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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예의의 발명이 시급합니다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말

유선_인포숍 카페별꼴 매니저

제185호

2020.08.20

예의(禮儀)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자. 국어사전에서 예의를 찾아보면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예로써 나타내는 말투나 몸가짐”이라고 나온다. 존경은 또 뭘까? 다시 사전을 찾아보면 “남의 인격, 사상, 행위 따위를 받들어 공경함”이라고 한다. 국어사전의 권위에 기대고 싶지는 않지만 일단 모두가 동의한다고 전제된 사전적 정의로 이야기하자면, 예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존경을 밖으로 드러내기 위한 어떤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것은 “받들어 공경”하는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예의가 작동하는 순간은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위계가 전제된다. 여기에서 존경은 존중과 달라서, 애초에 본인과 같거나 위에 있는 것을 받드는 것이지 아래에 있던 것을 애써 본인과 같거나 높은 위치로 끌어 올려 대해‘주는’ 것이 아니다. 저를 좀 존중해주세요, 라고 말은 해도 저를 좀 존경해주세요, 라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는 것은 대다수가 생각하는 존경해야 할 대상의 기준점이 본인보다는 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스스로를 존경해 마땅한 위치에 올려놓고 그것을 ‘디폴트’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나의 경우, 그러기엔 한국 사회에서 어린 여성으로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고. 세상은 나에게 예의가 없는 편이었다. 특히 카페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는 예의 있는 사람을 만나기가 정말로 드물었다.

창문카페별꼴 창문 (출처: 카페별꼴 페이스북)
카페 밖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의 나는 사회적 자본이 그럭저럭 많은 편이고, 어디 가서 가끔 존경을 받기도 하는 사람인데 유독 카페에서 일하고 있으면 내가 가진 여러 얼굴들이 다 지워지고, 오직 ‘서비스를 제공하는 젊은 여성’으로만 남는 순간이 온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를 한 단계 낮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경험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합리한 것인데, 나도 동의하고 상대방도 동의한 그 이상한 룰 아래에서만 우리는 만난다. 명문화되어 있지 않다 뿐이지 일상적으로 내가 겪는 그 암묵적이고 일방적인 룰은 다음과 같다.

1)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
: 상대방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무시해도 된다. 은근슬쩍, 아니면 대놓고 반말을 해도 괜찮다. 눈을 마주치거나 상대방을 향해 몸을 틀어 내가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보여줄 필요가 전혀 없다. 허공을 보며 웅얼웅얼 이야기해도 상대방은 내 이야기를 잘 알아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반면 상대방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발휘해 나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2) ‘정상적’, ‘이상적’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나이, 성별, 외모, 말투, 옷차림이 너무도 중요하다. 그것에 어긋날 경우 상대방에 대해 예의를 지키라고 문제제기를 하거나 화를 내는 식으로 감정표현을 할 수 있다.

웃지 않는다고, 표정이 어둡다고, ‘반말하지 말아줄 것’을 요구했다고, 돈을 던지거나 계속 반말을 하거나 때리려고 하거나 에스프레소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칼럼이 백 장이어도 모자라니 생략한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이 이상한 룰이 당연하게 작동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 중 하나가 바로 ‘돈’이라는 것이다. 너는 여기에서 시급을 받고 있으니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차별적이고 반인권적이라 할지라도 그게 바로 네가 해야 할 일이고 네 자리라는 생각. 카페를 예로 들기는 했지만, 다른 허드렛일을 하는 누구에게라도 적용이 될 그 기준. 거기에 인간의 본성 운운하며 역사와 체제 기반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룰이 교차 적용된다. 성별, 나이, 교육 수준, 생물학적-사회적 성의 일치 여부, 성적지향, 가족관계, 인종/민족, 국정, 종교, 계급, 모국어, 신체 특징 및 신체 이미지, 장애 여부, 건강 등의 기준에 따라 나는 몇 칸 위로, 또 몇 칸 아래로 이동한다.

