어졌다.
(출처: thecu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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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박해성 연출가
상상만발극장에서 연출
트위터 @theatreimag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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