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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성을 긍정하기

2021 삼일로창고극장 기획프로그램 <불필요한 극장이 되는 법>

최연우

제206호

2021.09.30

극장은 필요한가, 혹은 극장은 유익한가. 최초로 극장을 경험했던 유년 시절부터 연극을 업으로 삼고 있는 지금까지 필자에게 두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 “예”였다. “예”라는 답은 즉각적으로 나왔다. 그러나 대답의 끝에는 언제나 “왜”라는 질문이 꼬리를 물고 뒤따랐다. 때때로 세상이 극장을 잊은 것 같다는 고독과 이 수지타산 안 맞는 일을 왜 계속하고 있는 걸까, 라는 자조와 함께 질문하기를 반복하고 있던 와중에 2021 삼일로창고극장 기획프로그램 <불필요한 극장이 되는 법>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말을 건네는 방식이었다. 기획프로그램에 모인 창작자들이 명명하는 “불필요한 극장”이 무엇인지, 불필요한 극장이 “되는 법”은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도.
삼일로창고극장의 기획프로그램 <불필요한 극장이 되는 법>에서는 2021년 9월 1일부터 12일까지 12일에 걸쳐 극장을 매개로 살아가는 다양한 주체들이 문학, 시각, 영상, 무용, 연극, 토론 등 다양한 장르의 언어로 극장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극장을 상상하기⓵ 불필요한 극장이 되는 법 ― 전시, 낭독극, 퍼포먼스

1층 전시실에서는 백종관의 <초연>이 전시되고 있다. <초연>은 리서치와 아카이빙을 기반으로 한 사진과 영상 전시로, 노동하는 물질로서의 극장, 관객의 작은 움직임들이 만들어내는 서사, 그리고 폐쇄를 앞둔 극장 안에서 그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들까지, 극장에서의 시간의 흔적들을 기록한다. 1층 전시 공간에는 큰길 쪽으로 쇼윈도와 같은 큰 창이 나 있는데, 관객들이 전시를 보는 동안 길을 오가는 행인들은 전시를 보고 있는 관객들을 보게 된다. ‘움직임의 잔상들이 전달하는 시간의 흔적’을 보는 동안 나의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누군가에게 기록되는 이 순간이 무척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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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관 <초연>

2층 테라스에서는 ‘길벗체’ 디자이너 제람의 <극장, 안전한 공간>이 진행 중이다. 초록 인조 잔디 위에는 커다란 흰색 공들이 굴러다닌다. 공에는 다양한 단어와 기호들이 쓰여 있다. 관객들은 이 공을 굴리며 단어들을 조합해 자신만의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알록달록한 길벗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공간에서 나의 존재가 환대받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함께 간 조명 감독과 ‘안전한 작업 환경’ 혹은 ‘작업 환경에서의 안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탁 트인 하늘 아래 볼풀을 굴리며 안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험이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온다.
마빈 쳉의 낭독극 <격려가 될 만한 짧은 이야기>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크리스 루노의 디제잉과 코로나 이전 한국의 일상을 담은 영상, 그리고 여섯 개의 짧은 공연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실리콘밸리베리의 배우들이 열연해 주었는데, 문장들이 서로 호응하지 않거나 맥락을 짚어내기가 어려워 서사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극의 말미에 희곡의 창작 과정이 소개되었는데, 이야기들은 S사의 학습 데이터 20GB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고 한다. 극의 말미에 검정색 화면에 “언젠가 꼭 다시 만납시다.”라는 마빈 쳉의 메시지가 격려가 되었다. 미래(에 사용될 수도 있는 기술들을 이용해 창작한)연극은 역설적이게도 한때 한국에 왔었던 마빈 쳉과 바다를 배경으로 신나게 디제잉을 하고 있는 크리스 루노, 그리고 언젠가 그들을 만나게 될 순간을 격렬하게 그립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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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람 <극장, 안전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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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 쳉 <격려가 될 만한 짧은 이야기>

