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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하지만 그럼에도 ‘쓰는’ 사람이 된다는 것 : 극작가로서 한걸음 내딛기

두산아트스쿨: 창작 워크숍 4기 희곡 워크숍(윤성호 극작가)

이남주

193호

2020.12.17

“극작가는 외로운 존재.”
본격적인 첫 수업을 시작하기 전, 미리 받은 수업 자료를 훑던 중 내 두 눈을 사로잡았던 문구다. 예비 극작가들에게 하는 당부로는 꽤나 직설적인 조언이 아닌가 싶다가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문구였다. 문구를 보니 극작을 시도하면서 참 외로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 친구와 루이스 E. 캐트론의 『희곡 쓰기의 즐거움』이란 극작법 책을 독파하면서 단막극을 써보자는 꿈을 꿨던 적이 있다. 결국 한 작품도 제대로 완성 짓지 못한 채 끝나버린 스터디였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희곡을 쓰면서 참 외로웠다. 힘겹게 글을 쓰다가 갑자기 화가 나던 때도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써봤자 연출가나 배우가 내가 쓴 대사를 바꿔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마음이 상했다. 그때 어렴풋이 극작가의 길이 참 고독한 길임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나는 희곡을 쓰고 싶었다. 기왕이면 동료를 만들어 외로운 길을 덜 외로운 길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회는 운명처럼 다가온다고 했던가? 두산아트센터 SNS 계정을 통해 희곡 워크숍이 열린다는 것을 알자마자 대학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야, 우리 이거 신청해볼래?” 그렇게 우리는 >두산아트스쿨 : 창작 워크숍 4기<의 팀원이 되었다.

