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평범한 일상과 기이한 연극(奇劇)

비수기 수기(手記)

김은한

제251호

2024.03.28

무소속 전업 공연예술인은 비수기에 무얼 할까요? 제 경우엔 연극을 합니다. 훈련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연극을 못 하잖아요. 놀기 좋은 시기인데 안타깝습니다. 아니! 연극은 PLAY라며, 노는 거라며~! 라고 너스레를 떨 수도 있겠지만 이런 건 여러분도 원하지 않겠지요? 물론 그 말도 참말입니다. 공연하는 게 정신없이 즐겁답니다. 무척 신나고 오래 하고 싶어요. 만드는 건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그래서 힘든 부분은 줄이고 맛있는 부분만 챙길 수 있도록 궁리해요. 보시는 관객분도 그렇게 느끼면 좋겠네요. 의견을 따로 주지 않으시면 관객의 마음은 모르니까요. (다행히 연극in에서는 기사에 댓글을 달 수 있습니다) 비수기에는 시간이 있으니 다른 취미도 즐깁니다. 저 자신을 프로라고 생각하지만, 연극도 여전히 취미라고 생각해요. 2차 창작으로 재화를 획득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취미의 프로입니다. 자칭하는 건 말릴 수 없지요.

X(구 트위터)에서 그런 말을 본 적이 있어요. 공연예술인은 늘 자극 가득한 환경에서 몰아붙이듯이 일하기에 일상적인 일을 못 한다는 주장이었어요. 쉽게 무기력해지는 건 그 때문이라고요. 한 시절 ‘번아웃 연극’이 많이 만들어진 적이 있죠. 어떤 연극인은 자신을 괴롭히는 개념을 만나면 기어이 연극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걸로 혼쭐을 내주면 좋겠지요. 일종의 백신 개발 행위입니다. 이 이야기가 필요한 사람이 오겠지? 하며 개막해버리고 폐막해버려요. 다만 경쟁업체는 생각보다 많고, 슬픔도 많아서 백신은 상당히 많이 자주 개발됩니다. 연극이 만들어지는 경향을 통해 어떤 지원이나 도움이 필요한지 가늠하는 정책이 마련될 수도 있겠네요.

덜 괴롭고 싶다. 옳지, 생활이 모여 자연스레 연극이 되면 부담이 덜 하지 않을까? 매일 찔끔찔끔 만드는 일이 즐겁기까지 하면 최고 아닐까? 연극의 상태를 통해 역으로 나를 점검할 수도 있을 거야. 요즘은 8시간 자고 나머지 16시간은 4시간에 한 가지 일만 간신히 해내려고 하는데요. 덕분에 기력이 생겼습니다.

<매머머메 럭키박스 주주총회>의 관객이 화이트보드에 그린 그림을 촬영한 사진이다. 핑크색 테두리가 둘러진 화이트보드에 초록색 마카로 소파에 앉은 김은한을 그렸다. 그가 앉은 소파 뒤에는 풍성하게 피어있는 분재와 커튼이 있다. 초록색 선 위에 주황색 마카로 음영과 음표를 그려 넣었다.
관객분께서 그려주신 그림. 자유롭게 공연을 즐길 수 있다.

관객이 원하는 장소로 가서 공연하는 <매머머메 럭키박스 주주총회>라는 방문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는 몰라요. 5월까진 우선 해보려고요. 글 전반부에 배치해서 홍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불쑥 말해봤어요. 무척 홍보 같지요? 뭐, 펜션도 비수기 영업을 하는 법이니까요. 정말로 일이 없어도 되는 시기는 없으니까…. 하고는 있는데요. 연습은 하지 않습니다. 몸도 자연스럽게 풀리기를 기다립니다. 층간소음이 나지 않는 팔벌려뛰기 정도는 해요. 보여지는 직업이지만 어쩐지 ‘몸을 잘 쓰자’, ‘화술을 개선하자’ 같은 건 경쟁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관객분께 얕보이는 편이 오히려 좋지요. 잘 해냈을 때 놀라움도 클 거 같고요. 관객 앞에서 무너지는 것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관객은 공연자가 무심코 약점을 드러냈을 때마저 기뻐할 수 있는 존재니까요. 저는 그렇습니다. 이번 주주총회에선 이런 메뉴를 하고 있어요.

