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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나길 원하며, 움직이기 위하여

변재원

제206호

2021.09.30

인권운동은 종합예술이다. 예술학교를 졸업한 나 자신이 현재 수행 중인 인권운동을 과거 전공과 일치시키고자 정당화하는 표현이 아니라, 예술과는 무관한 어느 오래된 활동가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멋진 표현이고 공감할 수 있는 분명한 명제이다. 개인적으로는 다소간 위로가 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연극학 전공을 하고 나서, 극장과는 거리가 먼 거리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에 의구심을 가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동료들이 넷플릭스에 출연하거나, 각종 TV쇼에서 각광받는 배우, 연출가, 기획자 등으로 소개되는 모습을 볼 때면, 그들의 예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인정받는 것만 같은데, 나의 예술은 나에 의해 버려진 게 아닌가 생각에 잠길 때도 있다. 그러던 중, 현재 인권운동을 하는 나 자신이 여전히 거리에서 종합예술을 실천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면, 나와 같이 스스로 소외를 택한 예술가에게 분명한 위로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어떤 의미로 인권운동을 종합예술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일까? 구체적인 비교를 위해서는 당장 “(인권)운동이란 무엇인가”와 “(종합)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할 필요가 있겠으나, 엄밀한 단계적 논증의 작업은 이론가에게 맡기는 대신, 이 글에서는 두 분야를 어설프게나마 걸쳐 본 경계인으로서 감상을 공유하고자 한다.
인권운동가가 펼치는 수많은 활동의 목표는 사안을 알리고 정책을 의제화하는 일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포화된 슬픔과 아픔을 타인에게 알림으로써 공감과 연대의 가능성을 형성하고, 민주주의 체제가 허락하는 여러 정치적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아픔이 길이 되는 법·정책의 제도화를 착수하는 것이다.
타인의 인식에 침투하는 작업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인권운동가는 예술가와 닮은 점이 많다. 바쁜 생활 속 정해진 루틴에 따라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는 시민들은 주변의 사라진 풍경과 사람들의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예술을 접하거나 캠페인을 접할 때 “아차” 하는 순간을 갖는다. 활동가와 예술가는 모든 이들이 모든 이들에 대해 다시 나타나기를 원하며, 함께 움직이기를 희망하며 저마다의 작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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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사진 출처: 전국장애인차별폐지연대 페이스북

타인의 인식에 침투하는 작업으로서 예술을 정의한다면, 예술 표현의 방법은 당장 무엇이건 크게 중요치 않다. 어떤 예술가는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시를 쓰고 낭송할 수 있으며, 노래를 부르거나 연극을 할 수 있다. 목소리도, 손재주도 자신 없다면 움직일 수도 있다. 아크로바틱과 같이 화려하게 움직임으로써 작품의 내용을 강렬하게 전달할 수도 있을 테고, 모호한 움직임을 통해 관객으로부터 추상적 몸짓의 빈 공간을 스스로 채우도록 만들 수도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언어·비언어적 수단을 활용해서 표현하고 그로 인해 타인의 인식에 침투하여 “아차!” 하는 순간을 만들 수만 있다면, 이는 분명 예술이다.
인권운동을 앞서 예술을 정의한 것과 같이 ‘타인의 인식에 침투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해보고, 유사성이 있는지 살펴보자. 인권운동의 세부적인 방법, 그러니까 캠페인은 당장 무엇을 활용하건 크게 중요치 않다. 어떤 활동가는 지하철역 앞에서 기후위기·빈곤·아동학대 등의 각종 사진을 번갈아 보여주며, 문제 해결의 우선순위가 무엇일지 시민에게 묻고 스티커를 붙이게 함으로써 그와 상응하게 문제적인 사안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일선 학교 및 관공서 등에서 인식 개선 교육 등을 진행하며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20년째 이루어지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 운동과 같이 장애인도 버스 타고 싶다며 버스 탑승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예 냉소적으로 정치인이나 기업인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쓰고 엄청난 양의 종이돈을 허공에 뿌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캠페인 또한 앞서 언급한 예술과 마찬가지로 일상 속 바쁜 동료시민들로부터 “아차!” 하고 주변을 되돌아보는 순간을 만들 것이라는 점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의 계기라는 점에서 예술과 운동의 수단은 흡사한 목적의식을 지닌 채 수행된다.

