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청소년의 공간

정지원_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제200호

2021.05.13

"수어통역 영상보기"
(촬영/편집 : 김지성, 녹음 : 윤비원, 음향 믹싱 : 임나윤)
음성낭독_박진현
음성낭독_박은호
몇 해 전부터 우리 사회 곳곳에 ‘노 키즈존’ 이라는 표시를 한 공간들이 늘어나면서 아동과 돌봄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걱정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동과 청소년이라는 특정 집단의 출입을 금지하는 공간은 우리 사회에 오랜 시간 존재해왔고, 여전히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스터디카페나 독서실, 도서관의 문을 열다 보면 우리는 종종 ‘초등학생 출입금지’나 ‘중학생 출입금지’와 같은 문구를 마주친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지만, 아동과 청소년의 출입을 금지하는 독서실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았다는 불만은 끊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동과 청소년만을 금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을 둘러싼 편견과 그들이 통제하기 쉽다는 약자성 때문은 아닐까?
숙박업소에서도 청소년은 ‘미성년자 출입금지’라는 이름으로 쉽게 통제 당한다. 작년 겨울 친구가 집을 나왔던 날을 기억한다. 찜질방, 피시방, 만화방, 룸카페 등 대부분의 장소에서 10시 이후에 청소년에게 주민등록증 검사를 요구했기 때문에, 영하의 온도에 새벽까지 잘 곳을 찾아다녀야 했다. 우리는 한 지역의 숙박업소에서 모두 거절을 당해 택시를 타고 숙박업소가 모여 있는 지역을 돌아다녔다. 청소년은 밤에 돌아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서에 임의 동행되는 경우도 있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도 불안했다. 다섯 시간 만에 민증이 없는 우리를 받아준 숙박업소 주인은 다음에는 민증을 꼭 가져오라며, 우리에게 인터넷에 나와 있는 가격의 두 배를 받았다. 방은 아주 작고, 낡고, 더러웠다. 욕조에는 곰팡이가 피어있었고, 정수기의 물은 더러워서 마실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주인이 우리를 거리로 내보낼까 봐 방을 바꿔 달라고 할 수 없었다.
집을 나왔을 때 갈 수 없는 것은 경찰서와 쉼터도 마찬가지다. 탈(脫)가정 청소년을 위한 쉼터는 긴 대기 기간으로 당장 이용할 수 없고, 청소년의 의사와 관계없이 친권자인 부모에게 연락이 되는 경우도 있다. 경찰은 보호를 이유로 해당 청소년을 가정에 돌려보내거나, 위치를 부모에게 알리기도 해서 가정폭력을 겪고 있는 청소년이 도움을 받기 힘들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통제는 청소년의 선택지를 좁히고, 그들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학교 밖의 많은 공간은 비(非)청소년을 기준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사회는 청소년 노동자를 잘 상상하지 못한다. 많은 아르바이트 공고의 모집 연령은 20세부터 시작한다. 연령 제한이 없는 아르바이트의 경우에도 친권자인 부모의 동의 없이는 할 수 없다. 경제적인 권리를 청소년 본인이 아닌, 친권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의 경제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것은 청소년이 원하는 공간을 이용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청소년의 행동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친권자의 동의가 없을 때, 청소년은 필요한 의료 시설을 이용하는 것도 힘들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음에도 많은 병원과 상담 기관에서는 청소년이 혼자 정신과에 방문해 상담을 받거나, 약을 처방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성의학과(산부인과)에서도 혼자 온 청소년을 거절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이유는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이 ‘보호’와 직업윤리는 많은 청소년들이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외에도 부모 동행이 없는 경우의 피해 신고를 위한 경찰서 방문, 주거 공간 계약 등 사실상 청소년에게 허용되지 않는 공간들은 많다.
본문이미지1
청소년 공유공간 아지트틴스 모습(성북구 정릉 소재)
공간은 단순히 몸이 머무르는 곳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어떤 공간에 머무르는지는 내가 어떤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지 아주 긴밀하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관계로부터 벗어나는 일과 자신을 지지해주는 공동체를 찾아가는 일은 모두 공간에 대한 선택권을 필요로 한다. 그런 면에서, 청소년이 공간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공동체를 선택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성년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해가 바뀌며 비청소년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어린 사람으로 대우받기 때문에, 비청소년이 되었다는 사실은 아직 낯설다. 많은 순간에 나는 ‘학생’이라 불리고, 나의 활동과 말하기는 미성숙한 한때의 치기로 여겨진다. 또,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가정은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공간이 아니며 모두가 공동체에서 지지받거나 경제적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비청소년이 된 이후에도 우리의 공간은 여전히 안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비청소년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는 몇 안 되는 순간은 청소년이던 나에게 ‘불법’이던 일이 ‘합법’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청소년이었던 내가 애써도 누릴 수 없던 공간과 권리들이 비청소년이 된 이후 한순간에 주어진 것은 어색하고 또 씁쓸하다. 내가 바랐던 것은 시간이 지나 비청소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인 현재에도 안전한 공간을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여전히 나의 많은 친구와 동료들은 청소년이고, 어리다. 더 많은 이들이 안전한 공동체와 공간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청소년 동료들이 비청소년이 되어서가 아닌, 청소년인 지금 자신이 원하는 공간과 공동체를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정지원

정지원
반가워요,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의 말하기를 함께하고 있는 지원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에 진솔해지고 싶습니다.
jxxp13@naver.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