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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걸린 시동 걸기

[큐투큐] 시동(始動)

임승태

제237호

2023.07.13

큐투큐(Cue-to-cue)는 극장에서 이뤄지는 리허설의 일종으로, 큐와 큐를 중심으로 연극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맞춰보는 작업입니다. 객석 오픈 시점, 조명 변화, 음향 타이밍, 무대 전환 포인트 등 모든 지점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큐로 존재하며, 공연 한 편은 수십 개에서 수백 개의 큐로 구성됩니다. 큐투큐는 연극 제작 과정에서 꼭 거쳐야 하는 작업으로, 여기에는 프로덕션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합니다. 누군가는 큐를 지시하고, 누군가는 고 버튼을 누르며, 누군가는 타이밍에 맞춰 등장하고 흩어집니다. 웹진 연극in에서는 극장 리허설을 넘어, 연극 작업 전 과정에 존재하는 수많은 큐와 큐 속에 흐르는 각자의 관점과 생각을 들어보려 합니다. 하나의 큐가 주제로 던져지고,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필자들이 그 큐에 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예정입니다.

드라마터그(이하 업계 통용되는 ‘터그’로 지칭)로서 나는 대체로 프로덕션 초기에 팀에 합류한다. 보통은 텍스트와 연출이 이미 정해져 있고, 주연 배우도 정해져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은 주로 주어진 재료(텍스트, 배우 등)를 더 흥미롭게 할 수 있는 관점, 방식, 질문 등을 연구하고 제안하는 일이다. 터그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프로덕션마다 다를 수 있지만 거의 언제나 작품의 시동(始動)에 관여한다.
최근 평소와는 조금 다른 시동을 겪고 있어 그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수년에 걸친 이 이야기를 과연 ‘시동’의 범주에 넣어도 되는 걸까? 아직 공연이 올라가지도 않았고 연습도 초기 단계이므로 오래 걸리긴 했어도 여전히 시동은 시동이다. 지면을 허락받은 기회에 기억을 되짚어 조금 자세히 써보겠다. 지금은 특별한 이 긴 시동이 적어도 내게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아서다.
2019년 여름, 극단의 직전 공연 막바지 즈음의 어느 날이었다. 극장 로비 한쪽에서 연출님과 다음 작업에 대해 잠시 이야기했다. 다음에는 창작이든 번역이든 텍스트를 극단에서 직접 마련하자는 데 뜻이 모였고, 그러다가 내가 그 무렵 알게 된 작품을 하나 소개했다. ‘공정’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기에 엘리트 스포츠계의 도핑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이 지금 여기에서도 공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불어 성별 구분이 엄격한 스포츠계의 이야기를 다시 젠더프리 (혹은 크로스 젠더) 방식으로 풀어가 보자는 제안을 이번에도 연출님이 수락했고 얼마 후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그해 여름 마침 광주에서 세계수영선수권 대회가 열렸고, 자료 조사와 가족 휴가를 겸하여 대회를 참관했다. 연출님도 휴가 일정을 조정해 경기장을 찾았다. 주인공의 대사처럼 “수십 분의 일 초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특히 그 대회는 도핑 의혹을 받고 있던 한 세계정상급 선수의 출전으로 시끄러웠는데, 내가 참관한 날 그 선수가 400m 자유형 결승전에서 우승했다. 그런데 이어진 시상식에서 2위를 한 선수가 연단에 오르지 않았고 문제의 선수와 악수도 기념사진 촬영도 거부했다. 도핑 의혹에 대한 항의였다. 작품과 밀접한 상황을 목격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출장 자료 조사까지 다녀 왔지만 본격적인 작업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극단의 다음 작업을 기다리는 관객도, 이전 작품의 재공연을 기대하는 관객도 있었지만 어떤 것도 여의치않았다.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했고, 모두가 아는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쳤다. 당장 공연을 못 한다면 일단 번역을 마치고 때를 기다리자, 는 마음으로 초벌 번역을 하고 출간을 도모했다. 하지만 그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계속되던 2021년 여름, 연출님이 배우 몇 분을 섭외해서 낭독 공연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지원금도, 무대 제작비도 없었지만 다시 공연을 하고 싶은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였다. 그때 모두가 그러했듯이 마스크를 쓰고 연습했고, 극장 절반을 비우고 관객을 받아야 했다. 단 이틀 3회 공연을 하는 아쉬움을 달래고자 매회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채팅으로 질문하면 육성으로 대답했다. 잊지 않고 극장을 다시 찾아준 관객들이 그저 고마웠다.

