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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을 신는 것도 숭고해 보인다면

김원영

제173호

2019.12.05

공연예술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대체로 냉소를 받을 것이다(연극이라면 더욱). 현대의 모든 예술분야에서 아름다움은 예술철학자 아서 단토의 말처럼, 선택일 뿐 필요조건이 아니다. 어떤 창작자들은 자신의 작업에서 아름다움이 중요한 목표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때의 아름다움은 고전적으로 언급되던 조화, 단정함(혹은 화려함), 대칭, 균형, 부드러움 따위와 거리가 멀 것이다. 아이돌 출신 연예인을 캐스팅해 상업적 성공을 도모하는 일부 뮤지컬을 제외하면, 현대 공연예술은 이를테면 피겨스케이팅과는 전혀 다르다.
촌스럽지만, 나는 장애인 배우가 등장하는 연극을 처음 기획할 때 ‘아름다움’에 집착했다. 부조화하고, 대칭적이지 않고, 균형이라고는 맞지 않으며, 부드러운 곡선처럼 움직이는 일이 일상에서 불가능한 배우들이 잘 기획된 무대 위에서라면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지 않을까. 뇌병변장애를 가진 배우의 예측불허한 움직임은 특정한 방식으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순간에, 특정한 조명 아래에서, 다른 배우의 특정한 움직임과 조응한다면 충분히 우아하지 않을까? 근육이나 신경학적 손상으로 온몸을 옴짝달싹 못 하는 배우가 무대 위에 오르더라도 그의 눈동자와 눈꺼풀의 움직임을 관객에게 확대해 보이고, 주변 배우들은 이에 조응한다면, 침대형 휠체어에 누운 이 배우도 우아하게 ‘움직이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댄 도우 <조건(On One Condition)>
ⓒFoteini Christofilopoulou

아름다움에 관한 나의 ‘편협한’ 태도는 사회가 장애인의 신체를 위대하거나 숭고한 것으로서 종종 논평하는 데 대한 일종의 반동이기도 했다. 내게 있어 아름다움의 추구는 고상하고 고전적인 예술의 목표라기보다, 정작 장애인의 몸으로 무대 위에 서기를 본인들은 원하지 않을 것임에도 장애인의 신체에서 숭고나 위대함 같은 거창한 ‘정신적’ 의미를 찾는 이들에 대한 냉소와 반항에 가까웠다.
시각예술에서 뒤샹이 <샘>이라는 이름의 변기를 미술관에 투척하며 본격화된 흐름은 20세기 중반의 정치적 진보를 위한 움직임, 거대한 철학적 세계관(이데올로기, 낭만주의적 미학 등)에 대한 냉소가 겹치며 ‘아름다움’을 예술에서 밀어냈다. 오히려 예술가들은 그동안 ‘추(醜)’라고 불렀던 움직임, 이를테면 축축하고 비균질적이며 기괴한(소위 ‘아브젝트(abject)’한 것) 이미지들이야말로 예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80년대를 지나며 90년대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꽃피웠던 장애예술운동은 이러한 흐름에 연결되어 있다. 내 생각에, 아마도 장애인들은 자신들의 신체가 권리의 주체로서 온전할 뿐 아니라 미적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점을 보이려고 했을 것이다. 반면 장애예술에 관심을 보인 (비장애인) 예술가들, 혹은 관객 중 상당수는 제도화된 시스템 안에서 젠 체하며 고고하게 미학을 논하던 예술가들에 대한 냉소, 다양하고 새로운 자극에 대한 호기심, 개념미술에서 축적된 새로운 미적 관심사를 장애인들의 몸이 펼치는 공연예술에 결합했을 것이다.
2019년 장애예술은 어느 때 보다 관심을 받았다. 그 기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예술지원에 대한 예산이 증대되어, 비장애인 예술가들이 장애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일이 더 편리해졌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곳에는, 도제식 공동체 안에서 고고하게 자신만의 예술론을 주장하던 저 ‘아버지’ 같은 존재들을 몰락시킨 (이윤택의 구속 등) 미투운동과, 신체에 집중하면서 거대서사가 아닌 일상의 감정, 만연한 부정의(不正義), 경이로운 순간을 포착하고자 했던 연극인들의 꿈이 놓여있을 것이다. 장애예술은 제도 외부에 있었고, 장애인들이 창작과정에 진입하는 일은 곧 정의와 관련되었으며, (양말을 신는 것과 같은) 일상의 이야기와 신체 움직임을 극의 요소로 삼았기에 현대연극들의 꿈이 접속하기에 좋았다.
더 이상 나는 ‘편협한’ 아름다움에 대한 시각으로 공연예술을 생각지 않는다. 내 몸이 아름답기를 바라면서 움직이기보다는, 무대에서 관객을 어떻게 만나는지에 조금은 집중할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장애인의 몸, 장애인의 연기가 (아직은) 예술 권력과 거리가 멀고, ‘평범한’ 어떤 삶의 면모를 드러내고자 하더라도, 여전히 거기에는 관객을 감동 시키는 어떤 위대함에 대한 기대가 숨어있지는 않을까. 고상한 연극적 이상이 무너진 자리에, 양말을 신는 장면을 무대 위에서 표현할 때조차 숭고함이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연극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지는 않은가? 숭고의 감각을 제거한 자리에서도 장애인 배우는 무대 위에 설 기회를 얻게 될까? 2020년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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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영

김원영 작가, 변호사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희망 대신 욕망>을 쓴 저자이고, ‘법무법인 덕수’에 소속된 변호사다.
연극 프릭쇼(2014년 변방연극제) 등을 기획했다. 장애예술, 그 중에서도 공연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체장애가 있어 휠체어를 탄다. 한겨레신문, 비마이너, 시사인 등에 글을 썼고 쓰고 있다.
https://www.facebook.com/DisabilityTheoryAnd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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