퍼포먼스 <쇼타임>은 김승록이 현재의 작업을 하게 되기까지의 개인 서사를 톺아본다. 발레를 시작하고, 무대 위 한국 무용의 강렬했던 기억이 계기가 되어 한국 무용으로 전향한 후 지금 현대 무용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퍼포머의 움직임과 관객의 상상력으로 무대를 채운다. 필자에게는 이 작품이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형식과 기술”에서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주제와 개념”으로 변화하는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또한 개인 서사가 점점 확장되어 동시대 무용의 흐름과 만나 큰 줄기를 이루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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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록 <쇼타임>

극장을 상상하기⓶ 극장에 대한 소문(小文)

2층 리딩룸에 들어서면 세 대의 태블릿이 나란히 놓여있다. 태블릿에는 세 개의 텍스트가 전시되어 있다. 세 개의 텍스트는 사라진 극장, 미래의 극장, 자동화된 극장에 대해 말한다. 관객들은 텍스트들을 읽고 ‘리딩룸’에서만 접속 가능한 삼일로위키피디아에서 자유롭게 텍스트를 수정하거나 추가하거나 질문을 던진다.
박재용의 <수행성 과포화 시대의 극장>은 무엇이 극장을 극장으로 있게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정지돈의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극장>은 극장과 인간의 관계 맺기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이홍도의 <아직 연극이 있던 시절에 대한 소문들 또는 변신 이후의 극장>은 죽어가는 연극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다고 감각하는 필자의 불안을 떠오르게 한다. 극장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리딩룸’으로 끌어온 세 개의 텍스트는 모두 ‘지금, 여기’의 극장에 대해 생각하고 질문하게 한다.

불필요한 극장을 이야기하기: 토론 3.15

무대에는 네 개의 기둥, 가운데가 무너진 벽돌들로 쌓아 올린 두 개의 패널 테이블, 그리고 등받이가 긴 사회자석이 있다. 방석이 놓인 객석은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극장의 전체 공간이 아고라가 된다. 이곳에서는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닌 어느 때, 극장에 모인 시민들이 ‘이 도시에 극장이 들어온다면, 시민에게 돌아올 유익은 무엇인가(1부)’와 ‘이상적인 극장의 조건은 무엇인가(2부)’를 두고 열띤 논쟁을 펼친다.
아고라에서 시민들은 ‘극장은 필요한가’, ‘극장은 유익한가’ 등의 극장을 둘러싼 원론적인 질문부터 동시대 공공극장의 역할까지 다양하게 질문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굳이 아쉬웠던 점을 고르라면 극장의 존재와 필요성을 다른 매체나 장르에 대조하거나 비교하는 방식으로 논의되었다는 점과 극장을 연극이 상연되는 공간으로 한정 지어 상상하며 이야기되는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앞으로도 극장이 아고라가 되는 경험을 더욱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번 토론과 마찬가지로 거칠고 서툰 방식으로 각자의 의견을 꺼내어 놓고 경청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극장이 역할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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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3.15

극장: 공간에서 장소로, 시간에서 기억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다양한 형식의 작품들이 극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질문을 던졌다. 필자는 때로는 관객으로서, 때로는 창작자로서 공간에 존재하며 작품들이 던진 질문에 대해 사유하고, 스스로 질문을 확장해 보기도 했다. 프로그램이 모두 끝난 지금,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의 질문은 “극장을 이야기하는 주체는 누가 될 수 있는가”이다. ‘우리’에게 극장은 유익한가,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는 ‘우리’를 어떻게 상상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극장에 대한 경험이 극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한다면 여러 가지 이유로 극장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질문할 수도 있겠다.
프로그램의 마지막이 아고라였던 것이 의미심장하다. 만약 우리가 극장의 유용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이곳이 ‘불필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극장은 거대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게 집단을 이루어 작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작은 이야기들은 주변화된 이야기, 정상성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들은 관객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확장된다.
말들이 발화되고 몸들이 움직이는 극장이라는 공간은 경험과 의미가 축적되어 장소가 된다. 극장에서 관객들은 지금 이 순간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유기체로서의 사회의 기억이 된다. 극장은 불필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무용한 공간으로서 의미가 있다. 앞으로도 극장이 더욱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하며 살아내기를 소망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사진 제공: 삼일로창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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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우

최연우
28년차 프로 관객. 창작(도) 합니다. 오프-대학로와 로터리 연극을 좋아합니다.
인스타그램 @qfv_theatre_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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