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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비안의 페미들

백래시의 시대에 맞서 싸우는 청소년 페미니스트들

양지혜_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제204호

2021.07.15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가장 불편하고 예민하게 차별과 폭력에 대해 인지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로 사는 것은 차별과 폭력에 덤덤해지는 일이기도 했다.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며 활동하자, 각종 커뮤니티에 내가 출연한 컨텐츠가 짜깁기 되어 게시되었다. 외모 비하, 페미니즘 혐오 등 다양한 차별 발언이 댓글 창에 오갔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매장에서 “혹시 페미니스트세요?”라는 의문 섞인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페미니스트는 차별과 폭력에 문제제기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차별과 폭력을 견디며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위티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았다. 페미니즘 스티커를 학교 사물함에 붙였다가 남학생들의 공격을 경험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교사의 차별발언에 문제를 제기하고 수업 시간 내내 혼자 선생님과 논쟁하다가, ‘유난스러운 애’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도 있었다. 단체에서 대안적 성교육을 함께 준비하다가 학교에서 징계를 받을 위기에 처한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그럼에도 학교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심지어는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도 문제제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일상 속의 차별과 폭력에 나름대로 ‘덤덤’해질 때마다, 위티의 동료들을 만나는 건 큰 힘이 되었다. 내가 겪었으면 삼키고 지났을 일들을 동료가 겪었다고 말하니 참기 어려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함께 화냈고, 나 역시 삼키고 지나간 많은 경험들을 이야기했다. 동료들과의 이야기에서 힘을 받아, 나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 달린 혐오, 모욕, 차별발언들을 고소했다. 경찰서에서 진술을 하고 나오는 길에, 나는 내가 경험한 모든 일들이 나 스스로의 모욕감 때문이 아니라 ‘혐오 발언이자 차별 발언이어서’ 처벌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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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9일, 위티는 동교동문화공간JU(이하 ‘JU’)에 대관을 신청했으나, ‘페미니스트 단체’를 받지 않는 ‘내부 지침’이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6월 22일, 위티는 이러한 내부 지침을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혐오와 백래시로 고발하며 JU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위티의 성명 발표 이후, JU는 “말 실수로 페미니즘 단체라고 한 적은 있지만, 처음부터 페미니스트 단체여서 안되는 것처럼 응대하지는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나아가, 위티와의 면담 과정에서 위티가 “페미니스트 단체라서 안 돼요?”라고 먼저 질문하였으며 담당자는 당황해서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렇듯 위티의 피해 고발을 부정하고 법적인 책임을 묻는 JU의 태도 때문에 사건 초기 위티 활동가의 입장은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JU는 위티의 통화 녹취록을 전달받고 난 뒤에야 잘못을 시인했다. 그러나 동시에 ‘가톨릭의 이념 상 일부 대관이 거절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이번 사례가 아니더라도 페미니즘 및 퀴어 활동을 목적으로 한 대관이 불허될 가능성을 남겼다. 나아가, 위티가 요구한 차별 금지 지침에 대해서도 “가톨릭 조직 전체의 승인을 필요로 하”기에 관장 개인의 권한으로 시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JU가 발표한 사과문에도 기관 및 담당자 차원의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 성평등 인식의 부족은 제대로 언급되지 않고, ‘미흡한 대처’로 뭉뚱그려졌다.
JU의 장원석 관장은 위티와의 면담 내내 ‘오해를 풀고 함께 가자’는 말을 계속하며 적극적 대화를 할 의지가 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러나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싶다는 위티의 이야기에는 “그런 대화는 할 수 없다”고만 답했다. 우리는 ‘미흡한 대처’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것이 아니었다. 위티가 요구했던 것은 기관과 종교계 전반의 성평등 의식에 대한 재고였다. 또한 페미니즘에 대한 사상 검증과 공격이 이어지는 최근의 사회 흐름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공간에서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만으로 사상 검증과 추방을 경험했다. 학교에서는 “너 페미/메갈이냐?”는 질문이 낙인처럼 이어졌고, 학내 페미니즘 동아리와 그 구성원들은 온/오프라인 상의 괴롭힘을 감내해야 했다. 지난 5월에는 ‘페미니스트 교사가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는 학생이 따돌림을 당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청와대 청원이 20만 명을 돌파했다. 실제로는 학생이 주변의 시선을 우려하여 생활기록부에 페미니즘 도서를 기재하는 것을 망설이는 등 전혀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가 허다한데도,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혐오가 무분별하게 확산되고 있다.
최근 동아제약 채용 면접에서 여성 면접자에게만 “여자라서 군대를 가지 않았으니 남자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 와 같이 사상을 검증하는 질문을 했다는 내용의 성차별이 폭로되었다. 페미니스트 단체를 배제하는 내부 지침은 사상을 검증하고 탄압한다는 점에서 동아제약의 채용 성차별과 다르지 않은 처사다. 또한 지난 몇 달 간, 국방부, 경찰청, GS25 등 공기관과 대기업들이 ‘집게 손’ 모양을 홍보 이미지에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남혐 논란’에 휩싸였다. 손가락 모양만을 근거로 삼은 억지 주장에 공공기관과 대기업이 빠르게 사과와 담당자 징계 조치를 진행한 상황은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페미니즘에 대한 몰이해와 억압을 잘 보여준다. JU의 내부 지침도 최근 이러한 현상과 맞물려 ‘남성혐오’로 오해받지 않으려는 대처일 수 있다. 그러나 남성혐오라는 존재하지 않는 현상을 맹신하고, 페미니즘 자체를 ‘남성혐오’와 등치시키는 JU의 내부 지침은 단순한 무지가 아닌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자 억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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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결국 JU의 반쪽 짜리 사과문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패배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티의 동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이와 비슷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을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JU에 비슷한 사유로 거절을 당했던 시민 단체들, 각자의 일상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동료 시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위티가 사건을 대응하는 과정이 다른 동료들에게도 부당한 것을 말해도 괜찮음을, 지지를 받으며 함께 싸워나갈 수 있음을, 미흡하나마 조금씩 사회를 진전시키는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었길 바란다.
또한 차별에 문제제기하는 것이 보다 당연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여전히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는 데에 너무 많은 용기가 드는 세상이다. 나는 이번 사건을, 위축되고 긴장한 마음으로 운영실에 항의 서한을 전달했던 시간, 녹취록이 없다는 이유로 자명하게 경험했던 사실에 대한 왜곡과 부정을 경험했던 시간, JU와의 면담에서 일방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기관 측의 태도에 지쳤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위티가 아니라 혼자 경험한 일이었다면 이만큼 대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다시 차별과 폭력에 ‘덤덤’해지는 연습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차별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순간, 나도, 당신도 혼자 남겨지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내게는 사건 대응 과정과 맞물리며 이어졌던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 큰 위로가 되었다.
사건 대응을 마무리하고 여느 때와 비슷하게 위티의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기 시작한다. 위티는 여름을 맞아 ‘캐리비안의 페미들’이라는 캠프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파도가 몰아치는 험준한 항해 속에서도,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서로를 만나고 확인하는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솟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함께이기에 두렵지 않은 청소년인권활동가이자 페미니스트로의 항해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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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혜_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양지혜_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불안하고 따뜻한 노랑을 좋아해요. 성녀와 추녀의 이분법을 거부하며, 페미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입시경쟁을 거부하며, 대학을 가지 않은 청년이 되었습니다. 스쿨미투 운동에 연대하며 스쿨미투 집회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프로젝트 <스쿨미투, UN에 가다>를 기획했습니다. 우리의 말하기가 계속되도록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를 함께 만들고 있습니다. (wetee.k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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