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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릉

[큐투큐] 시동(始動)

설유진

제233호

2023.05.11

큐투큐(Cue-to-cue)는 극장에서 이뤄지는 리허설의 일종으로, 큐와 큐를 중심으로 연극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맞춰보는 작업입니다. 객석 오픈 시점, 조명 변화, 음향 타이밍, 무대 전환 포인트 등 모든 지점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큐로 존재하며, 공연 한 편은 수십 개에서 수백 개의 큐로 구성됩니다. 큐투큐는 연극 제작 과정에서 꼭 거쳐야 하는 작업으로, 여기에는 프로덕션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합니다. 누군가는 큐를 지시하고, 누군가는 고 버튼을 누르며, 누군가는 타이밍에 맞춰 등장하고 흩어집니다. 웹진 연극in에서는 극장 리허설을 넘어, 연극 작업 전 과정에 존재하는 수많은 큐와 큐 속에 흐르는 각자의 관점과 생각을 들어보려 합니다. 하나의 큐가 주제로 던져지고,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필자들이 그 큐에 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예정입니다.

앞으로 써 내려가는 나의 ‘시동’은 지극히 설유진 개인의 것이고, 독자에겐 공감이나 동의가 멀 수 있고,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시동 전, 나는 내가 지금 세상을 어떻게 보고, 받아들이고, 느끼고, 생각하는지 들여다본다. 그러다 보면 많이 울고 웃고(대부분 울고), 꿈에서는 그것들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 과정은 거창하게 말하면 리서치이고, 거칠게 말하면 괴롭게 노는 일이다. 작업에 환경으로 주어진 사람과 공간, 시대 안의 모든 것. 내게 영감이라는 것은 대부분 저항하는 것이나 견디는 것인 듯도 하다. 견디는 것이 적응이라면 나의 연출은 대부분 개척보다 적응의 형태이다. 어떤 연극을 만들 것인가 고민하다 보면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떡하면 그나마 살 것 같은지를 고민하게 된다. 만들어보려는 연극(세계)의 인간 대표이자 관객 대표인 내가 느끼고 싶은 감각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이를 위해 발상과 과정, 결과 모두 스스로에게 솔직하기만을 바란다. 하염없이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쥐똥만 한 것이 영감이라고 하나 떨어져 시동을 거는데, 그 형태가 오만가지다.

말:

<어슬렁>을 쓸 때는 문득 ‘어슬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나를 포함한 관객의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길 바랐다. 당시 코로나19가 막 태동할 때라서 그랬던 것 같다. 비상사태가 해지된 지금과 달리, 당시는 전염과 고립이 일상을 위협하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극도로 경계하는 때였기 때문이다. ‘어슬렁’이라는 단어에서 공연할 연극의 무드를 먼저 떠올린 듯하다. 어슬렁거리는, 한가롭길 바라는 일상. 당시 신촌극장에서 공연하기로 약속한 상태에서 집필했기에 어쩌면 신촌극장 자체도 영감이었다 할 수 있겠다. 같은 해의 하반기에 공연한 <제4의 벽>은 코로나19로 비워진 학교 운동장, 공터에서 친구들과 공놀이를 하다가 떠올린 공연이었다. 여러모로 정말 갑갑한 해였다, 2020년은.

때로는 문장 한 줄이 작품 한 편을 모두 담기도 한다. 그 한 줄을 품을 수 있다면 이야기는 경계도 한계도 없이 뻗어 나간다. <9월>의 한 줄은 “열기에 바람이 지나듯, 올해도 9월이 지난다. 풍경도 계절도 거짓말처럼 모두 다.”였고, <홍평국전>의 한 줄은 “너는 그저 두려운 마음을 조심하라.”, <오아시스>의 한 줄은 “사랑해요, 혁명적으로.”였다. <9월>의 한 줄은 희곡의 말미에 적어둔 글로, 공연에서는 말해지지 않지만, 연극에 기차역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홍평국전>의 한 줄은 비교적 납작했던 원작 소설 『홍계월전』의 모든 인물에게 두려움이 기인하는 서사를 만들었다. <오아시스>의 한 줄은 사랑이 없는 시대에 의지적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인간의 다짐이었고, 공연을 함께한 모두의 의지가 되었다.

