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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에세이] 세월호 이후의 연극을 떠올리며

4월 16일로부터, 망설임의 윤리

양근애_연극평론가

198호

2021.04.15

7년 전 오늘은 어땠을까. 기억은 공평하지 않아서 어느 날은 통째로 사라져있고 어느 날은 너무 많이 흘러넘친다. 4월 15일까지의 시간은 4월 16일 이후라는 크고 두렵고 웅숭깊고 아픈 시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날 이후, 우리는 다른 세계로 가고 있다. 애도 불가능성을 안고 혐오와 분노를 건너면서 세월호와 함께 가고 있다.
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끝내 쓸 수 없었다는 말을 하려고 이 글을 쓴다. 세월호 연극에 ‘대해’ 쓰지 않고 세월호 이후를 말할 수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속은 것 같다. 지면을 얻은 이후로 거의 매일 뭔가를 썼다. 생일시를 읽으면서 쓰고 기록집을 읽으면서 쓰고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쓰고 심지어 꿈에서도 썼지만 글자들은 글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은 아직 많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은 구체적인 고통으로 상상된다. ‘눈물’이라는 단어를 쓰고 미안해했던 시인처럼,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상상한 죄책감 때문에 더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될 때까지 나는 두려워한다. 영아돌연사증후군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을 때 자다가 벌떡 일어나 잠든 아이의 코에 손을 대보았던 밤들이 있었다. 용산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저 옥상 안에 갇힌 평범한 사람들에게 닥친 화마가 나에게도 닥쳐올 수 있는데. 대학에 들어와 5.18의 아픔이 담긴 광주 영상을 처음 보았을 때도 그랬다. 저 거리에 스러진 사람이 나일 수도 있을 텐데. 세월호 유가족의 슬픔에 공감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나라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내 두려워할 수 있음에 안도하면서, 그렇게 안도하는 나를 미워하면서 두려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나는 그 벽을 마주 보고 앉았다. 등지는 것보다는 마주 보는 것이 나았다.”
- 황정은, 『양의 미래』 中
얼마 전부터 대학원생들과 세월호 세미나를 하고 있다. 세월호를 가리키고 있는 글과 영상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한 달에 한두 번씩 만나서 써온 글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느슨한 모임이지만 매번 가져오는 생각의 두께가 만만치 않다. 우리는 아직 친하지는 않아서 마음에 새긴 문장을 형광펜으로 빛나게 그어 말하지 않고, 참을 수 없는 작가적 태도에 대해 볼드체로 화내지 않는다. 주저하면서, 망설이면서, 판단을 내리는 엄정한 문장 대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지 않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하고 말한다.
그 시간에 자주 기댄다. 대부분 세월호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이라서 그들에게 듣는 이야기가 때로는 너무 깊게 다가온다. 자기도취에 빠진 음모론을 합리적 추론이라고 믿고 있는 어른들의 기만이, 그저 본질로부터 이탈된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은 아는 것 같다. 자기연민에 휩싸인 어떤 소설이, 나에게는 좋아했던 소설가의 실망스러운 변모였지만 그들에게는 처음 보는 나이든 소설가의 익숙한 문법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실소가 나오기도 했다. 함부로 기대하고 함부로 실망하는 일 없이 차분히 살피고 질문하는 방법을 학생들에게서 배운다. 축적된 과거가 아니라 잘못을 되짚어 나가면서 나아가는 미래 쪽으로 몸을 돌려세우고 다음 세대와 더 많이 만나 친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강건해 보이는 바깥이 유약하기 짝이 없는 안을 공격해올 때의 속수무책은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 혼자 있으면 바깥이라는 허상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상처 받은 안을 계속 헤집으면서 시간을 잃어버리게 된다. 세월호 이후 드러난 국가의 무능력과 언론의 무자비함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컸지만 그 문제가 분노로 해갈될 리 없었다. 근본적으로 체제가 갱신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일이다. 시스템이 아니라 그 안에서 분투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로 눈을 돌려야했다. 