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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콤플렉스

허윤_문학연구자

제170호

2019.10.24

중학생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제인 에어』였다. 주변 친구들은 『폭풍의 언덕』의 열렬한 사랑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위대한 개츠비』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인 에어』는 조금 달랐다. 고아 여성이 주변의 도움 없이 본인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분투하는 과정이, 내게는 무엇보다 핍진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제인이 화재로 장애를 얻은 로체스터에게 돌아갔을 때, 나는 내심 분통했다. 이제 겨우 사촌도 만났고 유산도 받은 참인데, 집을 잃고 아이만 있는, 늙은 로체스터에게 돌아가다니! 하지만 제인이 자기만의 돈을 가진 상황에서야 대등하게, 자유롭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소설의 결말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제인 에어』가 버사 메이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쏜필드 저택에 불을 지른 로체스터의 미친 아내가 그 저택이 가진 부의 원천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영국인 아버지와 현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영국에 와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된 이야기를, 작가 진 리스는 『광막한 사가소 바다』에서 풀어놓는다.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있던 크레올 여성은 백인들의 제국에 도착해서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존재로 취급당했다. 야수와 같은 모습으로 형상화된 버사 메이슨은 실상 영국의 제국주의와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비체(abject)였다. 영국식 매너에 적응하지 못해서, 저택의 안주인답게 하인을 부리지 못해서, 남편을 잘 보필하지 못해서 등 정상성의 규범을 따르지 못한 여성은 쉽게 미친 여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산드라 길버트와 수잔 구바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나 『제인 에어』의 버사 메이슨과 같은 비정상적이고 동물적인 캐릭터들이 작가의 분노와 불안을 담지한 분신이라고 보았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이들은 19세기 영미문학의 고전에 등장하는 미친 여자 캐릭터가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주장한다. 한국문학에서도 미친 여자의 목소리를 종종 만날 수 있다. 1920년대 여성작가인 백신애는 자신의 소설 「광인일기」에서 아이를 뺏기고 남편에게 이혼당해 미친 여자를 화자로 등장시킨다. 그의 정제되지 않은 언어는 주위로부터 눈총을 사지만, 독자들은 그가 왜 미칠 수밖에 없었는지 알고 있다. 2016년의 소설 『82년생 김지영』 역시 마찬가지다. 환청을 듣던 김지영은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자신이 미쳤는지를 되묻는다. 사회와 역사, 제도로부터 배제된 여성들은 광인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젊고 빛나던 그의 비보를 들었을 때, 나는 무수히 많은 미친 여자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섹시하되 소녀다워야 하고, 노동하되 즐겨야 한다는 규범을 지키지 않아, 종종 사람들의 입에 오르곤 했던 사람이었다. 여자 아이돌이면서 연애를 하다가 발각되고, 무대에서 웃지 않고, 노브라를 주장하며 ‘girls supporting girls’를 이야기하는 그는 아이돌 답지 않은, 비-정상적인, 바람직하지 않은 여성이었다. 한국인이 그토록 자부심을 갖는다는 ‘칼군무’는 반복된 고강도의 훈련 덕택이며, 요정 같은 그들의 몸매는 하루에 탄산수 2병을 마시면서 버틴 덕분이다. 사진 한 장, 코멘트 한 줄이 기사화되는 사회에서 소문은 대중의 인기로 먹고사는 자들이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이 되었다. 아이돌 산업이 제2의 굴뚝 없는 공장으로, 한국의 관광업과 문화산업을 부흥시킬 것으로 기대되자 이제 이들은 민간 외교관이자 애국자로 호명되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깎아내며 활동했다. 그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그는 분명 여자 아이돌의 규범을 어긴 자로 지탄받았다.
여성들에게 사람들의 입은 꽤나 잔혹한 것이다. ‘여자도 사람이다’를 외쳤던 사람들은 언제나 소문에 시달렸다. 프라이버시도, 팩트 체크도 없던 시절 미디어는 여성 작가들의 삶을 파헤쳤다. 나혜석은 임신한 사실을 확인한 직후, “이렇게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있냐며 예술가로서의 삶을 염려하였다. 모성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단련성”, 즉 양육 경험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라는 글은 공론장의 지탄을 받았다(「모된 감상기」, 『동명』, 1923년 1월). 「이혼고백장」(『삼천리』, 1934년 8,9월)을 통해 11년간의 결혼생활을 털어놓았을 때도, 사람들은 이혼의 귀책이 나혜석에게 있다고, 그는 이혼당해 마땅하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정숙하고 인자한 부인이자 어머니가 되라는 규범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여, 나에겐 그런 두려움이 있다네”로 시작하는 김승희의 시 「나혜석 콤플렉스」는 집을 나와 거리에 선 나혜석을 호명한다.
“그러나 추운 겨울날,
홀로 다리를 건너간 여인들이 있었지
부네와 미얄탈이 걸려진
실내악의 방을 나와
다리를 건너
저 멀리 피안으로 홀로 가는 여인들은 보여주지
사자와 고양이는 똑같이 고양이과에 속한
맹금류 동족인 것을,

(중략)

여자는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하여
자신을 통째로 찢어발기지 않으면 안 되는가,
검정나비처럼 흰나비처럼
여자는 왜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하여선
항상 비명횡사를 생각해야 하는가.”
수많은 나혜석들이 다락방에서 미치거나 거리에서 비명횡사하면서 길을 만들어왔다. 그들의 말을 남기기 위해서 싸워왔다. 1896년생 나혜석과 1994년생인 그가 걸어온 삶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그 시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오늘 나는 나혜석과 김승희의 시 「나혜석 콤플렉스」를 그와 겹쳐 읽는다. 맹금류 여성들이 비명횡사하지 않는 그 날을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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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

허윤 문학연구자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50년대 전후 남성성의 탈구축과 젠더의 비수행」, 「냉전아시아적 질서와 1950년대 한국의 여성혐오」, 「1950년대 퀴어 장과 법의 접속」 등의 논문과 『그런 남자는 없다』(오월의봄, 2017),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민음사, 2018) 등의 공저, 『일탈』(현실문화, 2015) 등의 역서가 있다.
yunheo@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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