태어나기 전부터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어떤 색과 모양의 집에 살아야 할지,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지, 심지어 마당에 심을 수 있는 꽃의 종류까지 이미 정해져 있는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있을 것 같은 이야기지만, 지금 이 시각에도 누군가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읽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믿기지 않지만 책 한 권을 근거로, 미리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모든 생활양식과 행동을 통제하는 시스템이 있었고, 그 안에서 몇백 년 동안 사람들이 일도 하고 절도 해오며 살아왔다. 그리고 아닌 척하지만, 그 예의의 룰이 아직도 우리를 지배한다. 코로나19 재난문자가 쏟아지는 엄중한 이 시국에 전국적인 논쟁이 된 사건들을 떠올려보자. 국회에 시각장애인 안내견이 들어갈 수 있는가, 국회에서 여성 의원이 밝은색 원피스를 입어도 되는가.

일본에서 반천황제 운동을 하고 있던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시스템의 끝에 천황제가 있다고. 그래서 일본인, 여성, 페미니스트로서 스스로와 주변 모두의 해방을 위해 반천황제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일본에서 반천황제 운동은 반빈곤 운동이나 홈리스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역사를 공유한다. 전쟁 때 아시아 전역의 식민지에서 강제로 끌려와 탄광이나 댐 건설에 이용되다 버려졌으나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쪽방이나 거리에 살며 일용직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홈리스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2세, 3세로 이어진 가난과 신분의 대물림. 일본이라는 국가는 그 값싼 이주 노동력을 착취해가며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결국에 천황제라는 시스템은 ‘세상에는 그렇게 쓰고 버려도 되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암묵적인 룰과 같은 이름이다. 그리고 천황제 약간에 신자유주의 많이, 유교 적당히 섞은 그 무시무시한 생각이 아직도 우리를 지배한다. 누군가의 인격은 존경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의 인격은 존경할 필요가 없다. 특히 OO일 경우에는 더더욱 인간으로 대우해 줄 필요가 없다.

반천황제 운동을 하던 나의 친구는 이제 남반구의 먼 어느 나라로 이주해 호텔 청소와 농장 일을 한다. 반성폭력을 주제로 미술 작업을 하던 나의 친구는 한국의 스타벅스에서 커피 만드는 일을 한다. 그 둘과, 나와, 또 다른 친구들이 매일 일상에서 겪는 일들을 차곡차곡 포개본다. 우리는 지금의 세계가 어떤 모습이고 어떤 기준에 의해 굴러가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매우 잘 알고 있으며, 거기에 예의를 갖출 생각이 없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얼마나 예의가 없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바뀔 가능성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세상을 설명하기보다,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지에 대해 상상해 본다. 투쟁이란 변화가 가능하리라 전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변화를 위해 능동적으로 활동한다는 것, 유의미한 연대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일, 평범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들을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라는 오드리 로드의 말을 좋아한다. 혁명은 비둘기 걸음으로 온다는 니체의 말도 좋아한다.

우리에게 가부장제에 반대한다는 말은, 이 시스템 전체에 의문을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예의가 없던 모든 것들에 대한 물음. 아래를 향하는 예의가 가능한 세계, 지금의 예의가 산산이 부서지고 없는 세계를 원한다. 세계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누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여성들, 여성적인 것들, 여성/남성으로 구분되지 않는 것들, 허드렛일을 하는 것들, 일을 할 수 없었던 것들, 일을 하기 싫었던 것들, 존경도 존중도 받아본 일이 없던 것들, 언제나 아래에서 연대의 경험을 쌓아왔던 것들, 그리고 무엇보다 동물들, 인간 아닌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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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

유선
노들장애인야학 낮수업 교사이지만 한 번도 교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치기도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비장애인 교사의 권위에 대해 생각한다. 인포숍카페별꼴의 매니저 7인 중 1명이며, 3명으로 구성된 다이애나랩에서 33.3%의 일을 맡고 있다. 아기를 낳고 커밍아웃이 어려워진 팬섹슈얼, 비건, 고양이 추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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