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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태어나는 순간

유선

제199호

2021.04.29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 말을 꺼내기 힘들지만,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2021년 상반기에 우리를 덮친 많은 부고에 대하여. 코로나 상황 속에서 코로나와 직접적인 관련 없는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 또 사라지고, 또 사라지고, 또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 나는 몇 년 전에 갔던 한 장례식을 떠올린다.
2018년이었던 것 같다. 한밤중에 도착한 장례식장에는 제단에 사진도 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장례식장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조금 놀랐었다. 조문객에게 차려놓은 음식도 없었고, 심지어 장례식장마다 상에 깔아놓는 하얀 테이블보도 없어서 코팅이 벗겨진 상이 그대로 덩그러니 있었다. 고인은 내가 일하던 카페에 몇 번 온 적이 있는 손님이었다. 후에 알았지만 그는 탈학교, 탈가정 청소년이었고,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페미니스트, 채식주의자, 장애인, 빈곤인으로 스스로를 정체화 했다고 했다. 내가 만났던 그는 그냥 핑크색 립스틱이 잘 어울리고, 카페에 성중립 화장실이 있는 것을 너무도 기뻐했던 손님이었다.1) 텅 빈 제단에 누군가 하나씩 가져온 꽃바구니와 꽃이 놓이면서, 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어디선가 수녀님들이 와서 노래를 불러주셨던 것 같기도 하고, 그제서야 가족들은 음식을 시키고 조문객들에게 자식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듣고 싶어 했다.
카페에서 일하는 동안, 그곳을 드나들었던 몇 명의 죽음을 마주했는지는 헤아리기가 힘들다. 어느 순간에 카페에 대한 기억은 ‘그때 상영회에 오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분이, 혼자 집에서 맹장염으로 돌아가셨었지’, ‘어느 날 갑자기 간암 말기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었지’, ‘한동안 안보이시더니...’, ‘응급실에 가던 길에...’ 같은 기억과 뒤엉켜있다. 누군가를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감각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실제로 아파오는 것이다. 나는 코로나 이후, 장애가 있는 내 주위 사람들이 갑자기 아프지는 않은지 너무 걱정이 된다. 언젠가 봤던, 하얀 가슴에 선명하게 남은 심장 수술 흉터 같은 것이 떠오른다. 그리고 절대로 보이지 않는 상처를 가진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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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의 조각들 웹사이트. 참여자의 이름이 적힌 조각들이 각자 다른 모양과 크기로 잘 들어맞지 않게 모여있는 모습.
도처에 죽음이 널려있는 세계에서 대체 뭘 해야 헤어나올 수 있을지, 이 슬픔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너무 골몰하지 않으려 한다. 그냥 사람들과 이렇게 살아서 짧게나마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를 생각한다. 얼마 전 읽은 서간집에서 죽음을 앞둔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갑자기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뭘 하면 좋을까요.”
“그렇지만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찾아옵니다. 갑작스레 찾아오는 경우도 있지요. 죽음이 다가오지 않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모두들 언젠가는 죽을 게 확실한데, ‘약속’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약속으로 죽음의 가능성을 은폐하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약속이란 죽음의 가능성과 무책임함을 모두 끌어안고 본래는 할 수 없는 ‘결정적 태도’를 ‘그럼에도’ 취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무모한 모험, 또는 도박을 눈앞의 상대에게 ‘지금’ 표명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당신이 있기에 비로소 약속이라는 도박을 감행하고, 될지 안 될지 모를 일을 실현해내기 위해 모험에 나선다. 당신이 있기에 마음먹는 ‘지금’의 결단이야말로 ‘약속’의 요점이겠습니다.”2)
아주 오래 전에 열린 어느 추모 집회를 떠올린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그림자처럼 각자 모였다 조용히 흩어졌다. 나는 직접 알지 못하는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혼자 거기에 갔었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원하던 것은 단 하나, 더 이상 아무도 죽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죽음이 너무도 흔한 세계에서, 죽어서는 안된다는 불가능한 말을 서로에게 아직 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나는 그때 스쳐 지나갔던 익명의 사람들과 함께, 나의 친구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끝도 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서로에게 약속의 말을 건넨다. 심지어 그것이 음성언어가 아닐 때에도, 우리는 서로 알고 있다. 죽어서는 안된다는 말. 홀로 죽기 위한 순간 같은 건 없다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언젠가 누군가 나에게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또 다른 약속을 한다. 그것은 00년을 인내하면 한 번에 갑자기 찾아올 해방 같은 것이 아니라, 당장 가능한 어떤 것.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바닷가에 사는 돌고래에게 죽지 말라고 이야기하기 위해 당장 무언가를 해보는 것. 약속이 언제나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해보는 것. 우연이 겹쳐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것,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놀랍고도 아름다운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모든 일은 죽어가는 존재로서 서로에게 이웃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것. 자신의 집을 열어 누군가를 초대하고, 초대받은 이가 다시 자신의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것.
그래서 나의 친구들은 2021년에 지금 당장, 서울과 제주에서 좀 이상하지만 아름다운 걸 만들어보기로 했다. 잠시 ‘우리’로 묶인 이들의 반짝이는 조각들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환대의 조각들 (https://fragments1444.ink/)
오는 5월 1일에는 이 중 네 명이 <초대의 감각>이라는 전시를 연다. 이 글은 전시장에 실제 방문을 해달라는 권유가 아니라, 우리가 이런 말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고 계속 해서 하고 있다는 것의 기록이다.
몇 번이라도 인용하고 싶은 블랑쇼의 너무도 아름다운 문장을 덧붙인다.
“우리는 홀로 죽지 않는다. 만일 죽어가는 자의 이웃이 된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진정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하찮기는 하지만 역할을 나누기 위해서, 죽어가면서 현재 죽을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부딪힌 자를 내리막길에서 붙들기 위해서이다. 가장 부드러운 금지의 명령으로. 지금 죽으면 안 돼. 죽기 위한 지금이 있을 수 없다는 것. ‘안 돼,’ 최후의 말, 탄식이 되어버린 금지의 명령, 더듬거리는 부정의 말. 안 돼-너는 죽을 거야?”3)
  1. 그를 추모하며 남은 사람들이 만든 ‘케이시-느루-모모의 친구들’이라는 모임이 있다.
    https://www.instagram.com/rememberze0919
  2. 미야노 마키코, 이소노 마호,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다다서재 2021
  3. 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문학과 지성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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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

유선
노들장애인야학 낮수업 교사이지만 한 번도 교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치기도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비장애인 교사의 권위에 대해 생각한다. 인포숍카페별꼴의 매니저 7인 중 1명이며, 3명으로 구성된 다이애나랩에서 33.3%의 일을 맡고 있다. 아기를 낳고 커밍아웃이 어려워진 팬섹슈얼, 비건, 고양이 추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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