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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살게 되기까지

최유경

208호

2021.10.28

나는 작년 여름, 집을 나왔다. 정확히는 20여 년간을 살았던 원가정을 떠나 탈가정을 했다. 결단한 이유는 가정폭력이었고, 나는 5월부터 8월까지 유난히 더웠던 2020년의 여름을 여기저기를 헤매는 방식으로 몸을 누이고 짐을 풀며 살았다.

생각해보면 내가 집을 나온 이유를 ‘가정폭력’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유년 시절부터 여성 친권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6년간 살던 학교 기숙사를 떠나 원가정을 본 거처로 삼아야 했던 스무 살은 그저 불을 붙인 폭탄이 언제 터질지 기다리는 시간이었던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사실 내가 원가정에서 보냈던 모든 시간은 언제나 터지기 직전의 폭탄을 목전에 두고 조마조마해 하던 시간이었다.

우리 집은 내 복장을 단속하거나, 통금 시간을 독촉하거나,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해 어디냐고 묻는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외박을 알리지 않아도, 자정이 꼬박 넘어 귀가해도 별 잔소리는 없었다. 내가 활동하는 단체에서 청소년들과 가정과 부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면, 되려 나는 아주 자유로운 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친구와 늦게까지 바깥에서 시간을 보낼 때면 어김없이 그에게 쏟아지는 전화와 문자를 보며, 오히려 내 부모는 나에게 관심이 없나 싶어 섭섭할 정도였다. 내 부모는 내가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것도, 대학에 가지 않는 것도 용인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딸바보’라고 불렀고, 그는 딸의 최종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인 것에도 괘념치 않는 ‘진보적 부모’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내 귀가 시간이나 복장에 간섭하지 않는, 내 정체성에 말을 보태지 않는, 대학에 가라고 부르짖지 않는 원가정을 ‘안전한’ 공간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물론 내가 집을 나오게 된 결정적 계기는 신체적 폭력이었지만, 나는 집에 살며 가슴이 떨리지 않던 순간이 없었다. 부모는 위와 같이 대놓고 간섭하고 침범하는 언행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나를 통제하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신체폭력을 제하고도 청소년기 내내 여성 친권자는 내가 먹은 것을 제대로 치우지 않거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면 내 방까지 들리도록 혼잣말 마냥 욕설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렇게 위협적인 그가 언제든 맘만 먹으면 내 방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내 방은 내 것이었지만, 언제든 침범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내 것이 아니었다. 남성 친권자의 무기는 자신의 돈과 가부장이었다. 그는 나에게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대학 학비 외의 경제적 지원은 해줄 수 없다고 했다. 본인이 성질이 나거나 내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가 살라고’ 말했다. 평소엔 ‘딸바보’ 소리를 들으면서, 결국 자신의 심사가 뒤틀릴 때는 언제든 나를 이 집 밖으로 내쫓고 모든 지원을 끊겠다는 협박을 했다.

모든 것이 부모의 ‘마음’이나 ‘기분’대로 결정되거나, 행사될 때 나는 무력했다. 내 사회적, 경제적, 시공간적 권리는 모두 부모와 가정에 종속되어 있었다. 부모가 나에게 “그렇게 싫으면 네 마음대로 알아서 살라” 하고 말할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사회에서, 아니 이 작은 집에서조차 내 “마음대로, 알아서” 할 수 있는 건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활동을 하며 이것이 ‘우리 집만의 문제나 불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도와 상황은 모두 달랐을지언정, 가정에서 여성 청소년들은 대부분 비슷한 불안감과 위협에 시달렸다. 부모의 카드를 받아 쓰지만 그 카드는 그들이 무엇에 돈을 썼는지 어디를 갔는지 감시하는 수단이 되었고, 내 청소년 동료는 ‘시민단체 활동’을 하는 것을 부모가 알게 되어 활동을 중지해야만 했다. 내가 태어나고 이렇게까지 자란 것은 너무 쉽게 부모에게 진 빚이 되었고, 내 여성인 친구는 그의 오빠에게는 요구되지 않는 ‘이때까지 키워줬으니 부모에게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정서적 돌봄에 대한 압박에 시달렸다. 청소년의 모든 사회, 경제적 권리가 부재할 때 모성애 혹은 부성애로 불리는 친권자의 지원과 사랑은 너무 쉽게 통제와 협박, 폭력의 수단이 되었다.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외부수다회, 이미지 출처: 위티 홈페이지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외부수다회, 이미지 출처: 위티 홈페이지

