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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되는 우리의 집

[큐투큐] 시동(始動)

이가은

제235호

2023.06.15

큐투큐(Cue-to-cue)는 극장에서 이뤄지는 리허설의 일종으로, 큐와 큐를 중심으로 연극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맞춰보는 작업입니다. 객석 오픈 시점, 조명 변화, 음향 타이밍, 무대 전환 포인트 등 모든 지점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큐로 존재하며, 공연 한 편은 수십 개에서 수백 개의 큐로 구성됩니다. 큐투큐는 연극 제작 과정에서 꼭 거쳐야 하는 작업으로, 여기에는 프로덕션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합니다. 누군가는 큐를 지시하고, 누군가는 고 버튼을 누르며, 누군가는 타이밍에 맞춰 등장하고 흩어집니다. 웹진 연극in에서는 극장 리허설을 넘어, 연극 작업 전 과정에 존재하는 수많은 큐와 큐 속에 흐르는 각자의 관점과 생각을 들어보려 합니다. 하나의 큐가 주제로 던져지고,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필자들이 그 큐에 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예정입니다.

2017년, 함께 수학하고 훈련하던 ‘배우 지망생’ 친구들 대부분이 영화로, 드라마로 각자의 길을 떠났다. 연극인 가족을 둔 나에게 연기와 연극은 기억조차 까마득한 한 시점으로부터 내 일부였고, 전공 공부를 처음 시작한 10대의 중반부터 배우 지망생들의 집이라 당연시했던 연극은 나의 20대에 이르러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선대 연극인들의 다양한 방법론에 따라 자기성찰-파괴를 반복하는 조금 기묘한 청소년기를 거쳐 마주한 건 위기감과 두려움이었다. 연습실과 무대를 영원의 집으로 여긴 순진함은 무엇이었을까. 무릇 ‘집’이라고 하면, 4면 벽과 비를 피할 천장을 떠올리게 된다. 4면 벽도, 천장도 단지 한시적인 대피소에 불과했거나, 애초부터 존재한 적 없다는 깨달음이 그해 나를 뒤흔들었다.

‘씨어터프로젝트 유배’의 시작은 결론적으로 ‘두려움’ 때문이었다.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곳을, 방문할 극장을, 내일도 지속하고 싶은 탐구와 훈련의 장소를 잃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그간 지지부진했던 마음에 시동을 걸었다. 유배의 처음 모습은, 말하자면 불법 점거한 어느 버려진 공간에 엉성한 기둥만 간신히 있는 모양새였다. 지난 6년간 간헐적으로나마 협업하다 보니, 감사하게도 이젠 엉덩이를 붙이고 함께 할 ‘곳’으로써의 작은 땅덩이를 상상할 수 있다. 익숙하게 투덕거리고, 때론 완전히 새롭게 바보 같은 자기소개를 나누는 그런 곳. 나는 언제든 멀어지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으로서의 유배를 꿈꾼다.

검은 벽과 바닥, 천장의 배튼, 조명 설치를 위한 브릿지가 보이는 연습 공간이다. 바닥에는 마스킹 테이프로 공간이 구획되어 있고, 그 안에 두 개의 책상과 네 개의 의자가 곳곳에 놓여 있으며, 각각 회색 방진복과 핑크색 니트에 밝은 청바지를 입은 두 배우가 연습 도중 웃음을 터트리고 있다.
<수면>(2022)의 리허설 모습

- 쓴다.

‘지지부진함’은 내 평생 친구이다. 어쩔 땐 옷장 같은 데 숨어있다가도, 어떤 순간엔 내 어깨에 들러붙어서 날 쳐다보고 있다. 진정으로 애증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유배를 만들기 전까지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희곡을 쓰다 버렸다. 잘 만든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자꾸 어떤 ‘공간’이 되어버리거나, ‘시’가 되거나, ‘소음’이 되거나, ‘풍경’이 되어버리는 게 도무지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완성되지 못한 채 버려진 원고들은 배우 교육을 받으며 읽었던 극작가들의 작품을 미진하게 닮아있었다. 유배를 만들겠다. 내몰리다 이 미운 친구에게 작별을 선언하는 순간에, 어렴풋하게 이런 생각이 스쳤다. “그 누구도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요구한 적이 없다” 또, “난 사실 이야기를 즐기지 않는데?” 그러고 나니,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되었다. “난 알고 싶다는 욕망을 동력으로 창작한다. 또 어쩌면 그걸로 살아간다”. 그래서 나에게 줄곧 난제였던 것들을 모아 내 20대를 관통할 4부작 레퍼토리 창작 계획을 우선 세워버렸다. 그리고 2023년 오늘, ‘식사-섹스-잠-집’의 대주제로 이루어진 레퍼토리의 세 번째 작품, ‘수면’(8월, <NON-Rem>으로 재연 예정)에 유배는 어느덧 정박해 있다.

