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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면으로 불타오른 전우애 : 다들 어떻게 연출하세요?

서울연극센터 플레이-업 아카데미 '연출을 위한 구성기술'

이은비_연출가

189호

2020.10.22

2020년 9월, 코로나19 사태가 심화되고 정부가 방역 기준을 높이면서, 10월 초 예정이던 연극이 연기되었다. 연습하랴, 대본 고치랴, 회의하랴 정신없던 와중에 갑자기 시간이 텅 비게 되었다. 텅 빈 시간이 믿어지지 않아 며칠을 멍하니 보냈다. 생산적인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역병이 돌아 공연을 할 수 없다는, 아직까지도 초현실적인 이 상황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듣고 싶었지만 연습 시간과 겹쳐 포기했었던 플레이업 아카데미 수업 지원서를 썼다. 수업은 집과 같은 조용한 환경과, 와이파이를 쓸 수 있는 공간에서 들어야 한다고 했다. 집의 와이파이 상태가 안 그래도 불안했어서, 수업에 대한 기대감으로 와이파이 확장기를 마련했다.

비전공자로 현장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다. 몸으로 부딪히면서 배우는 것들도 많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연습이 진행되는 내내 연출 개론서들을 파고 들어야 했다. 내가 마주한 어려움에 관해, 이 길을 먼저 다녀간 선배 연출들의 이론을 공부하고, 노하우를 슬쩍 넘보고, 질책을 받고 싶기도 했다. 파고 들면 책 안의 연출 선배들은 가끔 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연습실과 극장에서는 지금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했기에 현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 이론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마음 한 켠에 있었다. 동료 연출들을 만나 다들 어떻게 작업하는지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카톡방이 만들어지고, 함께 수강할 4명의 다른 연출들이 초대되었다. 이번에 다룰 텍스트는 <오이디푸스>, <인형의 집>, <벚꽃 동산>, <보이체크>, <코카서스의 백묵원> 그리고 김애란 작가와 김숨 작가의 단편 소설 세 편이었다. 평소에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던 고전 희곡들에 설레고, 소설 텍스트를 기반으로 연출 수업이 어떻게 진행될지 두근거렸다. 소설을 희곡화 하는 작업에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더욱 기대되었고, 집에 있던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도 신나게 읽었다. 지금까지는 불가능했지만 내일부터는 반드시 훌륭한 연출이 되리라. 기쁨은... 그때까지였다.
플레이-업 아카데미 강량원 연출가의 ‘연출을 위한 구성기술’ 홍보 이미지(출처: 서울연극센터 페이스북)
플레이-업 아카데미 강량원 연출가의 ‘연출을 위한 구성기술’ 홍보 이미지(출처: 서울연극센터 페이스북)
추석에도 쉬지 않고 매일매일 이어지는 10회의 수업. 매일 다른 대본을 읽고, 시간 순으로 사건을 정리하고, 희곡을 분석한 뒤, 이를 어떻게 연출할 것인지 장면을 정리하고, 무대 이미지를 찾거나 그리는 과제를 다음 날 발표해야 했다. 5시에 수업이 끝나면 바로 내일의 수업을 위한 희곡을 읽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과제의 부담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희곡을 읽고, 분석하고, 나름대로의 연출 안을 글로 정리하면서 과제의 부담보다는 연출로서 스스로의 게으름을 더 크게 마주하게 되었다. 텍스트를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생각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한 아이디어를 짜내면서 보내야 했던 밤들은 연습 전 날의 밤들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어쨌든 주어진 시간 안에 무언가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는 것은 연습 과정과도 같았다. 생각을 나누고 발전시킬 배우들이 없기에 심지어 더 외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희곡을 읽는 데에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써버려서, 아무 생각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자정을 향하는 시계를 바라볼 때면,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과제를 발표하는 것 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나약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산’에 가 보고 ‘이 산이 아닌개벼’하고 실패하더라도, 일단 어느 산으로 가야 할 지는 정해야 했던 나폴레옹처럼 어쨌든 연출이란 작은 실마리라도 제시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다시 대본을 읽었다.

