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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목적 없이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어 본 대담

배우 백소정, 윤상화, 조경란, 하지성, 우범진

구자혜_연극연출가

194호

2021.01.21

연극in 웹진에서는 ‘코로나19’사태로 인한 연극계 변화에 반응하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싣습니다. [현장]코너를 통해 지속적으로 연재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기사를 통한 발언이나 투고 요청은 webzine@sfac.or.kr 로 전해주시면 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 연극in 편집부
2020년은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덧 2021년의 지원서 시즌, 라인업 발표 등을 자연스레 거치고 있다. 정리되기 힘든 2020년을 보내고, 예측하기 힘든 2021을 맞이하며 백소정, 윤상화, 조경란, 하지성, 우범진 배우가 말한 것들을 옮겨본다. ‘연극계를 강타한 코로나’라고들 하지만 그 안에서의 상황과 감정은 결코 단일하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이 겪은 마음의 문제를 카테고리화하는 게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대담임에도 이런 방식을 취해본다. 목표도 담론도 결론도 없이, 다섯 배우들의 마음과 생각을 들어보기로 한다.
우범진

2020년에 세 작품을 했는데, 조금씩 다 코로나의 영향을 받았다. 5월에 한 공연은 페스티벌에 속한 공연이었기 때문에 페스티벌 전체에서 준비한 매뉴얼대로 진행됐고, 객석 수를 조정하는 것 말고는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가을에 했던 작업은 2018년부터 독일과 합작으로 준비했던 공연으로, 애초에 독일에서 하기로 한 공연이었다. 코로나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공연 일정 자체를 못 잡고 있었다. 독일 작가와 배우가 한국에 와서 리허설을 했고, 자가 격리로 2주를 날렸다. 공연을 하러 독일에 가야 하는데 비자는 안 나오고 결정을 내리긴 해야 하고, 결국 우리는 비대면 실시간 공연을 하기로 했다. 공연을 며칠 앞두고 외교부에서 비자를 내주겠다고 했지만, 계획했던 방식대로 비대면 공연을 올렸다. 8월에 올린 공연은 두 개의 극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둘 다 공공극장이었다. 8월은 광화문 집회 이후에 확진자가 늘어난 시기였다. 혜화역에 도착할 즈음 문자가 왔다. ‘놀라실 수 있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당황하지 마시고요.’로 시작되는 문자. 연습실을 공유했던 다른 팀에서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것. 역학 조사 결과는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확 막막해졌다.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혜화역에서 내려서 플랫폼 벤치에 앉아 있었다. 더블캐스팅이어서 그날은 다른 배우가 공연을 하기로 하고, 나는 빨리 검사를 받기로 했다. 역학 조사가 끝난 상황이 아니어서 검사를 사비로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나름 보수적으로 접근을 하려 했다. 내가 피해를 끼칠 게 될 수도 있을 단체나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내가 출연하는 날이 2,3일 정도 남아 있었다. 내가 음성판정이 나왔음에도 남은 회 차는 출연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올해 작업한 공연 세 편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우리가 이 대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선택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도, 결국은 기회가 주어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우리는 ‘누가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인가’와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 같다. 물이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기회가 적은 사람들이 더 큰 피해를 보지 않나?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례들도 코로나 때문에 취소되거나 변경해야만 했던 일들이지 않나? 전제 자체가, 이미 예정된 작업들이 존재했다는 거다. 뼈아픈 말을 들었다. “넌 그래도 넌 취소될 공연이 있었다는 거잖아.” 코로나로 인해 전체적인 공연 편수가 줄어들고 환경과 조건의 문은 더 좁아지고, 그렇게 더 좁아진 문을 통과하는 것은 우선권이 있는 사람들이지 않나? 인지도가 있거나 소속된 집단이 있거나 기회가 많은 사람들. 피해를 증명한다는 것은, (어찌 되었든) 피해 받을 공연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피해를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피해가 아닌 건가? 여러모로 내가 받은 피해를 떠들기에는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그리고 피해의 내용과 무게들이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너무 명확히 드러내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마스크를 쓰고 말고를 선택하기 이전에, 마스크에 대한 나의 감각은 이렇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 자체가 매우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엘리베이터를 못 타거나 비행기를 타는 게 힘든 사람들처럼. 마스크를 쓴 이후로는 너무 힘들어서 버스에서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정말 힘들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 못할 정도로 답답하다.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쓰는 것이 의무이고, 배우가 마스크를 쓰고 벗을 권리가 있다는 것도 동의한다. 다만, 마스크를 벗는 이유가 무조건 이기적이고, 무례하고 무개념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경란

