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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을 제기하는 은유의 공간으로서의 신체 읽기

“브릭 브리크(brick-break) 플랫폼”의 아고라 연계 프로그램 언씽킹 씨어터 #1

허윤경_안무가

제204호

2021.07.15

‘벽돌 깨기’ 플랫폼이라니. 드라마투르그 김재리와 안무가 장혜진의 코큐레이션co-curation을 통해 만들어진 토론의 장 ‘언씽킹 씨어터 Unthinking Theater’에 대한 설명에서 “탈식민화된 생각들이 발생하는 장소이다.”라는 문장이 눈에 띈다. 우리를 지배하는 ‘지배(/장악, 숙달) 관념 concept of mastery’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한 프로젝트로, 그 첫 번째 행사로 안무가이자 무용수, 장애문화활동가인 페트라 쿠퍼스(Petra Kuppers)의 강연 및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공연예술인들- 국은미 안무가, 노경애 안무가, 문승현 작가, 신재 연출가, 전강희 드라마터그가 패널로 참여한 라운드 테이블이 진행되었다. 나는 현장에서 참관인으로서 이 과정들을 지켜보고 동료 예술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우리가 많은 시간을 거주하게 되는 극장을 이루거나 둘러싼 ‘벽돌’들의 겹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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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씽킹 씨어터 #1 프로그램 안내문
몸을 초대하고 환대하는 감각이 기억에 남는다. “I invite you to...(...하기를 청합니다)”로 시작하는 강연자의 제시는 줌 화면 너머 해외의 청자인 우리에게 호흡에 집중하기를 유도하거나 상기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요즘 화면을 매개로 하는 작업을 많이 하면서 생겨난 개인적 화두로, 공간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성을 놓치지 않게 하는 요소가 무엇일까 고민하던 터라 강연 초반의 이 문장이 반갑게 느껴졌다. 서로 떨어져 있는 몸들은 화면을 통해 나오는 정보를 듣는 존재, 혹은 정보 그 자체로 환원되어 다가오게 되지만, 이럴 때일수록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몸들 모두가 숨을 쉬고 각자의 공간과 피부로 맞닿아있는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화면 너머의 관객의 물리적 현존을 염두에 둔 이러한 설계에서 ‘공연 같은’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 이 후에 강연에서 프로젝트와 자료들을 보여줄 때에도 일방적으로 규정하여 보여주는 태도보다는 이것들이 관객 자신에게 어떤 의미, 느낌 등으로 다가오는지를 살펴보라는 식의 제시가 종종 있었다. 각각의 몸과 몸이 관계를 맺는 생태(에코eco - 소마soma)는 그 자체로 생명을 이루는데, 페트라의 강의는 종종 신체가 오갈 수 있는 서로 다른 층위의 감각 모드를 일깨워주는 순간들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강연이 모두 끝나고 나서 나에게 남았던 키워드는 조금 엉뚱하게도 딱 한번 언급된 형용사 pearlescent(진주 광택의)였다. 말로 구분하기 어려운 여러 색깔들이 공존하고 때로는 레이어의 겹침으로도 보이는 하나의 반사된 빛. 강연을 듣고 여러 패널들과 참여자들의 생각을 들으면서, 내 안에는 공연 예술에서 신체가 어떻게 존재하고 그 자체로서 어떤 이유를 갖는가에 대한 매우 새삼스러운 생각이 좋은 질문으로, 엉덩이를 들썩 하며 자리를 고쳐잡았다. 페트라가 강연에서 소개한 프로젝트 Journey to the Holocaust Memorial in Berlin(베를린 홀로코스트 추모 공원으로의 여행)는 좋은 예시가 되었다. 베를린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 공원은 무수히 많은 네모난 시멘트 조각품들이 물결을 이루는 외관을 가지고 있다. 조각품들 사이의 길은 좁고 울퉁불퉁하다. 많은 장애인들이 죽었던 홀로코스트를 추모하는 공원에 장애인들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아이러니가 있었고, 그것에 대한 저항이자 대안적 기획으로 안무된 것이 이 프로젝트였다고 한다.1)
