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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오지심

[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박해성_연출가

제146호

2018.08.23

사실 내것 아닌 고통에 대한 공감 같은 건 애저녁부터 우리에게 없었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오오오래된 연극의 스킬이 그렇듯, 어쩌면 잠깐 착시가 일어날 수는 있겠다. 나와 비슷한 것만 같은 대상, 나와 비슷한 것만 같은 상황 등은 그 그럴법함과 유사성으로 인해 내 고통과 내 공포로 잠깐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어떤 타자도 내가 될 수 없고, 아무리 유사한 대상도 결국엔 나와 구분되는 선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본능 이외의 것을 배울 첫번째 기회인 가족이나 부모에게조차 우리는 타인과 선긋기부터 배운다. 아마도 다른 자식의 고통보다 내 자식의 고통을 크게 느끼는 부모의 본능 탓인지도 모른다. 자식에게 이타적이어야 한다 말할 수는 있겠으나, 정작 자식이 타인을 위해 고통을 짊어지기 바라는 부모는 흔치 않다. 그리고 모든 자식은 부모의 말보다는 행동과 현상으로 교육받는다. 이렇게 내 고통은 늘 타인의 고통에 비해 크고 깊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당한 내 고통의 크기는 내가 가한 또다른 누군가의 고통의 크기와 비교할 바 아니다.

"넌 엄마 없니?" 봉준호 감독 영화 <마더>(2009) 중 한 장면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럴진데, 동물에게는 오죽하랴. 거북이 코에 꽂힌 플라스틱 빨대 사진을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보고 '슬픔' 아이콘을 누를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스타벅스에서 일회용 컵과 빨대를 쓰지 않는 불편을 감내할 순 없다. 뿐이랴. 각종 음식과 의약품 포장에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음으로 발생할 수 있는 비위생과 질병의 공포가 이름도 모르는 거북이의 고통을 뛰어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거북이와 나, 자연과 나, 타인과 나 사이에는 선이 그어지고 거리가 생겨난다. 우리는 나 아닌 다른 것과 나를 연결할 수 있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 그러기에 둘 사이는 너무나 멀다. 가족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그 어떤 사회에서 그 어떤 교육으로도 우리는 그 연결을 배우지 못했다. 오히려 경쟁과 적자생존으로 인해 그 거리의 존재를 체감할 뿐이다. 우리는 늘 이타적이기를 교육받지만, 정작 이 사회는 이타성이 중요한 덕목임을 현상으로 증명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소박하고 강렬한 공감의 순간이 있다. 누군가의 푸념을 들으며 눈 맞추며 공감하고, 길고양이에게서 내 존재의 비루함을 느낀다. 모르는 이의 얼굴에서 행복과 불행을 읽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해진 바람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육식을 하면서 도축당한 생명들에 죄책감을 느낀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다. 이 글에서 앞서 말한 모든 말들이 필요 이상으로 냉소적이고 위악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떠올렸을 바로 그 순간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어지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은 그 공감과 연결을 어떻게 해낸 것일까.

내 마음은 호수요 / 그대 노 저어 오오 : 누가 쓴 시인지, 제목이 뭐였는지도 기억은 안 나는데, 답은 안다. "은유". 우리는 시를 교과서에서 배운다. 하지만 우리는 "은유"라는 교과서 너머에 있는 경험을 한다. 내 마음과 호수는 털끝만큼의 유사성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멀고 먼 물성과 대상을 우리와 연결하는 법을 경험한 것이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중에서) : 은유는 우리의 일상과 밥벌이와 인과관계와는 상관없는 뜬금포를 남발한다. 하지만 멀고 먼 두 점을 이어내고야 마는 그 연결과 공감의 선을 우리는 어쩌면 은유와 예술, 연극에서 경험했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검은머리에 대놓고 한국말을 하는 배우를 어떻게 덴마크의 왕자 햄릿과 연결시키겠으며, 그 덴마크 왕자와 우리의 마음을 연결시키겠는가.

그렇게 우리가 접해왔고 경험해왔던 은유와 예술에는 알게모르게 이런 비밀기능이 탑재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꼭 인류의 등대이며 시대의 정신이고 인피니티 스톤을 지켜내서가 아니라, 어떤 무언가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또 다른 무언가를 가늘고 강렬하게 연결하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거미줄 같은 연결망이 예술인지도 모르겠다. 이타적이고 정의롭고 선함을 학교에서처럼 우리에게 가르치는 게 예술이 아니라, 단지 그 가느다란 거미줄을 얽어온 게 예술인지도 모르겠다. 전혀 닮지 않은 타인과 나, 나의 이익과 전혀 상관없는 거북이와 나, 삼나무와 나를 연결시키고 누군가에게 당한 내 고통의 크기보다 내가 가한 또 다른 누군가의 고통에 괴롭고 부끄러워하는 마음. 이런 마음은 어디서도 교육받은 적도, 교육받을 수도 없으며 오로지 예술을 통해 그 연결을 경험했을 때만 생겨나는 우리의 돌연변이 초능력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세기 들어 처음으로 정조(貞操)라는 단어를 뉴스기사에서 접하노라니 삼강오륜 인의예지 내로남불 등 온갖 사자성어들이 머릿속을 스치다 하나에서 멈춘다.

수오지심(羞惡之心):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당신들의 불의가 난 부끄럽다.

출처: twit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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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박해성 연출가
상상만발극장에서 연출
트위터 @theatreimag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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