어떤 학교로 수업을 나갔었는데, 그 학교 학생 중에 한 명이 확진이 된 거다. 2020년 10월 말 경에 연락을 받았다. 11월 10일이 공연인데 2주일간 자가 격리에 들어가야 했다. 자가 격리를 끝내고 오면 이미 공연이 시작된 후가 되는 거다. 공연이 올라가기 전, 1주일에서 2주일이 정말 중요한 시간이다. 공연의 많은 부분이 만들어지고 많은 것들을 결정하게 되는 시간인데, 그때 격리가 되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참담했다. 게다가 자가 격리를 끝내고 돌아오면 공연은 이미 올라간 상황. 자가 격리가 결정된 후,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가 프로덕션에 끼칠 피해였다. 나로 인해 연습이 중단되거나, 손실이 발생한다거나 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들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이미 프로덕션 내에서 격리자, 확진자가 나와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될 경우에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한 매뉴얼과 공연 진행 방법론, 즉 플랜B도 마련을 해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막상 이 일이 나에게 닥치니 내가 끼칠 피해 때문에 미안한 마음만 들고, 당연히 나는 무대에 서지 않는 플랜B가 작동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앞 회차 공연을 취소하고, 자가 격리 후 돌아와 이틀간 무대를 밟으면서도 나는 환불은 어떻게 할 건지, 피해나 손실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계속 물었다. 프로듀서와 연출이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하며 공연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었다. 자포자기하고 있었는데 공연을 하자는 말을 들었을 때, 좋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어떤 감정이 들었다. 내가 공연을 할 수 있다고? 동시에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첫 공연을 포함한 앞 3회 차의 공연은 취소되었고, 나는 무대를 이틀 밟아본 후 공연을 할 예정. 그사이 내가 없는 극장에서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만들어졌겠지. 극장에서 리허설이 진행되는 것을 실시간 영상으로 지켜보았다. 다른 배우들이 쉴 때 나도 쉬었고, 리허설이 시작되면 나도 책상 앞에 앉아서 지켜봤다. 리허설이 끝나면, 혼자서 더 연습을 하고 잤다. 내 연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공연을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들인 것에 대해 생각했다. 두 달 가까이의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관객들을 직접 만나고 싶었고, 무대 위에서 살아있고 싶었다. 그래서 앞 회 차를 취소하고 나를 기다리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끼칠 피해 때문에 미안했지만, 수락한 거다. 그리고 플랜B가 내 진짜 욕망은 아니었다. 연습실이 아닌 무대에서 완성되는 게 있지 않나. 관객을 만나면 또 달라지겠지만, 관객을 만나기 전까지 무대 위에서 다른 배우들과 함께 하는 순간순간, 복잡 미묘한 것들이 합쳐져서 나왔을 때 완성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데 나는 그 시간을 못 쓴 거다. 자가 격리 후 극장에 들어오니 더 마음이 급해졌다.
나 때문에 완성도가 떨어지면 어떡하지?
이 생각에 갇혀 있느라, 첫 공연을 올리고 나서 꽤 긴 기간을 마스크를 쓰고 연기하는 것에 대해 자각하지 못했었다. 매 순간 너무 긴장됐고, 무대를 못 밟은 만큼 실수 할까 봐, 대사 못 맞춰 본 만큼 실수할까 봐 숨이 콱콱 막혔다. 연습실에서부터 마스크를 한 번도 벗지 않았지만, 극장에 들어와서 관객을 만났을 때는 다른 감각이 운용되기 마련인데 그것을 전환시킬 여유가 없었던 거다. 공연이 중반에 접어들고 나서야 마스크로 인한 호흡 운용의 문제를 알게 되었다. 말을 엄청나게 빠르게 하는 것이 전략이었고, 호흡을 어마어마하게 먹으면서 말을 쭈르르 뱉어내야 하는데 계산대로 안 되는 거다. 연습을 해도 안 되는 게 속상했다. 문장의 맺음을 단단하게 하고 싶었을 때, 마스크 안의 호흡이 딸려서 아무리 숨을 미리 쉬려고 해도 쉽지 않았고, 결국 계획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그래도 마스크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
앞서 다른 배우들이 말한 집단성이나 발언권과 관련된 문제인 것 같다. 나는 마스크가 선택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마스크를 선택할 수 없는가?’ 이게 제일 궁금했다. 공연을 준비하다가 한 관객이 우리 공연에 대한 생각을 쓴 것을 읽었는데, ‘배우들이 마스크를 쓴다고?’였다. 나는 배우이기 전에 인간이다. 상대 배우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배우들도 당연히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도 배우이기 전에 인간이니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올해에 낭독공연을 하나 하기도 했다. 다른 배우들은 마스크를 벗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나는 끝까지 벗지 않았다. 내가 하고 있는 다른 공연이나 수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공연 전까지 마스크를 쓰고 있다가 공연 한다고 마스크를 벗으면 이전까지 썼던 게 무의미하지 않나? 그런데 그때는 마스크를 쓰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성