시스템은 통제하려고 돌출된 외부를 수렴하려 하지만, 두려워하면서도 벽을 마주하는 얼굴들은 다른 중심을 향해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곁’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한다고 상상하면서 나도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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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에 저항하고 주권자로서 또 시민으로서 자기와 타인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가는 새로운 주체를 호명했다. 너무 많은 생명과 너무 소중한 우주를 잃었지만,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벽을 마주하는 유가족들을 통해 ‘피해자다움’ 의 가면을 벗겨내고 진실 쪽으로 한걸음씩 가는 일의 숭고함을 발견하고 있다. 내게는 성폭력 생존자의 용기와 나도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퀴어의 목소리가 다르지 않았다. 장애를 드러내고 정상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 장애인의 몸도 다르지 않았다. 블랙리스트 사태로 검열의 화살을 맞고 거리로 나선 수많은 예술가들의 고민도 다르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세월호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사건 이후에 탄생한 주체. 말할 수 없었던 납작한 세계가 흔들리며 몸체를 일으킬 때, 달라진 세계의 사람들이 그 기둥이 되기 위해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그동안 세월호 연극의 어떤 미진함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러면 안 되는 건 아닌가, 마뜩찮은 마음으로 글을 썼다. 세월호 문학의 어떤 불가능에 대해, 왜 제대로 말하지 않고 언어의 한계만 가리키는지 찜찜해했다. 세월호 영화의 어떤 조심스러움에 대해, 고통의 한가운데를 바라보면서도 에둘러 가는 그 공통된 마음이 무엇을 겨냥한 것일지 고민했다. 내가 쓰기 위한 고민으로 도망치는 동안 잊어버리고 만 것이 있다면, 세월호 이야기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계속되려면 세월호 유가족이 보여준 것처럼 세월호 곁에 있는 사람들이 행동한 것처럼 조심스럽게, 망설이면서, 심문하지 않고 질문하면서, 가까이 들여다보고, 사려 깊게 다가가고, 모르는 것을 재단하지 않고 알게 된 것에 대해 자세히 말하면서,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야하는 것이 아닐까.
벌써 7주기다. 개나리가 돋고 매화가 열리고 목련 봉오리가 말갛게 올라오더니 기어이 4월이 왔다. 온통 4월 16일이다. 4월이 되자마자 <당신의 사월>을 보러 집을 나섰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양말을 꼼꼼히 신고 고개 하나를 넘어 극장까지 걸어갔다. 걸어가지 않았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전봇대의 전단들과 시장 자판의 삐뚤빼뚤한 신발들과 깨진 보도블록과 마스크 속 다채로운 표정의 사람들을 보았다. 오래오래 걸어가고 싶었지만 극장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아무도 없는 극장에 혼자 앉아 처음으로 꺼이꺼이 큰 소리로 울며 영화를 보았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 아이들이 너무 그리웠다.
세월호 참사 직후, 까맣게 잊은 줄 알았던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 와락 덮쳐왔었다. 낡은 건물에 삐거덕 소리를 내던 교실 바닥, 교복 치마 안에 겹쳐 입은 체육복, 쉬는 시간마다 북적였던 복도와 매점, 옆 반 친구에게 빌려온 책의 귀퉁이에 접혀 있던 쪽지, 몰래 이어폰으로 듣던 야자 시간의 라디오. 2학년 때 한반이었던 친구와 오래 통화를 했다. 우리가 그 시절을 건너올 수 있었던 다행스러움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질문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세월호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소리 내어 울 수 있었던 힘으로 다시, 4월 16일로부터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별이 되어 하늘로 간 아이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에서 온 판응옥타인과 그의 남편 권재근 씨, 아들 혁규, 양승진 선생님과 다른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들의 삶이 미래로 진행되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살아온 삶의 두께를 펼쳐지고 그들이 살 수 있었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와 만날 수 있다면, 삶이 계속 되는 한, 세월호는 계속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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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애

양근애
요즘은, 나란히 걷고 함께 웃고 같이 울고 싶어서 쓴다. 『‘이후’의 연극, 달라진 세계』를 썼다. rootsfl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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