열 번의 수업동안 쏟아지는 과제를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네 명의 동료 연출들 덕분이었다. 첫 수업이 지난 후로 밤마다 카톡방에서는 과제에 대한 압박을 감당할 수 없는 연출들의 한풀이가 쏟아졌다. 수업은 줌으로 진행되었는데, 노트북 카메라에 비춰지는 다른 연출들의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지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 몇 번의 수업이 끝나면 다들 인사를 하고 회의방을 나갔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퇴장하시면 남은 연출들끼리 한참동안 수다를 떨곤 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수다는 다음 날 과제에 대한 압박, 희곡의 길이(보셨어요? 엄청 두꺼워요!)에서 시작해서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는지, 배우들과는 어떻게 소통하는지와 같은 서로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연출은 항상 답을 갖고 있어야만 하는가, ‘공동 작업’의 정의란?, 연극을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깊은 주제까지 연결되었다. 치열하게 고민하며 작업하는 다른 연출들을 화상으로만 만나야 한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수다의 끝은 항상 ‘수업이 끝나면 오프라인에서 우리 꼭 만나자’였다. 수강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전우애가 모락모락 생겨나고 있었다.
수업 당시 <코카서스의 백묵원> 과제를 발표하는 화면
수업 당시 <코카서스의 백묵원> 과제를 발표하는 화면
강량원 선생님의 수업은 <오이디푸스>를 통해 사건 구성, <인형의 집>과 <벚꽃 동산>으로 이중 구성, 그리고 <보이체크>와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통해 텍스트 구성으로 이어지는 희곡 구성의 변화를 3단계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희곡의 구성이 변화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의견을 이야기하고, 그렇다면 변화한 구성의 희곡을 어떤 방식으로 연출해야 하는지에 관해 토론하는 방식이었다. 과제를 발표하고, 의견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연출들의 각기 다른 아이디어와 연출 방식을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공연을 보러 가서 작업 결과인 ‘연극’을 통해 연출을 만나는 일보다, 수업에서 아이디어와 의견을 듣는 순간들이 각각 연출들의 연습실을 엿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온라인 화상으로의 만남이었지만 더 ‘가까운’ 만남으로 느껴졌다.

희곡의 구성 방식의 변화를 이해해 나가면서, 연출로서 연극을 통해 관객들과 어떻게 관계 맺고자 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었다. 관객들에게 무엇을 경험하게 할 것인지, 그리고 이 경험을 위해 무대 위의 모든 것을 어떻게 구조화 할 것인지 고민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동안의 작업들, 그리고 앞으로 하고 싶은 작업들이 계속 생각났다. 다섯 편의 희곡을 같이 이야기한 이후에는 단편소설을 내가 원하는 구성으로 만들어 제시하는, 본격적인 ‘실습’으로 이어졌다. 세 번의 실습을 통해 우왕좌왕 부딪히고 여러 차례의 질문이 오간 후, 마지막 수업에서는 각자의 작업-이미 공연했거나, 공연 예정인 작품-을 구성 방식에 따라 나누어 발표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른 연출들이 어떻게 작업해왔는지,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준비하는 작품에 대해 발표하면서, 다른 연출들의 피드백을 공식적으로 들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항상 이래저래 바빠서, 동료들과 작업에 대해 길게 이야기할 수 있는 순간들이 귀하게 느껴졌는데, 아예 판이 깔아지니 신이 났다. 그렇게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항상 수업 말미에 함께 하던 단체 파이팅을 외치며 화면 캡쳐로 단체 기념 사진을 찍었다.
수업을 마친 후 단체 기념 사진
수업을 마친 후 단체 기념 사진
수업이 끝나고 2주 남짓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오프라인에서 만나지 못했다. 전우애를 불태우며 과제를 안 해도 되는 그 날이 오면, 대학로에서 꼭 만나자는 약속은 날아갔을까? 함께 고민하던 다른 연출가들의 공연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크다. 얼굴을 맞대고 만나지는 못했어도 인터넷 상에서 함께 고민하던 주제들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다.

[사진 제공: 이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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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비

이은비 연출가
이야기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포스트-포스트드라마 집단 '얄라리얄라'에서 글을 쓰고, 고치고, 번역해서 연출합니다. laviedenvi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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