2019년에는 창작에 어려움을 많이 느껴 다른 사람에게 의지를 했다면, 2020년에는 진짜 나 스스로 -물론 멘토의 조언이 있었지만- 내 경험에서 나왔던 작품을 만들었다. 쓰고 연출하고 출연하고. 작품 만들기에 대한 첫출발은 배우로서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연기를 어떻게 잘 할 수 있을까? 혹은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결국에는, 왜 잘하고 싶은가? 무대에서 잘하게 된 순간이 언제부터였지? 이런 것들을 떠올려봤을 때, 내가 무대에서 장애를 느끼지 않는 순간이 내가 연기를 잘한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장애인인데 결국 내가 그걸 인정하기가 싫은 거구나.’ 작품을 만드는 과정 안에서, 그걸 깨달은 거다. 2020년 12월의 공연을 위해 몇 달을 그 생각에 파고들었다. 그러다 보니 인정하게 된 것 같다. ‘내가, 결국에는 비장애인 되고 싶은 거구나.’ 이것을 인정하니까 더 편해졌다. 거기에서 출발해서 작품이 나왔다. 그래서 더 의미가 깊은 작품이고, 빨리 공연으로 만들어서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빨리 극장에 들어가서 어떤 연극이 될지 보고 싶고, 동시에 다음 장면이 막 떠오르고.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었다. 2.5단계로 격상된 후에도, 관객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만든 작품이 관객과 함께한다는 생각에 내내 들떠있었으니까. 창작이 처음으로 재미가 있었고, 올 한해 가장 잘한 일이었고, 그래서 자신감이 있었다.
단 한 번의 촬영을 하기로 했다.
회의를 통한 결정이었다. 우리가 코로나에 걸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코로나가 우리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장애를 가진 나로서는 만약 코로나에 걸린다면 굉장히 위험해지는 거다. 요새는 천 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오니까 내가 더 위험하다는 걸 많이 느낀 것 같다. ‘위험을 감수하고도 공연을 하는 게 맞을까?’라는 생각과 ‘그래도 일 년 동안 해온 창작의 의미는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지 않나? 나 스스로가 이뤄낸 것이니 끝까지 마무리 짓고 싶다.’라는 두 생각이 공존했다. 결국은 비대면으로 영상 촬영을 하는 것에 동의를 했다. 솔직히, 너무 아쉽고 속이 쓰렸다. 내가 대본을 써서 무대화되어 공연을 하는 것까지 목적을 달성했지만, 관객이 없는 비대면 촬영은 예상보다 더 허한 마음이 들었다. 주변이 너무 조용하게만 느껴졌고, 관객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감각마저 사라지니까 혼자처럼 느껴졌다. 스태프들의 박수소리, 단원들의 박수소리도 달갑지 않았다. 작품에 나오는 장면 중에서 관객과 함께 하는 장면이 있기도 했지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관객들이 나를 바라보고, 내가 관객들을 바라보는 게 내가 무대에 있는 이유이고 내가 그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관객이 소중하다. 많이 속상하다.
이 작품은 내 정체성에 대한 것이었다.
장애를 알아야 된다는 부담 아닌 부담이 늘 있었다. 도대체 장애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결과적으로는, 장애를 모르겠다. 비장애인과의 만남 속에서 내 주체성을 찾아야 하는데, 거기까지 들어가면 너무나 어렵다. 그래도 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너무 좋아하고, 관객을 만나고 싶었다. 결국 내가 장애에 대한 생각 때문에 갇혀서 오히려 그것이 나를 더 갇히게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얼마나 솔직할 수 있느냐가 진짜 나의 정체성인 것 같다. 내 진짜 정체성을 찾은 동시에 표현하는 나를 되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배우라는 존재가 나를 살아있게 해줘서, 좋아해서, 계속 이 작업을 끈질기게 붙잡으려고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하루 빨리 극장 무대에 배우가 있고, 관객이 있는 평범한 일상이 오기를 바란다.
01
윤상화

