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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하지 않은 세상을 향해 퀴며들자

2020 서울국제도서전 : 퀴어 서사의 모든 것

박하늘_배우

190호

2020.11.05

지난 10월 17일 명동의 커뮤니티 하우스 마실에서 열린 강연 <퀴어 서사의 모든 것>을 참관하고 왔다. 본 강연에는 사회_김현(시인), 연사_조우리(소설가), 이리(연극배우)가 함께했다. 올해로 제26회를 맞이한 서울국제도서전은 ‘With Corona’ 시대를 대비하여 라이브 방송과 함께 강연을 진행했다. (하지만 ‘퀴어 서사의 모든 것’을 함께하기 위해 ‘모두’를 위한 강연 환경은 아닌 것이 조금 아쉬웠다)

자기소개와 코로나19로 인한 안부를 나누며 강연을 시작했다. 어떤 것이 ‘퀴어 서사’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퀴어 연극’인가. 그리고 ‘모든 것’이라니... 라는 말과 함께 이리는 인사했다. 조우리는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아서 모두 2019년 이전의 과거 얘기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동시대 작품에 대해 고민한다고 했다.
<퀴어 서사의 모든 것> 홍보 포스터
‘퀴어 문화를 접한 것, 어디에서 시작했는가.’로 대담이 진행됐다.
조우리는 1987년생으로서 마주했던 90년대는 콘텐츠 범람기여서 다채로운 문화를 많이 접했다고 한다. 규제가 풀린 때라 세기말 창작자들의 열정이 높았고, 결핍이나 갈구 이전에 자연스럽게 퀴어가 존재했다. 그 중 ‘세일러문’이란 만화에서 요정들의 연인관계가 마음에 남았고, 팬픽 문화를 만났다. 조우리는 학창시절 자신의 오타쿠적인 면을 이야기하며 일본문화를 접하고 행사에도 참여해 굿즈를 사고, PC통신을 하면서 팬픽을 접했다고 한다. 그렇게 주변 풀이 형성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게 퀴어 문화였다.

이리는 <빨강머리앤>에서 앤과 다이애나가 서로 사랑한다고 절절히 말하는데, 길버트만 아니면 둘이 잘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란마 1/2>에는 종과 성별을 넘나드는 인물이 나온다. 심은하, 김소연 주연의 <M>은 터무니없이 낙태를 반대하는 드라마인데 전통적 여성상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 나온다. 남자배우를 거부하는 심은하가 M으로 변하며 목소리가 남성처럼 변한다. 이 작품들이 이리가 처음으로 접한 트랜스 섹슈얼이다.

김현의 첫 퀴어 작품은 박희정 작가의 <호텔 아프리카>다. 작품 속에서 퀴어를 느끼는 것은, 그렇게 되길 바라기도 하고, 그렇게 보고자 하면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고 김현은 말했다.
이러한 퀴어의 시작점이 어떻게 확장되고 발전되어 갔을까.
조우리는 팬픽 문화에 진지하게 임했던 것을 이야기했다. 조우리가 쓴 작품들에는 레즈비언이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지만, 퀴어 소설이라고 명명 받지 않았다. 그것이 명명 받는 방식으로 퀴어 소설이 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는 것 같다며,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리는 본인의 직접적인 서사를 말하는 1인극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를 한 적이 있다. 이 극에는 정체성, 연애, 주거환경, 커밍아웃 얘기가 들어있다. 의도치 않게 공연으로 커밍아웃을 했는데, 공연을 다 본 관객 중에는 또 그걸 모르는 분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커밍아웃을 공식적으로 했다. 공연 당시 당사자로서 공연하는 책임감을 생각했고, 당사자만 해야 하나, 커밍아웃하고 나서만 해야 하나 등을 고민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당시 연극계에는 퀴어 담론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조우리는 퀴어 서사에 가장 앞서 있는 분들이 독자분들이고, 그에 답하는 것이 창작자라고 했다. 퀴어 담론은 끊임없이 연구되고 발표되는 중이라 창작자가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고, 느리지만 담론을 형성해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더불어 퀴어 서사를 당사자들만이 쓰고 향유해야 하는가, 왜 퀴어 서사라는 것만 한계를 지어야 하는가, 왜 주요한 주제로 다뤄지는가, 퀴어 서사를 특정 장르로 보는가 라고 질문해나갔다. 언젠가는 퀴어가 보편이 될 것이고, 지금은 보편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이리는 대학 시절 관람한 극회 공연 <라이어>에서 이웃집 게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이야기했다. 희곡에서 게이는 대상화, 전형화되어 납작하게 표현되었고, 웃음 유발 요소로 사용될 의도로 쓰여 있었다. 공연에서 배우는 게이라는 설정을 빼고, 그냥 웃겨서 웃긴 사람으로 캐릭터를 만듦으로써 극복(?)했는데, 아예 지워버림으로써 극복(?)한 걸 보고는 저게 잘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전형적인 캐릭터로 소비하는 것도 안 되지만, 지워서 배제하는 것도 안 되는 것이다.

