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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랜선을 타고

관악오랑 온라인 릴레이 필사프로그램 <고독한 필사; 밀레니엄 극작가>

허선혜_극작가

189호

2020.10.22

6월의 어느 더운 날, <고독한 필사; 밀레니엄 극작가>(이하 ‘고독한 필사’)가 시작되었다. 치도렌탈스튜디오의 작은 방에 들어서자 두 대의 모니터, 두 대의 조명, 그리고 내가 앉기를 기다리는 책상과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나는 뜨거운 조명을 받으며 방송 화면의 오른쪽 귀퉁이에서 움직이는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참여자들이 한두 명씩 들어오고, 마치 인터넷 방송 BJ처럼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00님.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고독한 필사>는 순전히 코로나19 때문에 시작하게 된 프로젝트였다. 서울청년센터 관악오랑의 제안을 받고 올해 2월에 차를 마시며 희곡을 낭독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했었다. 도서와 차 세트 구입을 마치고 프로그램을 시작만 하면 됐을 때 상황이 악화되었다. 이후 기관이 휴관을 하게 되었고 모든 프로그램이 비대면으로 전환되면서 대안이 필요했다. 직접 얼굴을 맞대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희곡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했다.

함께 진행을 맡았던 김은정 PD와 대화하면서 혹여 온라인 모임에 부담을 느끼는 분이 있지 않을까, 소리 내어 읽는 것이 낯선 분들이 있지는 않을까 고민이 되었다. 부담 없이 편하게 희곡을 읽고 나눌 방법이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고독한 00방’이 떠올랐다. ‘고독한 00방’은 관심 주제나 테마로 모인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지 않고 그 주제에 대한 사진만 올리는 컨셉의 온라인 채팅방이었다. 채팅을 통해 ‘쓰는 독서’를 하면 어떨까. 그럼 생각보다는 덜 부담되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오픈 채팅방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몇 번의 생각을 더 거친 뒤 그래도 진행자의 얼굴과 목소리는 드러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을 빌리게 되었다. 그 중 아프리카 TV를 선택한 것은 스트리밍 플랫폼 중 네트워크 오류가 적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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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필사>는 화면 한가운데에 희곡을 띄워놓고 참여자들이 순서대로 한 인물씩 타이핑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참여자들이 타이핑을 하는 동안에는 진행하는 나 혼자 희곡을 낭독하거나 함께 출연하는 작가와 나눠 낭독했다. 타이핑하는 것을 기다리느라 시간이 빌 때는 희곡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었다. 초반에 정한 분량의 타이핑을 마치면 잠깐의 쉬는 시간을 가진 후 희곡과 관련된 질문이 있는 엽서에 짧은 글을 쓰고 나누었다. 그 후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한 회차 당 두 시간 반 정도의 만남이었다. 또 희곡집을 발송해 혼자서도 필사를 해볼 수 있도록 했다.

<고독한 필사; 밀레니엄 극작가>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청년 극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소개한 프로그램이었다. 6월은 허선혜의 <괜찮은 가족>, 7월은 김주희의 <마르지 않는, 분명한, 묘연한>, 8월은 장영의 <우리는 비에 젖어 춥고 비참했지만>, 10월은 김연재의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이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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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관객이란 초가을의 시원한 바람 같은 존재들이다. 찾아와 짧은 시간이나마 기분 좋게 공간을 채워주고 또 언제 왔었냐는 듯 사라지는 존재들. 하루의 한 줌 같은 그 만남의 시간이 좋아 작가들은 작품을 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시기가 찾아오면서 작가들은 그 시간을 잃어버렸다. 어느 작가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청년 극작가들은 스스로 작가로 불리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멈춰져 버렸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관객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첫 달은 내가 주인공이었기에 서툴게 이 얘기 저 얘기 하며 참여자들에게 의지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김주희 작가와 함께 할 때는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웃어가며 진행했다. 장영 작가의 작품을 할 때는 작가 본인도 필사에 참여해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김연재 작가와 함께 할 때는 참여자들의 의견으로 드레스코드를 맞춰 파자마를 입고 진행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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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드러나면 안 된다는 말이 있었다. 보여야 할 것은 무대 위 배우들이고 눈에 띄어야 하는 것은 연출가이기 때문에. 작품에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보이면 안 된다는 말도 작가들이 무척 많이 듣는 말이다. 물론 어떤 의미인지는 알지만, 작품이 아닌 삶에서까지 나를 드러내는 것에 주저하게 되는 말이기도 하다. <고독한 필사>를 진행하기 전에도 내가 이런 걸 진행해도 되는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이런 건 보통 연출이나 배우들이 하지 않나. 그러나 첫 회를 진행하고 다른 작가들과 함께 이끌어가면서 괜한 걱정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가들의 진심으로 소통하는 모습과 참여자들의 적극적인 응원에 노파심이 눈 녹듯 사라진 것이다. 아마 그것은 서로 만나고 싶었던 어떤 간절함이 만들어낸 모습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참여했던 분들은 필사하면서 틀리면 안 될 것 같은 긴장감이 있다고 했다. 어쩌면 이것은 손으로 대사를 읊는 것과 같았다. 모두가 함께 한 작품을 만드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여자들이 긴장하며 타이핑을 하는 와중에 나와 출연자는 대화, 어쩌면 수다를 떨었다. 제목이 <고독한 필사>였지만 전혀 고독한 필사가 될 수 없었던 이유였다. 한 마디라도 더 보내고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필사는 더 깊이 기억하고 진하게 남기려는 독서법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필사를 통해서 작가와 작품을 더 깊이 진하게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프로그램 안에서는 시간상 적은 분량을 필사할 수밖에 없었지만, 희곡집에 혼자 필사할 때는 하나하나 곱씹으며 진하게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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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느꼈던 것은 랜선을 타고 만난다는 것이 직접 만나는 것보다 더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대화를 할 때는 딜레이가 있어 말을 걸고는 대답이 올 때까지 몇 초간 기다려야 하고, 누군가는 네트워크 오류로 연결이 끊기기도 하는 등 순탄한 만남이 보장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마음이 쓰이고 더 신경이 쓰이게 되기도 했다. 내 말이 잘 들리는지 수시로 확인하게 됐는데 제대로 가닿았다면 안심하게 되는 것이 꼭 편지를 주고받는 일 같기도 했다. 검지만한 카메라에 말을 걸면 송신이 되고 그에 대한 대답이 글로서 돌아오는 것은 참 기이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멈춰버린 세계에 징검다리가 되어줬다는 것이다. 아스라한 누군가라고만 생각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알고 그들과 대화했다는 것은 반대로 내가 선명해지는 일이기도 했다.

우리는 아주 가느다란 끈이더라도 연결되고 싶다. 세상이 멈추지 않았다는 걸, 우리의 만남은 계속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속한 ‘창작살롱 나비꼬리’는 이와 같은 만남을 계속 마련하려고 한다. 본인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용기를 내주신 작가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싶다. 조만간 또 만나요.

[사진 제공: 창작살롱 나비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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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선혜

허선혜
극작가입니다.
연결되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창작살롱 나비꼬리에서 다양한 만남을 위한 기획/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qeqe0321@naver.com
https://www.instagram.com/nabicor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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