<식사-헤페이상>(식사), <사, 육>(섹스), <수면>(잠)의 창작과정, 그리고 평행하듯 이어진 실연자로서의 작업 경험들 속에서 명백해진 세 가지 철칙이 있다. 이 철칙은 최소한 지금 시점상 유효하고, 동시에 오직 날 향하는 나만의 엄격함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1. 쓰일 때 쓴다. (쓰지 않고선 못 배길 때 쓴다) 2. 연기술적 모색을 상정하며 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보이고 들릴 것’에 입각한다. 이를테면, 인물의 내면을 과도하게 문학적으로 묘사하거나, 인물에 대한 배우의 배타적인 태도를 강화할 수 있는 서술을 지양한다) 3. 무대화의 과정에서는 텍스트가 필연적으로 해체되고, 재조립되고, 변형되어야 한다는 걸 상기한다. (이것은 ‘희곡’이 아니라, ‘계획’이나, ‘구상’에 가깝다)

검은 벽과 바닥으로 된 연습 공간에서 여섯 명의 배우가 각자 바닥에 앉아 자유롭게 몸을 풀고 있다.
<사, 육>(2019)의 연습 전 몸풀기 모습

- 네가 된다. 아니, 너와 나 어디쯤의 무언가가 된다.

앞서 밝힌 네 가지의 주제는 통상적으로 ‘본능’, ‘욕구’라 여겨지는 것들이다. 그러나 왜인지 내 삶에서는 이 네 가지 모두 자연스럽지 않았다. 누군가 날 돌보거나, 하다못해 ‘너 지금 자야 돼. 먹어야 돼’ 하지 않으면, 삐걱거리기 일쑤였다. 반발심도 많았다. 근본적으로 필요를 느끼지 못하니, 많은 순간 나를 향한 진심 어린 애정 또한 오독했다. 한창 성장기 때 나는 ‘정상적인 루틴(또는 생체리듬)’과 소통방식이 결여된 인간이었다.

유배라는 프로젝트의 이름은 언뜻 염세적이거나, 회의적인 인상을 풍길 수 있다. 난 인간과 삶이 어려웠다. 그래서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걸 ‘알고 싶어 하는 - 알려고 해야 하는 -’ 인간으로, 창작자로 살아가는 중에 그런 이름을 붙이게 되었나 싶다.

처음 접했을 때부터 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 교육까지는 ‘연기’가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인 것처럼 느껴졌다. 작품에 참여해 능히 자기 몫을 해내고, 많은 작품에서 선택받는 배우로 모두의 지향점이 바뀌면서, 갑자기 이건 ‘너’를 알아야 하는 일이 되었다. 비단 작품과 작품의 인물, 작가의 의도, 연출의 세계관, 동료뿐 아니라, 감상자까지 아는 게 곧 배우의 업이 되었다. 그런데 자꾸 하다 보니, 그 대상이 ‘나’인가, ‘너’인가의 문제를 떠나서, 머리로 아는 게 어떤 연기의 예술적 가치를 담보하지는 않는 듯했다. 또 아는 게 내 개인적 결핍의 궁극적인 해법이 아니었다는 걸, 나아가 우리 삶의 어떤 치명적인 비극들 또한 어루만지지 못한다는 걸 통감하게 되었다. 아는 게 과연 나를 더 나은 인간이 되게 할까? 아는 게 마치 유배된 것 같은 존재적 고독과 불안, 공허감을 해결할까? 너에 대해 안다고, 너를 아는 것일까? 알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걸 ‘앎’으로 해독하려 했을 때, 어떤 부작용이 있진 않을까?

프로젝트 유배(you-be)에 있어, ‘배우 중심 작업’이라는 거창하고도 유행가 같은 소개를 고수하는 건, 일차적으로 앎의 문제와 대적하는 ‘되기의 문제’를 탐구하게 된 데에, 연기가 중추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연극과 연기를 통해서 여전히 발견한다. 아는 문제와 무관하거나, 무관해야만 하거나, 애초에 그 풀리지 않는 난제를 단번에 초월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 또 그걸 막상 경험하게 되었을 때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일상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 그저 가만히 듣는 것, 느끼는 것, 감각하는 것… 결코 알 수 없을 것 같아 배척했던 네가 ‘되어버리는 것’.

다소 낭만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되기’를 긍정하는 방향성이 실상 관점 전환과 훈련에 가까운 반복과정을 전제하기에 매번 풍파를 겪는다. 이 풍파는 안온한 집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연극을 통해 맺는 우연한 필연을 항상 기대하는 것 같다. 공감, 일체감을 진짜 느끼는 것처럼 완벽히 세공된 ‘겉모습’은 더 이상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만남. 이제는 프로덕션 구성 단계에서 되도록 천천히, 멀리 돌아가려고 노력한다. 몇 번이고 재고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경험하기 위한 기술적 모색, 그에 동반되어야만 하는 창작 윤리를 결과물로서의 작품만큼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는 다짐으로. 적어도 오늘까지는, 이 순간까지는 진심으로.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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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은

이가은
씨어터프로젝트 유배(you-be)라는 이름으로 ‘너가 되기’-‘내가 되기’를 탐구한다. 배우이다.
구획들을 실험하고 예측이 불가능했던 결과는 기록한다. 도난 되길 기다리는 사적인 글을 쓴다.
https://www.facebook.com/gaeun.lee.3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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