2020년 9월,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극계에서도 확진자가 나왔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할 때였다. 중간에 잠깐 연습을 쉴 때가 있었는데, 그때 잠깐 길에서 이야기를 나눈 지인이 자가 격리를 해야 한다고 연락이 왔다. 갑자기 너무 겁이 났다. 그 지인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혼자 자가 격리했다. (사실 우리 집은 자가 격리할 구조가 아니다.) 마음이 되게 이상했다. 공연을 앞두고 있었고, 어떤 초조함 같은 것들이 있었다. 자가격리 통보를 받은 지인이 음성 판정이 나왔다는 연락을 해주었는데도, 연습을 못 가겠는 거다. 걱정할까봐. 말을 해야 하나 말해야 하나. 그런 시간을 한 번 거쳤다. 그 공연을 준비하면서 배우들과 상주 스태프들은 총 두 번의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연습 초기의 검사는 우리를 위해서, 극장으로 들어가기 전의 검사는 관객을 위해서. 연습은 마스크를 쓰고 진행했는데, 극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결국 마스크를 벗는 디데이를 정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두 번의 검사를 받게 된 거다. 배우들과 연출부는 거의 매일 봐야하니까 우리끼리라도 우리의 상태를 확인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을 한 거다. 다시 검사를 하는 과정에서, 위축감이 들었다. 2020년 11월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는 건물 지하에서 우리 팀만 그 공간을 사용하며 연습을 했다. 나는 운전을 해서 이동했고, 연습하는 사람 말고는 만난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아주 즐겁게 연습했다. 그런데, 첫 날 공연을 올릴 때 처음 본 거다. 대극장에 이빨 빠진 듯 비어 있는 관객들을. 소극장에서 떨어져 앉아 마스크를 쓰고 있는 관객들을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 큰 극장이 휑했다. 무대에서 바라본 그 광경이 놀라웠다.
대체 불가라는 말은 대체 가능하다는 거다.
배우는 개인일까? 그렇다면 개인으로서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 ‘대체 불가 배우’라는 말들은 하는데, ‘대체 불가 작가’나 ‘대체 불가 연출’이라는 말은 잘 안 쓴다. 대체 불가. 이건 사실 대체 가능이 전제되어 있는 거다. 이게 배우들의 위태로움이다. 대체 가능에서 출발하는 위태로움. 배우는 이상하게 집단으로 여겨져 온 것 같다. 2020년은 코로나라는 난처한 상황 속에서 개인의 목소리는 적극적으로 내지 못한 채, 집단이 우선시 되고 끊임없이 자기의 윤리를 점검해야 하는 시기였던 것 같다. ‘이 시기에 사람들이 모이는 이 일을 하는 게 윤리적으로 타당한가?’라는 생각이 든 거다. 그런데 너무 하고 싶잖아, 연극. 나한테도 역시 공연은 숨 쉬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니까. 2020년 4월에 예정되어 있던 공연이 취소되면서 상반기에 공연을 하나도 못 하다 보니, 공연에 대한 갈증이 컸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게 타당한가?’
동시에 “나는 이 공연을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다른 포지션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배우이다 보니, 무대에서 서는 사람만이 느끼는, 밖에서 봤을 때는 모르는 감각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밖에서 봤을 때는 모르는 감각이 분명히 존재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무대를 신성시하는 감각이 있다. 취소하면 일 없을 텐데, 알바를 해야 할 텐데, 이런 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배우에게 무대에 선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인 거다. 배우들은 연습 과정에서 각자 혹은 함께, 살아 있는 어떤 세계를 만나는 것 같다. 그렇게 만난 세계를 공연을 하면서 꺼내놓는 건데, 그걸 꺼내놓지 않고는 마음이 접어지지 않는 거다. 그런데 지금 더 위태로워지는 이유는,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관계를 맺어내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내가 해를 입을 수도 있고 입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쉽게 생각한 부분이 있다. ‘배우들은 당연히 공연을 하고 싶어 하지 않나?’라는 전제를 두고 생각해왔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어떤 배우가 “공연하고 싶지 않다.”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많이 놀랐다. 배우가 공연을 하고 싶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그제야 체감한 거다. ‘나는 이 공연을 하고 싶다’라는 것처럼,
‘이 공연을 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할 때 이것이 얼마나 큰 결정인지 알아주었으면 한다.
백소정

