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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아무도 관심 없는 농성장이 되어

변재원_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

제202호

2021.06.10

더운 여름, 사무실 창고에 놓인 두 개의 선풍기를 새로 옮겨 심고 기존의 온풍기를 치울 겸 농성장에 일찍이 왔다. 나는 지금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출구 앞 농성장 내 간의 의자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농성장은 모두의 일상에서 익숙한 공간은 아니다. 대체로 세상 사람들이 인식하는 농성장은 적잖은 경우 더럽고, 불결하며, 운동의 권위를 상징하고, 무시무시한 폭력성을 전시하는 흉물이다. 그러나 활동가로서 내가 인식하는 농성장은 다르다. 시대적 상황과 격랑의 포화를 뚫고 모두의 염원이 담긴 채 굳건히 설치된 커다란 상징적 텐트다. 그것이 노란색일 때도 있고, 파란색일 때도 있고, 하얀색 일 때도 있고, 검은색 일 때도 있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농성장의 외피는 결국 모두를 품는 커다란 텐트라는 것이다.
오늘 나는 농성장 지킴이이다. 나라는 존재는 오늘 하루 농성장을 위해 존재한다. 농성장의 일부가 되어 공간과 함께 호흡한다. 농성장 주변에서 나는 어떠한 행위든 다 할 수 있다. 적막만 흐르는 이 공간에서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이 곳에 존재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심지어는 이 곳에 있으면서 잠깐 동안 자리를 비울 수도 있다. 농성장의 일부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을 만큼의 시간만 떠나 있을 수 있다. 사회적으로는 농성장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들켜 기습 철거되지 않을 정도의 딱 그 시간만큼 자리를 비울 수 있다.
나는 농성장과 함께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농성 공간의 외피를 담당하는 이 커다란 텐트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물품들이 나와 함께 나란히 놓여 있다. 당장 내 눈앞에는 간이용 책상과 의자, 그리고 체온계와 방문일지가 놓여있다. 세상 사람들이 인식하는 농성장은 흔할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묘사되건만, 내가 마주한 농성장의 실재는 허전하고 소박하다.
농성장을 지키는 게 일상이 되고 나면, 더 이상의 스릴감은 없다. 누군가 쳐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없고, 너무나 일상적이게 된 나머지 몸과 마음이 한껏 나른해진다. 그럴 때면 긴장을 놓지 않기 위해 스스로 농성장이 되었다고 상상하면서 농성장 바깥 세상을 낯설게 감각한다. 농성장 주변을 둘러싼 바깥은 지금 시끌벅적하다. 출근길 직장인들이 지하철역을 나와 인근 건물로 드나든다. 청테이프를 칭칭 감아도 여전히 달그닥 거리는 포장마차식 간이의자에 앉아 커다란 텐트 안에서 이들을 위태롭게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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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간 농성장이 되어 농성장에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사물로 인식되고 호기심이 솟구친다. 인간적인 수준에서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 싶은 생각이나 사태에 대한 분노가 일기보다는... 그냥 농성장이 되어 존재하는 나를 눈앞에 두고, 쉴 새 없이 오가는 수십 명의 인간 객체들이 어찌나 하나같이 나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한 채, 정해진 경로로 향할 수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나는 분명 요란스럽고 커다란 공간과 함께하는 특이한 사람인데, 어떻게 나와 농성장은 투명 망토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로 있을 수 있는 걸까. 커다랗고 샛노란 농성장에 투명인간처럼 앉아, 농성장이라는 공간을 거리 두어 생각한다.
