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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티켓, 의무와 부채 사이에서

[큐투큐] ㅌㅋㅌ

김민관

제228호

2022.12.22

큐투큐(Cue-to-cue)는 극장에서 이뤄지는 리허설의 일종으로, 큐와 큐를 중심으로 연극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맞춰보는 작업입니다. 객석 오픈 시점, 조명 변화, 음향 타이밍, 무대 전환 포인트 등 모든 지점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큐로 존재하며, 공연 한 편은 수십 개에서 수백 개의 큐로 구성됩니다. 큐투큐는 연극 제작 과정에서 꼭 거쳐야 하는 작업으로, 여기에는 프로덕션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합니다. 누군가는 큐를 지시하고, 누군가는 고 버튼을 누르며, 누군가는 타이밍에 맞춰 등장하고 흩어집니다. 웹진 연극in에서는 극장 리허설을 넘어, 연극 작업 전 과정에 존재하는 수많은 큐와 큐 속에 흐르는 각자의 관점과 생각을 들어보려 합니다. 하나의 큐가 주제로 던져지고,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필자들이 그 큐에 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예정입니다.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교 시절, 연극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했다. 좀 특이한 경로인데, 연극 관련 학부에 재학하거나 연극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흔치 않은 경우라는 걸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사실 내 삶은 공연 보는 걸 최우선으로 놓는다는 점에서 매우 제한적인 삶의 궤적을 갖고 있고, 그와 관련해서 철저히 개인적인 루틴을 따라 움직이는 편이라 그런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느 정도 공통된 차원일 수 있는지, 연극 외사로서 의미가 있을지, 그보다 재미가 있을지 먼저 우려가 되는 바 있다. 대학교 졸업 후에도 한 10년은 그랬고, 지금도 완전히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지만, 대학 시절에는 티켓 가격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주로 포털의 공연 관련 카페나 공연 전문 포털에서 후기를 기록한다는 조건으로, 눈에 불을 밝히고 선착순 티케팅을 할 수 있는 공연을 찾아 섭렵하는 것으로 관극 경험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웬만한 공연이면 가리지 않았고, 모든 공연이 그 자체로 신기했고 흥미로웠다. 극장 자체, 공연 자체를 의심 없이 사랑했다. 잘 만든 공연, 완성도가 높은 공연과 같이 어떤 공연에 가치를 따로 부여하려는 의도가 있거나 부여할 수 있는 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고 하겠다. 극장이나 재단 자체의 채널을 통하는 것 외에도, 현재는 소셜 미디어가 활발하게 작동하면서 공연자들이 각자의 채널을 가지고서도 충분하게 홍보를 하고 관객을 구할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예전에는 앞선 채널들이 매개가 되어 관객 일부를 할당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울러 그 공연들은, 지금은 조금 더 다양해졌지만, “대학로”라고 하는 곳에 한정돼 있었다.

공연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떤 공연을 볼 때, 그 공연자를 알고 본다는 것, 또 잘 모르더라도 연극 현장을 함께하는 사람으로서, 소위 너른 의미의 ‘동료’의 개념으로서 본다는 것은 분명히 ‘순수한 관객’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것 같다. 후자에게 공연의 영역은 그 안이나 바깥 ― 아니 그 안과 바깥이 하나의 세계로 연결돼 있다고 할 것이다― 에서 모두 신비화되어 있을 수 있다면, 전자에게는 공연 외적인 정보들이 공연을 많이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 공연자가 학부 때부터 어땠다더라, 이런 식으로 공연을 죽 만들었다더라, 다른 말로는 그렇게만 공연을 만들 수 있었다더라, 하는 말을 심심찮게 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그 사람의 관심사, 작업 방식 외에도 특성, 인성 등 모든 것이 망라된다. 그러니까 공연 자체에 몰입하기 이전에 어떤 정보들이 개입하는 인상을 준다. 공연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정보와 공연을 통합해 공연에 대한 리뷰를 적는 경우는 없으니, 그런 언어가 정치적인 차원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없다고 판단된다 ― 그것은 결코 점검될 수 없는 언어이다.