나는 활동을 하고, 집을 나오고, 부모와 얼굴을 맞댈 일이 점차 적어지며 이 사회 자체가 애초에 가족 바깥의 개인을, 특히 어리고 힘없는 사람들을 내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20년 5월, 정부에서 지급한 긴급재난지원금은 가구 별로 수령하는 방식이었고, 그 이후의 지원금 역시 청소년에게 주어지는 것은 세대주가 대리 수령해야 하는 방식이었다. 애초에 가족이나 집 바깥의 청소년은 고려되지 않고, 청소년들에게도 각자의 ‘몫’이 있다는 상상 자체가 부재한 채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꼭 원가정 바깥의 청소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재난지원금의 가구별 지원은 결국 청소년들의 ‘부채감’만 증가시키는 방식이다. 이미 부모로부터 생계적 지원을 받고 있는 대부분의 청소년이, 재난 상황에서 ‘지원금’ 명목으로 나온 돈을 제 몫으로 요구하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꼭 지금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필요한 돈을 요구하기 전 부모 앞에서 쭈뼛거려본 경험은 누구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제 혼자 산다. 이제 내겐 설거지를 쌓아두어도, 샤워 후 머리카락이 욕실 바닥에 남아있어도 소리 지를 사람이 없다. 언제나 내 마음만 선다면 친구를 데려와도, 노래를 맘껏 크게 틀어도 상관이 없다. 무엇보다, 내 공간에선 마음이 편하다. 조마조마하지 않고, 언제 누가 들어올까 불안해할 일이 없다. 작년 9월부터는 과거의 나처럼 오갈 곳 없는 아기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살기로 결심했다. 내가 처음으로 선택한 가족이고, 내가 책임져보는 존재들이다.

물론 이 공간과 혼자 사는 어린 여성인 내 삶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는 고민해봐야 할 일이다. 나는 여전히 친권자들로부터 이 집의 월세를 지원받고, 때때로는 추가적인 지원 역시 받는다. 내가 사는 곳은 정확히는 집이 아니라 방이고, 언제까지 방에 살아야 할지도 알 수 없다. 나는 작년에 집을 나왔지만 올해 여름엔 벌써 두 번째 집으로 이사했고, 마찬가지로 언제까지 이렇게 옮겨 다니며 살아야 할지도 알 수 없다. 여전히 ‘내 집’이 없는 미래는 막막하다.

게다가 나는 운이 좋았다. 내 주변에는 여전히 원가정 내에서 사랑을 빙자한 폭력을 경험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부모와 협상해 홀로 살 수 있는 집을 구했지만, 그럴 수 없어 여전히 통제와 위협을 견디며 원가정에 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언제까지 우리의 자립이 운으로 점쳐질 수만은 없다. 청소년의 주거권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는 연속 수다회를 진행하며, 자기 자신이 존엄하고 안전할 수 있는 집을 위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11월 7일에는 <여성 청소년도 집이 필요하다>라는 제목의 수다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정말로, 우리에게도 자유롭고 안전한 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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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경

최유경
안녕하세요,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의 유경입니다. 위티는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스쿨미투 운동을 기점으로 창립하게 된 청소년 페미니즘 운동 단체입니다. 저는 위티의 창립과 함께 공동대표와 상근 활동가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비상근 활동가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dbrud_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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