조우리의 소설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 표지에는 유령 그림이 있다. 유령과 그 유령을 마주 보는 사람이 흰 천을 뒤집어쓰고 유령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척을 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한 것 같은 그 일러스트에 조우리가 생각하는 퀴어의 존재가 담겨있다.
퀴어를 작품 안에 녹여내는 것에 대해.
조우리는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것을 소설에 녹이기는 쉽지 않다며, 더욱이 퀴어를 향한 혐오, 차별, 폭력을 소설에 넣는 것은 자신이 괴롭기 때문에 쓰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창작물 안에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위험하다며, 반드시 그것을 재현해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느끼는 자신을 북돋는 글을 쓰고, 그걸 본 사람들이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리는 공연은 한두 달이면 만들 수 있기도해서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을 말해야 한다는 압력이 더 크다고 했다. 세월호 기획공연, 블랙리스트, 검열, 촛불정국, 대통령, 미투 운동을 언급하며 ‘너무 시류에 영합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있지만, 퀴어 서사가 시류적이고 유행처럼 여겨지는 요즘, 고전을 할 수는 없지 않냐며 연극의 동시대성과 현장성을 이야기했다.
조우리는 퀴어 얘기를 소설로 투고했다가 너무나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레즈비언 서사라서 투고할 여지가 없다는 이유로 반려 당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상투적인 레즈비언 서사라는 게 2020년에 판단 가능한가. 통계가 있어야 판단할 수 있는데, 전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닌가. 아마 100년은 지나야 판단 가능할 것이므로, 데이터가 쌓일 수 있도록 퀴어 서사를 많이 쓰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희곡을 몸으로 구현하는 배우인 이리는 연극에서 혐오나 사건을 재생산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트랜스젠더 하사관, 성신여대 입학 거부, 퀴어문화축제 방해... 보편적인 트랜스젠더 얘기가 가능한가, 얼마나 대상화될 수 있을까, 대상화의 윤리성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연극은 대중성 보다는 연극성을 더 생각할 수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대학로에서 계속되어 온 관성적이고 전형적인 퀴어 공연이 아니라, 포스트-적, 퀴어-적인 공연을 위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이리는 “대학로는 퀴어적인 공간이”라며, 페미니즘연극제와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퀴어연극제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았다.

끝으로 객석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퀴어 서사를 소비하는 사람만 소비하는 거 같다. 퀴어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고, 면역력이 없는 분들을 대하는 자세가 뭐가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조우리는 아무리 해도 안 될 거라고 운을 띄웠다가, 여기에도 저기에도 퀴어가 있어서 안 볼 수 없게, 접할 것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답했다. 점점 스며들게 해야 한다, “퀴며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리는 영화 <아가씨>를 본 어느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매지?”라고 말했던 일화를 언급하며, ‘정말 편견이 지켜주’고 있음을 전하였다. 미디어, 매체, 문학, 어떤 곳이나 정형화된 사람들만이 아닌 퀴어가 있어야 하고, 그들이 위험하지 않으며 같이 학교 다닐 수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퀴어 서사를 지키기 위해 포기하지 않아야 할 게 뭔가요?” 라는 질문에, 이리는 ‘당사자가 생존해 있다, 있었다, 허구의 캐릭터가 아니다’를 잊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당사자들을 납작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업마다 ‘이게 지금 한국 사회에서 무슨 의미가 있지?’를 고민한다고 했다. 재밌는 게 장땡이 아니라서 충분히 고민하고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우리는 내가 인식한 세상은 이런 거란 걸 대화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소설 안에 세상이 만들어지고 그 세계가 계속 이어진다면 그 안에서 인물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현은 ‘그래서 나는’이 중요한 것 같다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고민이 진지할수록 자신의 (퀴어) 서사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답했다.

세 분과 함께하며 나의 첫 퀴어를 생각했다. 명확하진 않지만 나도 ‘빨강머리 앤’에서 앤과 다이애나가 엄숙한 우정의 맹세를 주고받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의 퀴어성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퀴어 서사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퀴어라는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도록, 납작한 세상이 되지 않도록, 많은 데이터가 쌓이길 바라고 있다. 세 분의 작품을 살펴보고 싶어졌다.
[사진촬영 : 김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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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늘

박하늘
연극과 다원예술 분야에서 배우, 창작, 음성해설 등을 협업하고 있습니다.
@skypark_han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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