큰 상자 속 가득 공연 팜플렛과 프로그램 등이 세로로 꽂혀 있다.
2009-2011 티켓 수집 박스

‘순수한 관객으로 남기’, 이는 내 개인적인 이상이다. 이는 공연자들과 어떤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고, 그들의 사적인 정보를 알지 않고 편견과 선입견 없이 모든 공연을 그냥 보는 것이다. 이때 초대로 티케팅을 하는 것과 내 돈을 주고 티케팅을 하는 것의 차이가 생겨난다. 현장 티켓을 관리하는 사람은 다를 수 있지만, 초대를 결정, 배분하는 건 그 공연의 홍보 담당자의 역할이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공연의 전문가나 담당 기자, 공연에 대해 글을 쓰는 필자의 경우, 초대를 받을 수 있는 최소 조건이 된다. ‘공연을 본다’, 그리고 ‘글을 쓴다’. 전자 이후에, 후자를 반드시 충족하는 건 사실 쉽지 않다.
일정 정도의 의무감이 부채감으로 바뀌지 않는 게 모든 경우 가능하지 않다. 쓸 말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그다지 좋지 않은 경우 차라리 쓰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따라서 공연 티켓을 사는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의 글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과 글을 쓰지 않았을 때 갖는 부채감 모두를 상쇄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홍보 담당자나 홍보팀, 이를 총괄하는 기획자가 따로 있다면 보다 덜 그렇게 느낄 수 있다. 반면 소규모 공연의 경우, 기획자도 홍보 담당자도 따로 없거나 해서 직접 공연자가 연락을 줄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 의무감과 부채감 모두가 상승한다. 반면 조금 더 관계가 친숙한 편이라 공연에 대한 호오를 직접 공연 이후 전달할 수 있는 정도의 사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도 있다.

연극은 민주주의적 시민을 관객으로 요청하는 듯하다. 반면 공공극장이든 아니든 티켓 가격이 없는 경우는 없다. 전시의 경우 입장료가 있는 경우는 블록버스터 전시의 경우나 미술관을 제하고는 거의 없는 것과는 상반된다. 공연 티켓 가격은 예술인 할인을 해도 요즘은 보통 20,000원 내외의 경우가 많다. 이를 일주일에 서너 개 지속해서 본다면, 한 달에 티켓 값이 30만 원 이상에 이르기도 한다 ― 이를 지속해서 감당할 수 있을까.
공연은 구전의 매체인 것도 같다. 앞서 공연 외 정보가 공연과 결합하는 예를 들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그런 말들을 포함해 소수 ― 다수일 수 없다 ― 의 공연 후기는 공연을 지배한다. 공연평, 더 정확히 입소문이라고 하는 건 티케팅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곧 수많은 공연에서 양질의(?) 티켓을 끊기 위한 주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공연에 관해 묵묵하게 문화기술지를 만들어 가는 사람에게 열린 티켓 환경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 ― 더 나은 생태계를 구성한다는 차원에 뜻을 같이 모은다는 차원에서, 상호 호혜적으로 티켓은 교환될 수 있을 것이다 ― 과 나는 공연 전문가의 역할을 가지고 있으므로 공연을 당연히 자유롭게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충한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자신의 지위를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을까. 극장의, 무대의 성스러움이 있다면,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 간의 피와 땀의 시간이 갖는 성스러움 역시 있다 ― 티켓 가격은 이런 협력의 시간과 과정에 대한 것으로 생각한다. 2015년 김영란법 제정 이후 두 장의 초대권은 한 장으로 바뀌었고, 초대권 문화를 거스르고자 했던 기획자의 의지가 솟아나고 소셜미디어상의 독자적인 홍보 루트를 가동할 수 있게 된 뒤에는 “선생님들”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한 초대 문화도 준 것으로 알고 있다.