낭독공연 <레드 스피도>의 사진. 사진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흑백으로 촬영되었다. 
      두 배우가 각자 보면대를 앞에 두고 앉아 있으며, 왼쪽으로 보면대가 하나 더 보인다. 
      왼쪽 배우는 왼쪽 가슴에 red speedo가 적힌 반소매 티와 긴 바지를 입고 허벅지에 양손을 올린 채 하늘을 바라본다. 
      오른쪽 배우는 두 눈을 덮는 앞머리에 굵은 웨이브의 단발머리를 하고 왼쪽 팔과 오른쪽 등 부분이 반짝이로 되어 있는 후드와 반바지를 입었다. 
      그의 앞에 놓인 보면대에 흰 마스크가 하나 걸렸다.
낭독공연 <레드 스피도>(2021)

낭독 공연은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몇 가지 숙제를 남겼다. 가장 큰 숙제는 본 공연이었다. 호기롭게 다음 해(2022년) 여름 본 공연을 예고했지만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했다. 극단 이름과 달리 ‘신작’이 없다는 말도, ‘죄’가 많아 신(sin)작로라는 말도 들렸다. 다시 1년을 보내고 2023년 여름, 늦게 내는 숙제도 유효하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요즘 아침 9시에 모여 연습을 진행하고 있다.
또 하나 큰 숙제는 이른바 ‘배리어프리’와 관련한 것이었다. 낭독 공연을 일주일 정도 앞둔 시점에서 한 배우로부터 장애인 접근성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미처 생각 못 한 질문이었고, 준비된 건 거의 없었다. 제작비에 맞춰 섭외한 공연장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건물의 지하에 있었고 계단마저 좁고 가팔랐다. 부족한 대로 할 수 있는 걸 하되 본 공연에서 보완하겠다고 약속했다. 접이식 휠체어를 대여해 마련하고, 점자 공연 안내문을 비치했다. 그렇다고 보러들 오시라고 널리 알리긴 민망했다.
본 공연 약속을 제때 못 지켰지만 그래서 장애인 접근성에 대해 연구하고 준비할 시간을 벌었다. 접근성은 이번 공연 프로덕션이 꾸려진 이후 사전 제작 단계에서 연출부가 가장 많이 의논한 주제 중 하나였다. 대관한 극장 역시 배리어프리에 대한 관심이 컸다. 4년 전 같은 극장을 이용했던 터라 큰 변화를 체감했다. 극장은 대관 단체를 대상으로 워크숍을 제공하고 장비와 인력 지원도 약속했다. 연출부는 총 9회 진행하는 이번 공연에서 매 회차 최소 한 가지의 배리어프리 서비스는 반드시 제공하기로 했고 담당자를 섭외했다. 여기도 문제는 있다. 경험이 없는 우리는 서툴고 경험이 많은 수어통역사와 접근성 매니저는 일이 너무 많아서 섭외가 쉽지 않다.
젠더프리, 배리어프리와 더불어 이번 프로덕션에서는 ‘트라우마프리’를 지향한다. 공연의 재료 및 콘텐츠와 관련하여 관객은 물론 창작자의 안전을 고려한다는 취지다. 상세한 트리거 워닝 목록을 작성하고 프로덕션 내부에서 먼저 공유함으로써 참여자들에게 텍스트 및 공연 요소가 야기할 수 있는 물리적·심리적 자극을 알리고, 그리하여 작업자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우선 목표다. 그러한 경험이 제작 과정에서 관객의 안전과 다양성을 의식하도록 이끌 것을 기대한다.

흰 벽과 나무 바닥으로 이루어진 연습실의 전경이다. 
      세 개의 회색 기둥이 공간 중앙을 따라 일렬로 세워져 있고, 기둥 사이사이에 무릎 정도 높이의 검은 큐빅 세 개가 놓여 있다. 
      중앙 큐빅에 단발머리를 한 배우가 앉아 있고, 다른 배우는 그를 기준으로 왼쪽 기둥과 큐빅 옆에 서서 한 손으로 대본을 들고 서 있다. 
      바닥에는 큐빅의 위치와 무대의 끝선을 표시한 테이프가 붙어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오른쪽 벽에는 긴 책상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각각의 책상 위에는 텀블러, 대본, 노트북, 마이크 등이 놓여 있다. 
      책상에 앉아 배우들을 바라보는 스태프들의 모습이 보인다.
<새빨간 스피도>(2023)의 연습 장면

첫 구상으로부터 2년 만에 낭독 공연을, 또 그로부터 2년 만에 본 공연을 한다. 오랜만에 공연을 하면서 변화를 체감한다. 이전에는 대체로 작품 분석과 의미를 찾는 ‘내적’ 접근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내부는 물론 외부에 이르기까지 연극 공연이라는 예술적 경험 전반을 살피고 그 경험이 더 즐겁고 유의미한 것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 터그가 시동을 걸어야 하는 엔진은 비유하자면 놀이동산의 발전기 엔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시동을 거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려서야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깨닫는 건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면 시작도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긴 기다림은 터그에게는 고마운 일이다. 더 연구하고 더 상상할 수 있으니까. 다작과는 거리가 먼 나 같은 사람에겐 이렇게 시동을 오래 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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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태

임승태
평론과 드라마터지 작업을 오가며 말과 몸이 만나는 특별한 시공간을 탐구한다.
www.facebook.com/im.seungt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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