2020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잘 견뎌냈던 것 같다. 서로를 위해서 힘내고 위생 관리에 힘쓰자, 으쌰으쌰 이런 것들. 그런데 이게 한 해 동안 지속이 되다보니까 ‘내일 취소될지도 모르는 공연을 위해 연습하는 게 소용이 있나?’ 이런 생각들이 들기 시작했다. 며칠 내에 단계가 격상될 수 있는 상황인데, 공연은 얼마 안 남았고, 내일 당장이 극장 리허설인 상황. 공연 진행에 대한 논의가 되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 정보 전달의 속도가 빠르지도 구체적이지도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럼 공연이 얼마 안 남은 배우인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단 하던 대로 준비를 하면 되는 건가? 아니야. 이미 3단계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을 텐데?’ 코로나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공연이 있었다. 팀 입장에서는 처음 생긴, 그리고 언제 생길지 모르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공연이었다. 일단 공연을 한다고 치고 매일매일 연습을 했다. 그때 할 수 있는 건 그것 밖에 없었으니까. 결국은 공연이 비대면으로 결정되면서 영상 촬영을 하게 됐다. 그런데 세달 간 춤 연습을 한 코러스의 얼굴이 한 번도 잡히지 않는다…? 내 장면인데 내가 하나도 안 나온다…? 어? 내가 하관을 버리고 연기를 했었나? 내가 턱이랑 입이랑 신경을 안 쓰고 연습을 했었나?
마스크를 쓰고 연습을 하다가, 촬영을 위해 마스크를 벗은 순간에 부끄러워진 거다.
연습 중에 마스크를 쓰고 연기를 할 때는 몰랐었다. 소리가 어떻게든 마스크를 뚫고 나가야한다는 목적 하에, 눈만 드러낸 상태에서 언어적인 표현에만 집중을 했었던 거다. 이 모든 걸 영상촬영 할 때 알게 된 거다. 내가 연기 범주의 선택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벌거벗은 거 같았다. 스태프, 동료, 촬영 팀 다 보고 있는데 너무 낯설고 부끄럽고 무서웠고 심란했다. 하고 있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나 스스로를 의심하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이게 맞나? 물리적 제약이 있는 상태에서, 몸으로 수행하는 사람인 내가 선택지를 스스로 버리고 있었던 건가?’

