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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와 객석 사이

[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박해성_연출가

제154호

2018.12.20

여름엔 온 지구가 불지옥에 떨어져 멸망할 것만 같더니, 막상 겨울이 오니 그 때 더위가 잘 실감 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 노곤함이 그립기까지(라기보다는...)하다. 이렇듯 다들 뻔히 알면서도 오갈 때마다 새삼스럽고 유난스러운 건 계절뿐 아니라 해마다 돌아오는 이맘때, 바로 연말 연초가 되겠다. 다들 매해 다사다난했다니 그렇다면 모든 이의 평생은 다사다난으로 꽉 차 있어야겠지만, 막상 지난 1년 동안 타노스가 우주를 반으로 쪼개듯 뭔가 드라마틱한 변화나 대단한 시기의 명멸을 겪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연말마다 뭔가 대단한 터널을 지나온 듯하고, 한해 한해가 다르다고 느끼며, 1월 1일을 기점으로 내년엔 뭔가 다른 일이 펼쳐질 것만 같다.

별 일 없이 산다. (출처: EBS 유튜브채널)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스벅에 몰스킨 가격의 몇 배를 바치고 스케줄러를 득템한들, 거기에 딱히 적을 거리는 내년에도 안 생길 것이며 필시 곧 서랍에 처박아놓게 될 것이다.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이지 우리 대부분은 늘 "별일 없이 사는" 중이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보다 별 일이 없다보니 우리가 드라마에 더 집착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큰일이나 상처를 겪고 있는 이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공감하기보다 그 선후맥락의 드라마틱함에 더 주목한다든지, 아니면 그보다는 윤리적으로 안전할 수 있는 허구의 세계-연극, 영화, 소설, 만화, TV, 게임 등등-에서의 극단적인 드라마에 탐닉한다든지. 그러다가 자신의 삶을 각색해서 자기연민의 드라마에 빠지기도 하고, 아님 영웅담으로 각색해서 자랑질 꼰대 짓을 일삼는다든지 등등. 이쯤 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말 큰일 했구나 싶기도 하다.
그런 드라마 중에 최고는 단연 "종말" 드라마가 아닐까 싶다. 내 인생은 망해가고 있고, 인문학은 종말을 고했고, 위태위태한 경제도 무너져 버릴 것이고, 정치는 더할 나위 없고, 이러다가 정말 몇 년 안에 이 나라는 망하고야 말 것이고, 전 세계의 중2들이 앞으로의 세계를 멸망시킬 것이고, 환경오염이 거북이들을 닌자터틀로 만들어버릴 것이고, 인류는 망가지고야 말 것이고(젠장 자본주의!), 여튼 뭔가 세계는 망해가고 있는데 어떻게 손을 쓸 순 없고, 예전엔 좋았는데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아름다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내 쓰라린 마음으로 비장하게 세계의 최후를 목격하고 있는 중인 드라마랄까. 그러다가 어떤 영웅이 나타나서 급전과 발견을 동시에 이루어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기도 하지만 이내 처절하게 실망하기도 하고, 그 영웅이 혹시 나인가 싶기도 하고. 허나 분명한 건, 내가 태어나서 죽기 전에 이 세계의 흥망성쇠가 일어날 가능성은 전무에 가깝다는 점, 뭔 일이 일어나긴 하더라도 그게 무슨 일인지는 지금 이 순간으로선 알 길이 없다는 점이다.

"가위, 바위..." (출처: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2018) 중 스틸)

올해는 유난히 공연들이 연말까지 이어진다. 전에는 12월 초순이면 시즌이 대략 마무리되고 작업자들도 흥청망청 놀든가 조용히 한 해를 마무리하던가 할 때인데, 여튼 크고 작은 공연이 계속 이어진다. 공연 편수가 많아졌으니 좋은 일인가 하면, 막상 극장엔 관객이 적어 다들 고민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공들여 만든 공연에 관객이 들지 않으니 도대체 뭐하겠다고 공연을 올리는가 하면, 그래도 훌륭한 작품 하나 만들 수만 있다면 창작자들은 뭐든 할 준비가 돼 있으니 오늘도 묵묵히 공연을 올리고 있겠다. 그런데 공연을 보러 오는 이도 없고 공연이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 딱히 얘기해주는 사람도 없고 이게 명작인지 아닌지 알 길도 없다. 이정도 되면 잠재관객의 수에 비해 제작편수만 급팽창하게 된 제도의 문제일 수도 있겠고, 정말 창작자들의 역량 탓일 수도 있겠고, 요즘 시대에 어벤져스 영화나 아이유 콘서트 보러가지 누가 연극을 보나, 연극의 시대가 이미 저물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가 딱히 "연극의 시대"를 본 적이 있나 싶기도 하다. 연극의 황금기는 늘 이미 지났었고, 연극관객은 늘 소수였으며, 창작자들은 빈 객석을 보며 고통스러워했다. 어쩌면 우리가 이런 다양한 매체시대에 저물어가는 장르를 지키는 소수의 창작자, 소수의 관객이라는 비장한 드라마를 즐기고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 시대에 연극이 소멸하는 현상을 목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연극이 있으면 관객이 있고, 많건 적건 단 한 명의 관객에게라도 뇌리에 남는 한 이 연극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검열을 하건, 제도의 바깥에 머물건, 만들어진 연극은 존재할 것이고, 어떤 창작자가 딱히 명작을 완성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관객을 매개로 이어진 다른 연극으로 완성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우리는 내년에도 앞으로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별일 기다리지 않고, 그저 만들고 그저 보아야겠다.

어느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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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박해성 연출가
상상만발극장에서 연출
트위터 @theatreimag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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