공연 티켓을 직접 구하는 경우에도 사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의무감이 완전히 줄지는 않는다. 어떤 것을 보면 분명히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라기보다 그 공연이 중요하며 독특하고 예외적인 위상을 갖는다고 생각해서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글을 쓸 수 있으므로 쓴다는 것이 전제된다. 2009년 이전, 공연 관련 기자로 소속돼 활동했던 몇 년간, 공연 리뷰를 쓰는 것과 이후 편집장으로 매체를 운영하며 글을 쓰는 것이 조금 다르다. 전자는 이중의 의무가 따른다. 개인적인 책임감 외에도 데스크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부분도 있다. 결과적으로 편집자의 관점에서 ‘어떤’ 공연들만을 주로 보는 것 같다. 사실 ‘그 외의’ 공연들이 어디서 벌어지고 있는지를 다 알기 어렵기도 하다. 알더라도 수백, 수천의 공연을 물론 다 보기는 어렵다. 하루에 한 공연씩 계속 보는 것 역시 힘들다. 따라서 ‘어떤’ 공연들은 소수의 많은 공연들이다. 물론 사전에 어떤 연구와 리서치의 영역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티켓은 극장으로 들어가는 표고, 티케팅은 그걸 극장에서 하는 물리적인 행위이고 나아가 그 전에 온라인으로 예매를 하거나 홍보 담당자 등과 연락을 주고받는 행위의 일체를 가리킨다. 티켓은 열차를 탈 때의 그것과 같다. 어딘가에 들어간다는 의식,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는 여정을 공통된 메타포로 취한다. 개인적으로 극장에 들어갈 때의 설렘이 있는 공연 ― 사전 언어에서 독특함과 신선함이 느껴지는 공연 ―, 공연자의 새로움이나 변화를 고찰하거나 발화의 방식을 탐구하고 의제 제시의 견고함을 생각할 수 있는 차원에서 티케팅이 요청되고 거기에는 이중의 경로가 있다. 기획자나 홍보 담당자의 프레스 초대 메일에 회신해서 공연을 보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직접 티켓을 구하거나 담당자에게 연락을 청하기도 한다. 하지만 글을 장담할 수 없으므로, 무엇보다 그 공연은 중요해 보이므로 티켓을 사기도 한다.

뚜껑이 열린 신발 상자 속에 공연 티켓이 수북이 쌓여 있다. 크기가 제각각인 티켓이 앞뒷면 구분 없이 어지럽게 들어 있는 모습이다.
2018-2022 티켓 수집 박스

현재 생각하는 건 지금 쓰지 못해도 그것이 결국 중요하다면 나중에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이다. 어떤 하나의 담론이나 주제로 엮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 이는 부채감 대신에 의무감을 유예하는 사고방식이다. 마지막으로, 물리적인 차원으로 이야기하자면, 티켓은 나의 가장 주요한 수집 목록 중 하나다. 그것은 유일하게 남은 끝내지 않을 수집의 대상이다. 이를 보관하기에는 신발 상자가 가장 좋은 것 같은데, 예전에는 날짜순으로 정리를 하다가 ― 간혹 티켓에 날짜가 안 찍힌 공연은 표 뒤쪽에 날짜(연월일시)를 적어 두었다 ―, 지금은 그냥 한 통에 다 넣어둔다. 엽서 크기의 티켓은 사실 좀 매력이 없다. 명함 크기로 제작해주는 것은 너무 작다. 아무래도 명함을 세 개 정도 늘어뜨린 정도의 일반적인 티켓의 크기에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기후 변화로 인해 티켓도 모바일 티켓으로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말이 언젠가 떠돌 때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모았던 티켓들은 조금 더 추억의 물건이 될 것이다.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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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관

김민관 아트신 편집장
아트신(www.artscene.co.kr) 편집장. 예술을 체험하고 기록한다. 다양한 예술 관련한 아카이브에 관심을 두고 이를 실천하고자 한다. 좋은 예술이란 무엇일까라는 탐문과 함께 비평적 관점으로 동시대 예술의 계보를 재구성해 나가려고 노력 중이다. 최근에는 비평, 기획, 창작의 교환과 매개에 대한 관심으로, 여러 작업을 병행 중이다. 퍼포먼스 관련 서적의 편집에 다수 참여한 바 있으며, 저서로 『퍼포먼스아트의 다층적 시선』(201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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