코로나 이후에 “이 공연은 올라가면 기적이다(좀 부족하더라도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라는 말이 마음을 어렵게 했다. 공연이 올라간다는 것은 관객을 만난다는 것이고 -혹은 영상으로 비춰진다는 것인데- 나는 관객에게 부족한 모습으로 노출되고 싶지 않은데 공연만 올라가면 다 된다는 식의 말들이 마음을 어렵게 했다. ‘코로나 때문에 연습을 제대로 못 하고, 내용이나 형식이 갑자기 바뀌고, 이런 걸 어느 관객이 알 수 있으며 누가 그런 것을 감안하며 볼까?’하는 불만도 생겼던 거 같다. ‘이렇게 고민하고 좌절하고 대화 나누고 해도, 어차피 무대 위에서 내 연기는 아무도 책임을 못 져주는데, 그럼 이 시간에 장면 연습 하는 게 낫지 않은가?’ 솔직한 욕망들을 꺼내진 못했지만, 분명히 발생했던 나의 욕망들이다. 이 시국을 힘들어하는 동료들을 보며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근데 나는 진짜 연기 잘 하고 싶은데, 못하는 모습으로 나서고 싶지 않은데. 나 왜 이렇게 못됐지?
그런데, 우리가 속상하다고 서운하다고 서로에게 충분히 말했나?
공연 여부 등에 대한 논의들을 하고 나면 굉장히 경직이 된다. 나는 안 하고 싶다고 멈추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데 “연습 시작합시다.”라고 했을 때, 감각이 갇힌 상태에서 반항심이 쌓인 몸과 마음으로 연습을 해야 하는 거다. 나는 상황에 대해서 불편한 감정을 가지기 시작하면 가볍게 털어 내거나 빨리 전환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래서 상황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연습을 해야 하니까. 내 재료를 어떻게든 좋은 상태로 남겨놔야 할 것 같으니까. 이걸 털지 않으면 결국 내 손해니까. 아 결국, 내가 선택을 했구나.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우선 마음을 다잡고 연습을 하느라, 이 마음을 나누지 못한 걸까? 내가 진짜 지금 힘들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한 명씩 두 명씩 말하기 시작할 테고, 그럼 우리 때문에 공연이 멈춰지게 되나? 배우들이 예민하다고 낙인찍히게 되나? 온갖 망상을 했던 거 같다. 그리고 연습실에서만 마스크를 쓰고, 공연 때는 벗었는데 안전하다는 느낌보다는 이상하고 아이러니 했다. 밀접하게 같이 생활하고 식사하고 대화 나누고 연습 말고도 많은 것을 같이 하는데, 연습 때만 쓰니까. 왜 그렇게 하는 거지? 써야만 하니까 쓴다? 조금씩 무서워지기 시작하면서 쓴다? 나라는 배우가 예민하게 비춰질까 두려운 감각을 뚫고, 지금 나는 어떤지 너는 어떤지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작은 대화들이 가볍게 스몰토크처럼 오갔으면 좋았을 것을.
필자후기_ 2020년, 연극in 웹진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다. 키워드에는 어김없이 코로나가 들어있었다. 많은 원고를 쓰며 살아왔지만, 새삼 ‘원고 쓰기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2020년을 불안과 무력함, 그리고 개선의 의무와 피로도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나의 생각이나 감정들은 더 이상 들여다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명했으나, 그것을 통해 획득한 전략이나 꽤 괜찮은 관념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걸 굳이 지면에 다시 옮기고 싶지는 않았다. 동시에 나는 이런 것들을 내 동료들과 충분히 나누었을까 회의도 들었다. 그리고 정말 궁금한 것은,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의 구체적인 감각과 감정이었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주재료로 하여 관객을 만나는 포지션인 배우들의 그것이었다.

연습실은 주로 지하에 있기 마련이고, 밀폐되어 있는 공간인 경우가 많다. 그곳에서, 마스크를 쓰고 벗기를 반복하며 소위 말하는 호흡을 주고받으며, 타인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며 그것에 따른 전략을 만들어내었던, 무대 위 존재들의 감정과 생각을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었다. 연극in 웹진에 이러한 생각을 밝혔고, 웹진은 방향의 선회를 수락하며 담론 지향이나 제도 개선 등에 대한 목적 없이 대담을 진행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내어주었다.

내가 진행한 대담은 전형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발언을 자연스럽게 끌어낸 후, 대화를 경청하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대화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체크하고, 때로는 특정 발언을 유도하기도 하고. 원고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소제목을 뽑고 기록된 대담자들의 말을 재분류하고 의견이 완전히 다르지는 않지만 아주 약간 쟁점적인 대화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식으로. 그러나 대담자들은 다른 대담자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도 않았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중했으며 대담이 끝난 후 본인의 생각을 몇 번이나 덧붙여 보내왔다. 결국, 이들 개별의 이야기가 코로나 시대의 배우들로 묶일 수는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완성된 원고를 버리고, 소제목을 대담자의 이름으로 잡고 분류되어 있던 대담자의 말을 합쳤다.

나는 백소정 배우의 말에 동의한다. 코로나 때문에 발생한 연극의 완성도를 감안해서 봐줄 사람은 없고, 감안해서 봐달라고 할 수도 없다고. 하지성 배우는 말했다. 그 공연이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였는지, 왜 관객을 만나고 싶었는지. 우범진 배우는 자신이 받은 피해를 말하는 것이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했다. 동료의 생각과 마음을 들어보고 싶어 기획된 대담에서 대담자들은 많이도 조심스러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20년을 보내며 개인이 겪은 상황과 마음과 생각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의외로, 서로에게 무엇이 구체적으로 왜 힘든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서로 충분히 나눌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계속 논의하고, 연극을 만들고 서로를 배려하느라 말을 아끼는 것에 집중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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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혜

구자혜
‘여기는 당연히, 극장’에서 글을 쓰고 연출을 한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드랙X남장신사>, <로드킬 인 더 씨어터>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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