예술가도, 인권운동가도 약하면서 강하다. 이들은 한 국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통령이 아니고, 거대 기업의 의사결정을 독단할 수 있는 최고경영자도 아니다. 무언가를 열심히 표현할 줄 아는 시민이다. 이 능동적인 시민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너무나도 약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동료시민이 자신의 주제 의식에 공감하여 나타나도록 할 수 있고, 움직이도록 연대를 조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강한 행위자들이다.
동료시민이 나타나길 원하며, 움직이기 위하여 예술가와 운동가는 먼저 수행한다. 세상에 가려진 목소리와 감정들을 어떻게 전이시킬 것인지를 염두에 두며 다양한 수단을 개발한다. 시간에 지남에 따라 예술은 점점 인권운동을 닮아간다. 더 이상 극장만을 택하지 않고 거리로 나와 모든 시민과 소통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삶의 본질에 가까운 근본적인 물음에 더해 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급진적인 표현을 전달한다. 예술은 서서히 운동을 닮아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운동은 서서히 예술을 닮아가고 있다. 오늘날 운동은 단일 구호를 같은 리듬에 맞춰 반복하는 것만 고집하지 않는다. 어떻게 타인의 인식에 침투할 수 있을까, “아차” 하는 균열의 틈을 일구어, 동료시민의 공감을 얻어내고 지지를 얻을 수 있을까 연상하며 다양한 표현을 개발한다. 다 같이 합창한다. 춤을 춘다. 그림을 그린다. 움직인다. 활동판의 심미적 조화를 기획한다. 그렇게 운동은 예술이 된다.
이제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극장을 떠났지만 나는 여전히 예술가로 살고 있다. 나는 비록 TV에 나오지 않지만, 극장에 서지 않지만, 비평가로부터 떠오르는 예술인으로 주목받고 있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예술을 실천하고 있다. 예컨대, 2021년 3월 26일에는 행정수도 세종시에 장애인과 소수자를 위한 정책이 부족하다며 동료 시민들 앞에서 연설하고, 함께 살자고 외쳤다. 2021년 4월 20일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함께 탈 수 있는 버스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거리에 나타났다. 매달 수많은 기자회견을 조직하고, 집회를 꾸리고, 정치인과 행정가들에게 소수자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시민들에게 장애인식개선교육 등을 전개하며 끊임없이 타인의 인식에 침투하고 “아차” 하는 균열의 순간, 세상과 연대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예술학교를 졸업한 뒤 다시는 극장으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나는 거리에서 나의 예술을 지키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투박하게 느껴지는 현재의 인권운동 방식이 못마땅하며,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만일 누군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나는 당신의 말에 동감하며, 당신의 조언과 도움을 구하고 싶다. 우리의 예술은 아직 당신의 예술보다 투박하다. 그러나 당신도 나도 진심으로 세상을 바꾸는 예술의 가치를 믿는다면, 당신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환영할 것이고, 함께 춤을 출 것이며, 우리가 공유하는 문제의식 속 세상 모든 이가 나타나고 움직일 수 있도록 연대할 것이다.
같은 꿈을 꾸는 동지여, 투박한 운동을 세련된 예술로, 반짝이는 예술을 끈질긴 운동으로 함께 만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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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재원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활동하는 초보 활동가. 투쟁의 현장에서는 활동가들에게 먹물 같다고, 인터뷰 현장에서는 시민들에게 말이 험하다고 놀림당하기 일쑤. 뒤틀린 몸과 말을 끝까지 지키는 활동가가 되기를 소박한 목표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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