비록 지금은 혼자 지키고 있지만, 전국의 농성장은 시민이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수단이자, 집단의사결정을 돕기 위한 정치적 공간이자 구성물로서 역할 한다. 활동가로서 내가 지키고 있는 농성장은 과거 예술학교를 다니던 시절 경험했던 무대와 같이 다수의 합의를 거쳐 만들어진다. 마치 연극 주제에 따라 무대가 디자인되고 구성되듯, 농성장은 인권 사안에 따라 규모가 정해지고, 설치 장소와 모습 등이 정해진다. 연극을 전공할 당시 내가 움직였던 모든 무대는 전 구성원이 함께 만들어갔다. 프로덕션 구성원끼리 모여 밤새 토론하고 끊임없이 논쟁한 끝에 일정한 합의를 거쳐 무대의 모습을 정하고, 그러다 바꾸고 또 바꿔 나갔다. 어디에 설치할 것이냐 부터 시작해서,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몇 명이 전담하여 얼마만큼의 노력을 쏟아부을 것인지, 어떻게 꾸미고, 얼마나 유지할 것인지를 모두 상의하고 결정한 끝에 매번 무대를 만들 수 있었다. 모두가 모두의 연극 무대를 함께 만들었다.
농성장도 마찬가지이다. 힘센 활동가 몇 명이 농성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함께 만들어간다. 무대가 그러하듯이 농성장도 끊임없는 격론 속에서 완성되었다. 어디에 설치할 것인지, 무엇을 넣을 것인지, 몇 명을 투입해서 어떻게 꾸미고 얼마나 유지할 것인지 정해진 답이 없는 채로 매일 수정해나갔다. 공간이 구성되는 동안 다 먹은 컵라면과 찌그러진 생수가 수북하게 쌓여나간다는 점까지 세세하게 닮았다.
모두의 힘으로 설치한 농성장에는 마치 연극 무대에 온기가 스며들 듯 생명력이 부여된다. 같은 사회문제를 인식하는 활동가들이 모여 번갈아 가며 농성장의 일부가 되고, 시끌벅적해진다. 무엇보다도 농성장이 구성됨으로써 세상에 드러나지 않던 모습들이 저마다의 형체를 내비친다. 커다란 농성장의 일부로 존재하는 활동가들은 자기를 감싸는 커다란 몸과 함께 새롭게 세상을 감각한다. 혼자였다면 느끼지 못했을 세상의 아픔을 감각하고, 공감과 이타심을 체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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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에게 무대가 예술적 신체에 최적화된 연장이듯, 활동가에게 농성장은 사회적 신체에 최적화된 연장과 같다. 특히 장애인 활동가들은 자기 몸을 가누기도 힘듦에도, 농성장이라는 연장된 신체를 활용하여 ‘장애인탈시설지원법’과 장애인권제도 변화와 같은 목소리를 끝없이 표출한다. 겉보기에, 불법적으로 무단 점유한 농성장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 같지만, 실제 농성장은 목소리도 몫도 없는 이들이 불합리한 세상 밖을 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소박한 공간이다.
온기가 스며든 농성장에 앉아 농성장 바깥을 다시 바라본다. 국회를 마주한 여의도 농성장에서 기약 없는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을 외치며,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를 절박하게 요구하면서, 우리를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지나가는 이들의 얼굴을 마치 배우가 관객의 표정을 살피듯, 나 역시 한 사람 한 사람을 응시하면서 관심을 요구한다.
찾아올 손님 한 명 없을 것을 알면서도, 더 이상 외롭지 않고 싶어, 텐트 밖에 있는 이들을 농성장에 초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는 상상을 한다. 그럴 수 없을 걸 알기에, 더운 여름 농성장에 가만히 앉아 나 홀로 농성장의 존재를 기록했다. 나는 세상에 관심 없는 어느 농성장이 된 채로 무덤덤한 당신께 낯선 인사를 건넨다. 당신 삶에 깊숙하고 나란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세상 아무도 관심 없는 농성장인 나를 바라봐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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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재원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활동하는 초보 활동가. 투쟁의 현장에서는 활동가들에게 먹물 같다고, 인터뷰 현장에서는 시민들에게 말이 험하다고 놀림당하기 일쑤. 뒤틀린 몸과 말을 끝까지 지키는 활동가가 되기를 소박한 목표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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