이번 4기 수업은 크게 줌(ZOOM)을 활용한 온라인 교육과 오프라인 발표회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서로에게 피드백을 주고받을 시간은 주로 오프라인 수업 때 이뤄졌고, 윤성호 작가의 극작기술 관련 수업은 대부분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코로나19로 모든 수업을 오프라인으로 진행하지 못한 것이 아쉽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라인 수업이 질적으로 떨어진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온라인 수업에서 서로가 집안에서 생활하는 모습, 꽤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오프라인 수업 때 마스크를 끼고 마주했던 것보다 온라인에서의 모습이 더 친근한 느낌을 주기도 했고, 4기 동기들의 이름도 오히려 온라인에서 얼굴과 이름을 맞춰보며 외울 수 있었다. 와이파이(랜선) 문제라든지, 이어폰 문제라든지 오프라인 교육보다 온라인 교육 속에서 동기들과 소통하는 데에 조금씩 무리가 있긴 했지만 그것도 온라인 교육의 묘미라고 생각하며 재미있게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극작 수업을 들으면서 ‘극작가가 해내야만 하는 과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 많이 고민했다. 워크숍을 듣기 이전과 이후의 나 자신을 비교하라고 하면, 먼저 ‘사뭇 달라진 책임감의 무게’를 느끼게 되었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극작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만 꿨을 때는 단순히 희곡을 쓰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수업을 들으면서 극작가는 글을 쓰는 것을 넘어 관객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관객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타 문학 장르와 달리 희곡은 많은 사람 – 가령 연출가나 배우 – 에게 이 작품이 왜 시간과 자본을 들여 공연으로 재탄생되어야만 하는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출가나 배우가 내 희곡을 접하는 제1의 관객이 되는 것이다. 제1의 관객을 설득한다고 해서 제2의 관객, 그러니까 진짜로 극작가인 내가 만족시켜야 할 ‘관객’에게도 이 희곡이 설득력있게 다가간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극작가는 어떤 글을 써야만 하는 걸까? 워크숍을 수료하고 내린 결론은 ‘나’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극작가는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으면 안 되며, 섬세하고 또렷하게 ‘우리’의 세상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 희곡을 접하는 제1, 제2의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이런 결론을 내리고 나니 갑자기 발표회 때 사용될 희곡을 쓰는 데 엄청난 부담감이 몰려왔다. (특히 쓰고 있는 희곡의 배경이 공교육 현장이고, 등장인물들이 교사와 학생이라 더 부담이 컸던 것 같다.) ‘나는 관객을 위해 설득력 있는 극을 창조하고 있는가?’, ‘내가 직조한 인물들은 극 속에서 선명하게 살아있는가?’, ‘연결성 없이 인물의 감정을 늘어놓기만 해서 감정 쓰레기통으로 내 희곡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글을 읽고 공연으로 볼 관객을 생각하고 있는가?’ 등등 많은 고민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함부로 극작가가 되겠다고 설레발쳐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가슴 한구석에서 꿈틀거리는 명명하기 힘든 ‘열망’을 보기도 했다. ‘내 희곡이 관객의 마음속에서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이 된다면 그것도 참 즐거운 일이다. 이 직업의 매력은 거기서 오는 것 같아.’ 그리고 워크숍 기간 4기 동기들과 서로의 작품을 바꿔 읽는 과정에서 그 즐거움을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모두들 성심성의껏 피드백해 주었는데, “제 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라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졌어요. 참 따뜻한 희곡이네요.”라고 말씀해주신 분의 피드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내 희곡이 누군가의 긍정적인 기억을 일깨웠다는 것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동기들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또래 ‘창작자’들을 만나서 감사하다는 말도 지면을 빌려 전하고 싶다. 예비 극작가로서, 우리는 서로의 가장 첫 번째 ‘관객’이 되어주었다. 내 희곡을 읽어주고 정성스럽게 피드백해주는 동기들이 없었다면 이번 워크숍 희곡을 제대로 완성 짓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나와 같은 비전공자들이 연극/극작 관련 전공자들을 만나기 쉽지 않은데 워크숍을 통해 전공자들의 작업 방식을 엿볼 수 있어서 기뻤다. 물론 희곡이나 기타 문학작품을 쓰는 데 꼭 관련 전공자일 필요는 없지만, 이전까지 느꼈던 ‘전공자의 작업세계’에 대한 묘한 궁금증과 이로 인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앞으로도 새 작업을 진행하면 4기 동기들끼리 피드백을 계속 주고받기로 했으니 든든한 인생의 동반자가 생긴 기분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워크숍의 하이라이트라고 부를만한 ‘발표회’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속한 4기 분반은 운이 좋았던지라 일반 연습실이 아닌 두산아트센터 소극장 Space 111에서 발표회를 진행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윤성호 작가의 도움으로 프로 배우들이 우리가 쓴 희곡을 직접 낭독하는 기회를 얻었다. 설레는 기분을 참지 못하고 발표회 전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걸 동기들은 알까? 두산아트센터 Space 111에서 접했던 세련되고 실험적인 연극들이 내가 ‘연극’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몰랐겠지? 그만큼 아끼고 좋아하는 극장에서 내 희곡이 배우들에게 읽히게 되다니! 심적인 부담감을 느끼긴 했지만 다른 과제를 다 제쳐두고 나름의 최선을 다해 희곡을 완성했다.

대망의 발표회 날, 배우들의 목소리로 내 희곡을 듣는데 ‘어라?’ 느낌이 새로웠다. 예를 들어 나는 그 희곡을 쓰면서 A라는 인물을 통해 B라는 감정을 표현한 줄 알았는데, 배우가 A 인물의 대사를 읽으며 C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식이었다. 나도 모르게 낭독이 끝나고 ‘와하하’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래, 이게 바로 희곡의 묘미지.’ 배우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연출이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관객이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 희곡의 묘미 아니던가. 그 재미를 발표회에서도 느낄 수 있어서 짜릿했다. 문득 내가 왜 희곡을 쓰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왜 연극을 하고 싶어 하는지 다시 한번 알게 된 기분이었다. 연극에는 ‘완성’이란 종결점이 없기에 끊임없이 발산하고 뻗어나갈 수 있다는 그 매력. 그 매력에 너무 흠뻑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 극작가로 살아갔을 때 느낄 ‘희비’의 감정을 이번 워크숍에서 많이 경험했다. 이제는 극작가로서의 삶이 막연하지 않다. 관객들과 소통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는 극작가가 되어야겠다.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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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이남주
교육공학을 전공한 아마추어 극작가. 대학 친구들과 합심하여 올린 연극 <마녀의 숲>에서 배우를 했지만, 현재는 극작에 초점을 두고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etethicsment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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