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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운 것들

김지연_전시기획자

제197호

2021.03.25

"할 말이 없어." 요새 '인스타그래머블한' 곳으로 주목받는다는 한 전시장에서 젊은 작가들의 전시를 함께 둘러본 지인은 전시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의견을 재촉하자, 이들에게 실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작업을 하다가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몰라서 막힌 부분 앞에서, 깊이 고민하고 방법을 찾기보다 적당히 타협해서 얼버무린 것이 확연하고, 자신이 다루고 있는 재료를 이해하고 있는 건지, 표현하는 대상, 주제의식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고 답했다.
"요새 젊은 작가들의 작업 경향을 담은 전시라는데." 전시 안내문에 적힌 내용을 읊어주었다. 그는 '실력 없음', '고민 없음'이 트렌드일 수는 없다면서, 어쩌면 이것은 이런 작가들을 찾아 모아 전시를 만든 기획자의 잘못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얼버무렸다는 그 방식, 재료를 사용한 그 방식, 질문하는 그 방식 모두 작가의 의도는 아닐까. 이 전시가, 이 작업들이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알아보지도 못하는 새로움과 의미를 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다시 물어봤다. "새로운 게 아니라 엉성한 거야." 그래. 솔직히 말해서 그 작업들은 엉성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두려움이 있을 텐데, 최근 몇 년 간 나는 '작품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 ‘좋은’ ‘괜찮은’ ‘새로운’ ‘색다른’ ‘의미 있는’ ‘혁신적인’ ‘앞선’ ‘가치 있는’ (기타 등등) 작업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예술에 대한 나의 관점이 시대착오적이고 구태의연하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한다. 이것은 나의 가치관을 의심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두려워진다. 이런 두려움을 갖게 된 건, 내가 결코 자기 세대의 경험값과 감수성을 이해할 수 없고, 그 공통의 감수성 위에서 태어난 작품들의 진짜 메시지를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던 한 후배와 이야기한 다음부터였던 것 같다.
"앞선 세대는 절대 알 수 없어요. 이건, 이 세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에요." 작업을 판단하는 나의 눈과 선택에 별 의심을 하지 않던 그 시절 나는 후배 덕분에 작품을 읽는 일이 조심스러워졌다. 우리는 다르고 너는 노력해도 알 수 없다며, 인간이 사회 안에서 보편적인 경험의 과정을 겪으며 축적하는 추론과 공감의 능력을 불신하는 대단한 당사자성 앞에서 의기소침해졌던 것도 같다. 그래서 이제, 내가 알고 있는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잘 못 만든 것 같아서' 외면해왔던 작품도, 혹시 이것이 내가 모르는 그 '공감대'에 바탕을 둔 작업이며, 나는 모르지만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설득력과 의미를 가지고 있나 하고 더 들여다보는, 일종의 신중함, 열린 자세, 어쩌면 부작용에 치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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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재판을 받는 길릴레이 갈릴레오
새로움, 혁신, 변화, 도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부) 기성세대의 숙명(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을 생각하면, 프랑스 인상주의 시대가 떠오른다.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온전히 역사가 된 인상주의를 둘러싸고 펼쳐진 당대의 논쟁을 보면, 세상의 격변기에 전환하는 가치관, 취향, 명분, 당위성의 소용돌이 사이에서 당시 예술계 사람들이 어떻게 작품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지지하는 기준을 세웠을지 새삼스럽다. '아카데미즘으로 상징되는 기성세대의 도식화된 화법과 고상한 주제를 거부하던 신진미술가들이 펼친 실험적 화풍'이라고 미술사적으로 정리한 그들의 활동은 이제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역사가 되었고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 대부분의 기성세대는 어두운 눈 덕분에 악명을 남겼거나, 잊혀졌다.
그러나 역시 노력해도 안 되는 건지. 앞서 언급한 요소들 외에도, 역사가 될지도 모르는 신진작가들이 던지는 질문, 작업 전개 방식, 펼쳐 놓은 작품이 서로 너무 비슷해 보이는 현상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작품이 모두 달라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무한 참조하는 것처럼 닮아가는 현실이 과연 괜찮은 일인지 모르겠다. 패션디자이너와 건축가가 같은 프로그램을 쓰기 때문에 비슷해진다는 이야기처럼, 이들을 둘러싼 기술 환경이 동일하기 때문에 서로 닮아버리는 것인가. 예술에서 ‘다름’은 꽤 중요한 가치를 지녀왔지만, 더 이상 새로울 것도, 다를 것도 없는 시대에 ‘다름’은 유효성을 상실한 것인가. 혹시, 틀림없이 다르지만 내 눈에만 비슷해 보이는 것인가.
17세기, 회화에서 중요한 것이 선이라고 주장하던 ‘푸생 파’와 색이라고 주장하던 ‘루벤스 파’ 사이의 역사를 뛰어넘는 논쟁은 미술사에서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다. 선과 색 가운데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조형요소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는 얼핏 예술작품의 조형성을 고민하는 예술 내적 이슈처럼 보이지만, 실제 이 논쟁은 회화 내부의 세계에 머물지 않는다. 승리한 자의 관점은 위대한 예술을 계승할 후학을 양성하는 ‘교본’이 되어 절대원칙으로 계승될 가능성이 높았다. 누구의 관점이 우월하냐를 놓고 추종자들은 갈등했고, 사람들은 그 우선순위를 바탕에 두고 화가 간 서열체계를 만들어 퍼뜨리면서 더 높은 곳을 차지하기 위해 다퉜다. ‘논쟁’의 이름으로 예술의 가치를 판단하는 일은, 예술 외부 세계와 연결되어 ‘권력’으로 작동했다. 시간이 더 흘러, 추상회화가 등장한 이후 회화에서 색과 선 논쟁은 동시대성을 상실했지만, 그 논쟁의 자리는 이슈만 달라질 뿐 ‘왕좌’처럼 이어져 왔다. 논쟁은 늘 환영할 일이지만, 논쟁의 목적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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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김지연 d/p 디렉터, 전시기획, 미술비평
김지연은 국문학, 미술사,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정신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 최근에는 전시 형식이 비물질적인 요소들을 가시화하는 전략을 살피는 중이다. 가나아트센터, 학고재갤러리 기획자로 일했고, 세계문자심포지아, 제주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저서로는 <예술가들의 대화> 등이 있다. 현재는 1인 기획사이자 출판사인 소환사와 전시공간 d/p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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