추모공원의 딱딱한 콘크리트concrete가 일시적이고, 부드럽고, 몸이 경험할 수 있는 또다른 concrete-구체성으로 변환되는 부분이 흥미롭다. 사람들의 몸은 게이트가 되기도 하고, 오른쪽 왼쪽으로 분류되기도 하며, 몸을 만지는 것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말을 듣기도 하고, 낯선 사람의 배에 내 머리를 올려놓고 내 머리 위에는 다른 사람의 머리가 올려진 ‘땋은’ 형상의 일부를 이룬다. 물결치는 듯한 모양의 각진 조각들의 집합은 접촉으로 땋아진 사람들 사이로 연결되는 호흡의 파도wave of breath로 대체되었다. 다양한 몸들이 살아있는 호흡으로 이어져 죽음을 기억한다. 여러 방향으로 연상할 수 있는 움직임들이 일어나는 가운데 몸으로 느껴지는 것들은 아주 가깝게 피부로 닿아있다. 살아있는 신체의 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나의 배 위에는 다른 이의 머리의 무게가 느껴지는 동시에 나의 머리는 다른 이의 호흡에 의해 미세하게 들어올려졌다 내려졌다 한다. 몸에서 일어나는 박동의 리듬이 누군가에게는 자장가가 되기도 한다. 공연에 참여하는 관객과 퍼포머의 신체는, 여러 긍정적, 부정적 기호들 사이에서 언어로 포획하기 어려운 가능성들을 내포하는 새로운 조각품이 되었다. 몸은 무한한 은유가 담길 수 있는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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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씽킹 씨어터 #1 강연 현장 사진 (사진제공_아르코예술극장)
Pearlescent라는 단어는 이 작업의 중요한 접근법으로 소개된 에코-소마(생태-몸)를 설명한 문장에서 쓰였다. 직역하면 에코와 소마가 ‘호흡을 연료 삼아’ 여러 레이어의 진주 같은 빛을 만들어내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낯선 몸들의 연결 속에 존재하는 경험, 그 땋음은 많은 것들을 연결할 수 있다. 신체를 통해 나와 살아있음을 연결하고 피부를 경계로 세계와 만나고 나와 같이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을 느낀다. 홀로코스트에서부터 식민통치로 인한 임의적 분단의 고통을 겪는 나라들과 재난의 피해자들까지 여러 구체적인 사건들을 기억한다. 베를린의 장애인들이 추모공원의 접근성과 관련해 소송을 제기하고 패소한 역사를 잊지 않는다. 신체를 둘러싼 점령과 분류와 통제, 연대와 존중, 감각의 환기는 몸을 통하기 때문에 동시에 일어나 직관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것은 여러 차원의 장벽들을 깨는 힘이 될 수도 있다. 몸 감각으로 개입하여 마련된 은유의 공간에서 의미들은 고정성을 거부한 채 공존하며, 어떤 잠재력을 이룬다. 그것은 영감이 되기도 하고 행동이 되기도 한다.
가능성을 함께 상상해볼 수 있는 공간이자, 정신적 지형을 가시화하고 만질 수 있는 공연하는 신체에 대해, 여러 질문을 전개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강연 내용과 더불어 여러 아티스트들의 실제 작업 경험과 연결되어 보다 다각도로 이야기가 전개된 라운드 테이블까지 함께 하며, 참관자들도 짧게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다른 참관자 한 분은 베를린에 거주하셨던 경험을 말씀해주셨는데, 강연에서 쓰인 추모공원의 사진들에서 보여지는 여러 행동들- 조각 위에 올라가거나 눕거나 산책하는-이 원래는 금지되어 있었다고 한다. 시민들의 토론을 거쳐 보다 다양한 행동이 가능한 장소가 되었던 것. 더 다양한 사람들의 접근이 가능해지는 것은 언제가 될지...알 수 없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의 ‘벽돌을 깨는’ 여러 시도들과 닿아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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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경

허윤경
허윤경은 꾸준히 다양한 작업에서 안무가, 무용수, 퍼포머로 활동해오고 있다. 몸 대 몸으로 공감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무대 언어가 지닐 수 있는 다양함을 발견하는 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맥락 안에서 관점으로 존재하는 신체, 유연하게 변신하는 통합된 기본 매개체로서의 몸에 현재는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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