노래:

나는 노래방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좋아했다고 하는 이유는 코로나19 이후로 안 가 버릇한 것이 이제는 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노래하는 데에 방씩이나 필요하겠는가. 노래방에 가는 것을 좋아한 이유는 노래방에 가면 (극장처럼) 우리끼리 모여 앉았다는 안락함에 더해, 전에 몰랐던 속내를 들여다보듯 사람들이 어떤 노래를 부르는지, 좋아하는지, 어떤 목소리, 어떤 태도로 부르는지를 통해 그 사람을 좀 더 알아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연출병이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사람들이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 때로는 노래 한 곡이 공연의 시작점과 마침표를 찍는다. 올해 초 한 배우와 메시지로 음악을 주고받던 중, 머리를 떠나지 않은 음악 한 곡이 올해 말의 연극 한 편을 완성했다. 그 노래를 듣고 듣고 또 들으며 한참을 울었고, 그 한 곡은 다른 음악으로 또 다른 음악으로 이어져 공연의 무드를 형성했다. 아마 이 노래는 공연을 준비하는 내내 함께 듣고 또 들을 것이다.

블랙박스 무대의 천장과 세 개의 벽, 그리고 바닥이 보이도록 위에서 아래로 살짝 내려다보는 시점이다. 무대 중앙쯤에는 기다란 검은색 책상 하나가 비스듬히 놓여 있고, 바퀴 달린 검은색 의자 세 개가 그 주위에 제각각의 방향으로 위치해 있다. 바닥엔, 책상이 놓인 모양 그대로 하얀색 직사각형이 그려져 있으며, 그 자리에서 책상이 정면으로 놓였을 때의 모양으로 하얀색 직사각형이 하나 더 그려져 있다. 그 앞쪽으로 다시 책상 크기의 하얀색 직사각형과 양옆으로 하얀색 정사각형이 각각 한 개씩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수많은 조명기들이 보인다.
연극 <너에게> 공연 전 무대
위의 사진과 동일한 무대를 동일한 시점에서 찍은 사진이다. 다만 책상이 원래의 자리에서 다소 앞쪽으로 이동해 있고, 의자 두 개는 쓰러져 있으며, 바닥에는 여러 소품들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다.
연극 <너에게> 공연 후 무대

극장:

극장은 정말 생각하기 좋은 공간이다. 남의 공연을 보러 가서도 내가 할 공연만 생각하기도 하니까. 작가나 연출로서 아직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을 때는 극장에 앉아 있곤 한다. 까만 공간이 우주를 닮아서일까 라고 적었다가 지웠다가 남겨둔다. <홍평국전>을 작업할 때는 이전에 교회였던, 우리의 극장이 될 ‘디스이즈낫어처치(TINC)’에 하릴없이 앉아 있곤 했다. 때론 기획자와 때론 디자이너, 배우가 함께하기도 했다. 당시 무대디자이너와는 ‘이 공간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를 공통 질문으로 삼아 밖이 깜깜할 때까지 별말도 없이 몇 시간을 앉아 있기도 했다. 때로는 산이든 들이든 어디든 돌아다니다 이곳이 극장이라면 어떨까 여기서 공연하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한다.

공연: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실은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칭찬에 약하며 인정받고 싶어 하고 수치심에 시달리고 질투가 많은 인간이라) 의식적으로 솔직하려 들지 않으면 작업의 방향과 동력 모두 누구의 것도 아닌 듯이 갈피를 잃고 만다. 살다 보면 온갖 주제를 직면하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찾아야 하듯이. 나를 시동하는 말은 내가 찾아야 한다.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게 제일 좋은 공연을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내가 만든 공연이 제일 재미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는 ‘공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다양한 매체로 세상 어디든 무대가 되고 누구든 배우로 보여지는, 모두가 ‘공연하는 세상’에서 ‘공연’의 의미는 분명 전과 다르지 않은가. 그렇다면 ‘공연’은? 이것이 요즘의 질문이다.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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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유진

설유진
설유진은 907에서 글을 쓰고 연출을 한다. 현재의 감각에 솔직한 작업을 하려 노력한다. 언제나 고민하는 것은 자유와 사랑이다. 최근작으로 <때때때>, <오아시스>, <하얀 꽃을 숨기다>, <홍평국전> 등이 있다.
thestoryprovid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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