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얼굴을 한 역사
허윤_문학연구자
제166호
2019.08.22
2019년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해이다.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국가 행정기관 및 학계, 시민단체 등이 모두 식민지 역사를 사유하고, 포스트콜로니얼 한국의 위치를 점검하는 자리를 만들고 있다. 특히 올해 눈에 띄는 것은 독립운동사에서 여성들의 기억을 소환하면서 여성을 역사의 주체로서 재현한다는 점이다. 2018년부터 여성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으며, 여성가족부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을 담은 달력을 제작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연상시키는 구도로 태극기를 든 여성을 소환하였다. 독립운동의 주체를 여성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앨범 자켓 이미지
(이미지 출처: https://www.together100.go.kr/lay2/bbs/S1T11C23/G/6/view.do?article_seq=181&cpage=1&rows=8&condition=&keyword=)
(이미지 출처: https://www.together100.go.kr/lay2/bbs/S1T11C23/G/6/view.do?article_seq=181&cpage=1&rows=8&condition=&keyword=)
최근의 역사적 여성을 재현하려는 시도는 여성을 민족국가 안으로 포섭하려는 기획이기도 하다. 2015년의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에게는 국가가 없다’ 혹은 ‘여성은 2등 시민’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선언한 현 정부의 여성 정책을 두고도 여러 갈등이 벌어졌다. 2018년 2030 여성들은 광장에 쏟아져 나와 불법촬영 규제 강화와 낙태죄 폐지 등을 소리 높여 외쳤다. 10만 명에 가까운 여성들이 거리에 선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20대 여성들은 이기주의자’라는 대통령 정책위의 보고서로 돌아왔다. 2030 여성들이 국가를 더 이상 전폭적으로 지지할 수 없을 때, 여성을 국민으로 호명하는 방식이 ‘애국자 여성’을 호출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2019년 3월 1일 자 한겨레신문은 그림판 코너에 태극기를 든 두 명의 소녀를 등장시켰다. 1919년과 2019년의 두 여학생이 100년의 시간을 두고 악수를 주고받는 주변으로 2019년 2월 28일의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알리는 신문이 배치되어 있다.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그날이 진짜 독립”이라는 1919년 소녀의 말은 북미정상회담이 아닌 남북정상회담이 한반도의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의도로 배치된 것이다. 그런데 이 한겨레 그림판의 말풍선은 작가의 의도를 넘어선 해석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교복을 입고 광장에 선 소녀를 본 2018년의 한국여성들은 최근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였던 ‘스쿨미투’ 속 학생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의 운명”은 조선/한국을 살며 성폭력과 가부장제에 맞서 싸우는 여성의 운명이자 결정이 된다.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한다”는 말은 오랫동안 낙태죄 폐지의 구호로 사용되던 “나의 몸, 나의 선택(My Body, My Choice)”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재현은 언제나 해석의 초과 혹은 잉여의 자리를 만들어낸다.
평화의 소녀상 (사진출처: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5년의 한일합의에서부터 미국 캘리포니아 글린데일 시의 소녀상 철거 문제, 아이치 트리엔날레에 이르기까지 130cm의 소녀상은 일본을 위협하는 강력한 정치적 힘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녀상을 둘러싼 다른 목소리들은 제거된다. 여러 논자들은 더 많은 소녀상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소녀상일까? 대만과 호주, 샌프란시스코 등에 건립된 소녀상은 저마다 형상도 그 의미도 다르다. 대만 타이난시의 ‘위안부’상은 선 채 양손을 올려 일본군에 저항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소녀상은 조선, 중국, 필리핀 여성 세 명이 손을 맞잡고 서 있는 형상으로, ‘여성 강인함의 기둥’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단발머리를 한 채 주먹을 쥐고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에게 시민들이 머플러와 핫팩을 쥐어주는 형태와는 분명히 다르다. 임신한 여성이나 단발머리 소녀 등 취약한 여성의 신체가 적국의 범죄를 고발할 때 가장 효과적인 선전 수단이 되는 것처럼, 소녀상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무고한 희생자’ 프레임에 적합하기 때문에 희생자로서 여성을 부각시키고 보호해야 할 소녀를 지키지 못한 분노를 자극하는 데 효과적인 표상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훌륭한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녀가 갖는 정치적 힘은 쉽게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거리의 소녀상 또한 쉽게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2017년 삼일절을 맞아 디시인사이드의 한 유저가 “위안부 소녀의 입술을 빨아주고 왔습니다”라며 사진을 인증하여 논란을 빚었다. 그는 “같은 국민의 아녀자 입술은 같은 국민 남성의 것이지 다른 외간 남자에게 빨리는 건 치욕이라고 생각한다”며 사진을 올린 이유를 덧붙였다. 이와 유사한 사건은 세종시와 대구, 부산 등 지역에서도 발생했다. 소녀상의 옆에 앉아 팔짱을 끼거나 키스를 하는 등 신체 접촉을 하고 여기서 더 나아가 망치로 머리를 가격하는 등의 폭력 행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 우익들이 아이치 트리엔날레에서 소녀상을 위협하는 장면들도 목격되었다. 소녀상에 대한 가해는 소녀 이미지의 양가적 측면을 가시화한다. 소녀란 가장 착취되기 쉬운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이치 트리엔날레를 계기로 퍼져나가고 있는 소녀상 퍼포먼스는 여러모로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전시 철회 결정으로 인해 세계 각지에서 소녀상 옆 빈 의자에 앉아 일본군의 사죄를 요구하는 퍼포먼스가 이어지고 있다. 내가 소녀상이 ‘되는’ 이 퍼포먼스는 표현의 부자유에 항의하고, 일본의 식민지배를 고발하는 목소리를 낸다. 이것이 재현을 초과하는 해석의 자리다. 남자, 여자, 노인, 어린이 등 다양한 인종, 젠더, 국적의 사람들이 기념비가 되는 퍼포먼스를 통해 고정된 소녀상의 재현물이 가진 한계들을 대리 보충하는 것이다.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놓는 재현, 비가시화된 것을 드러내는 재현이 요청된다.
소녀상 퍼포먼스
(사진출처: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3577018))
(사진출처: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3577018))
- 허윤 문학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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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50년대 전후 남성성의 탈구축과 젠더의 비수행」, 「냉전아시아적 질서와 1950년대 한국의 여성혐오」, 「1950년대 퀴어 장과 법의 접속」 등의 논문과 『그런 남자는 없다』(오월의봄, 2017),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민음사, 2018) 등의 공저, 『일탈』(현실문화, 2015) 등의 역서가 있다.
yunheo@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