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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018년, 2020년 참사의 순간들, 죽음의 기억들

변재원_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

제198호

2021.04.15

2014년 4월 16일의 장면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오전 8시 50분경,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면 해상에 아주 큰 여객선이 사고에 의해 침몰하고 있다는 뉴스 말이다. 당시 나는 대학 3학년이었고, 오후 수업을 들으러 가기 전,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라면 그릇을 껴안은 채로 응시한 TV 너머에서는 세월호가 과연 침몰하는 것이 맞나 싶을 만큼 별문제 없어 보였다. 이전까지 배가 침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나로서는 저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 것인지 아무런 이해조차 할 수 없었다. 해상에서 꼼짝 않는 배를 생중계로 한참을 쳐다보던 중, 앵커가 이어서 소식을 전했다. 그는 세월호 탑승객 전원이 구조되었다고 발표했다. “다행이다. 그렇구나" 생각하고 상황을 종료했다. 라면 그릇을 물에 잠가둔 채로 학교로 향했다. 전원 구조 소식을 끝으로 뉴스를 응시하지 않아도 되겠거니 싶어 TV를 끄고 공연을 준비하러 학교엘 갔다.
침몰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는 배 한 척을 응시하다가, 앵커의 전원 구출 소식을 끝으로 안도한 채 라면 그릇을 비우고 학교로 가는 모습. 7년이 흐른 지금 당시의 모습을 회고하면서도, 사고 장면에서 당장 느낀 것이 없기에,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기에 덧붙일 말이 없다.
비통도 원통도 다급함도 느끼지 않았던 당시 목격 장면에 대해, 7년이 지난 지금 스스로 던지는 질문은 존재한다. 나는 왜 세월호 침몰을 급박하다 느끼지 못했던 걸까. 커다란 배가 그렇게 쉽게 침몰하겠나 싶었던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을까, 뉴스 앵커가 별 탈 없이 전원 구조되었다며 재난 상황 종료 소식을 일찍이 전했기 때문일까,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을 거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일까, 혹시 내 일을 제외한 타인의 삶에 진심을 다해 공감하지 못했던 걸까. 어떻게 나는 당시의 476명의 세월호 승객들, 그중 다수가 97년생인 단원고 학생들이 진도 앞바다에서 사라졌을 때 별생각 없이 (어쩌면 낙관적으로) 바라만 보다가 학교로 향했는지. 어떻게 나는 그들의 삶을 어떻게 내 삶 바깥의 존재로 여기고, 거리 두고, 타자화 했는지. 머지않아 구출되겠거니 싶다가, 전원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다행이다, 한마디를 남긴 채 잊고 말았는지. 지금의 나는 7년 전의 나를 잔인하게 기억하고 있다.
세월호 추모
그로부터 4년 뒤. 2018년 12월. 추운 겨울에 나는 또 다른 참사를 경험했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새벽 라디오 뉴스를 청취하며 회사로 출근하던 길이었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재직 중인 94년생 노동자, 김용균 님이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숨졌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추위를 뚫고 출근하던 중, 산업재해 소식을 듣고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노동자가 현장에서 사망했구나. 단신 뉴스로 들려온 소식만으로는 죽음의 정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내가 살고자 출근하는 길에 누군가는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교차적 순간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답답한 마음을 안은 채로 운전하던 사이 사당, 반포, 서초, 강남을 지나 역삼 테헤란로에 자동차가 이르렀다. 회사 주차장으로 진입하려던 순간, 추운 날 새벽 밖에 서 있는 주차 안내요원이 내 자동차를 향해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이 세상은 정말 미쳤다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화력발전소에서 스러져간 청년 노동자 소식을 들은 채, 오늘을 사는 이들은 타인의 자동차에 허리 깊이 숙여 인사하는 삶을 그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대체 무엇을 향한 존중의 인사이고, 무엇을 위한 악착같은 삶인가. 애초 나는 무슨 자격으로, 새벽 추위에 떨고 있는 주차 안내요원의 인사까지 받는가. 왜 나는 따뜻한 사무실로 들어가고, 저 이는 컴컴한 주차장 자리를 지킨 채 온종일 모든 자동차를 향해 허리 숙여야만 하는가. 질문이 맴돌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나 자신에게만 주어진 안전의 특권과 존중의 위선적 무게를 역겨워하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직장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3년 전의 나를 안쓰럽게 기억하고 있다.
또 2년 뒤. 2020년 5월 햇빛이 내리비치는 어느 봄날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광주의 94년생 노동자, 김재순 님이었다. 폐목재 처리 공장에서 일하는 그는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고, 보안요원도 없고, 동료 노동자도 없는 곳에서 위험천만한 업무를 지속하다 파쇄기 위에서 스러졌다. 김재순 님은 2년 전 출근길에 접했던 김용균 님과 동갑이었다.
그새 나는 아스팔트 위의 인권 운동가가 되어 있었다. 업무 중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했던 것은 똑같았지만, 더 안쓰럽고 슬프게 기억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집회하고, 사십구재를 지냈다. 어느 기자회견에서인가, 사람이 일하다 죽어서는 안 된다고 외치다가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김용균 노동자의 어머니 김미숙 님이었다. 그도 나와 나란히 서서 ‘사람이 일하다 죽어서는 안 된다'고 소리쳤다.
그가 김용균재단 이사장이라는 소개를 듣자마자 나의 지나온 과거가 떠올랐다. 그가 김용균의 어머니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기자회견을 마친 뒤 나는 만난 적 없던 그를 안았고,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당신의 아드님이 사망하는 그 뉴스를 들으며, 몇 해 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출근했고, 주차 안내요원은 내 자동차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고. 사람이 기계를 모시는 꼴을 보고서도 아무 말도 못 했다고. 엉엉 울며 얘기했다. 처음 만난 그 또한 나의 얘기를 듣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 또한 내게 엉엉 울며 괜찮다고, 같이 가자고 대답해주었다. 내 어깨가 낯선 사람의 눈물로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다.
대수롭지 않게 뉴스로 지켜보고 말았던, 참사의 현장을 마주하기까지, 7년의 삶을 돌고 돌아 이제야 도착했다. 90년대 생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내내, 나는 대학생이었고, 직장인이었고, 활동가로서 살아왔다. 어떤 죽음 앞에서는 차마 황망함의 무게조차 느끼지 못했고, 어떤 죽음 앞에서는 세상을 역겨워했으며, 어떤 죽음 앞에서는 도리어 결연해졌다. 세월호 7주기를 보면, 세월호 참사의 날만 떠오르는 게 아니라, 내 기억을 지배하는 세 죽음과 그 순간의 단상들이 나를 지배한다.
앞으로 맞이할 죽음과 참사의 순간들이 두려우면서도, 더 이상 죽음을 감상적으로 맞이하지 않겠다. 가장 차별당하는 사람들이 가장 죽는 현실에 저항하겠다고, 김미숙 님의 말 따라 늘 같이 가겠다고 글을 쓰는 내내 몇 번을 중얼거리며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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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재원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활동하는 초보 활동가. 투쟁의 현장에서는 활동가들에게 먹물 같다고, 인터뷰 현장에서는 시민들에게 말이 험하다고 놀림당하기 일쑤. 뒤틀린 몸과 말을 끝까지 지키는 활동가가 되기를 소박한 목표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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