    • 2023년 작업 보고
    • 안담 작가의 <무늬글방>에 참가했을 때 쓴 에세이 읽기
    •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의 첫 장면
    • 내키는 대로 지난 공연의 초고 읽기
    • 이것저것 불평하거나 흉보기
    • 가부키초 괴담 바(bar) 방문기
    • 길에서 우연히 들은 이상한 이야기
    • 일본의 화술 예능 ‘라쿠고(落語)’ 흉내

1년간의 활동이 하나의 공연이 되는 방식으로 4년째 운영하고 있어요. 뭘 했는지 기록해야 하니까 다이어리도 꼼꼼히 쓰고 있습니다. 한 해를 잘 기억해두면 좋은 기억이 많이 남아서 힘이 납니다. 슬픈 기억도 남지만 그건 원래 늘 쭉 언제나 틀림없이 그래왔던 거라서 괜찮아요.

취미생활도 연극의 재료가 됩니다. 무언가 아름다움을 느끼면 다른 사람에게도 나름의 방식으로 보여주고픈 게 창작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흥미의 여정은 이렇습니다. 2022년에 일본의 미니멀리즘 시 ‘하이쿠(俳句)’로 코미디 공연을 했어요. 정경과 시간, 공간이 짧은 표현으로 머릿속에 펼쳐지다니 신났습니다. 이 경험은 제 안에서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졌어요.

  1. 희곡이 더 짧아질 수는 없을까?
  2. 관객의 머릿속에 극장을 만들 수는 없을까?
  3. 하이쿠는 셋업과 펀치라인으로 이루어진 스탠드업 코미디와도 닮았는데, 스탠드업은 지금 인기 있는 장르니까 경쟁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혼자 서서 하니까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 오해도 많이 받고 있어. 긴장과 완화라는 측면에선 괴담이나 추리소설도 닮았지. 쭉 좋아하던 거니까 여기서 배움을 얻으면 어떨까?


1. 가장 짧은 희곡은 사무엘 베케트의 「숨」이라고 하던데 비슷한 장르는 없을까? 그래서 종이 한 장으로 모험을 만드는 대회를 발견했어요. 연극은 가능할까? 종이 한 장이란 건 형식이 애매한 거 같아. 인디 게임 사이트에서 엽서 한 장이나 명함 한 장으로 할 수 있는 놀이를 만드는 행사가 있었네! 출품작을 전부 살펴보자. 마이크로 롤플레잉 게임은 엽편소설 분량의 규칙서라고 하는데, 나노 롤플레잉 게임이라는 거도 있네. 10단어로 이야기를 만드는 놀이가 있고, 2단어, 1단어, 심지어는 철자 하나로 이루어진 놀이가 있어. 아름답다….

2. 낭독 공연은 공연자와 관객이 같이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점이 어려워. 멍 때리는 거도 작품의 일부가 되면 어떨까? ‘당신의 정신이 궁극적인 게임 엔진이다?’ 이건 뭐야? 『Top 10 Games You Can Play In Your Head, By Yourself』이라는 책이 있네. 명상에서 잡념을 잔뜩 흘러가게 하면서 스토리텔링을 접목한 반 농담 같은 책이야. 흥미롭다. 마침 최근에 만든 연극 <침묵하는 것만이 그를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게 분하다>에서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즉흥극 워크숍’을 언급하기도 했으니 읽어보고 응용해야지.

3. 관객일 때 어떤 게 기분 좋을까? 좋아하는 극작가를 떠올려보자. 김풍년, 김연재, 장영 등등. 이들의 연극을 보고 나면 무언가 이상한 기분으로 극장을 나서게 돼. 그 기분을 분석하고 싶지는 않아. 내 나름대로 이상한 기분을 만들어보자. 이상한 책을 읽자! 마침 나는 일본 추리소설 팬. 그런 사람이 결국 도달한다는 일본 추리소설 삼대기서(三大奇書)를 독파한 참이야. 『도구라마구라』, 『흑사관 살인사건』, 『허무에의 제물』로 미스터리 문학사에서 꼽히는 특히 이상하고 기괴한 세 작품을 뜻한다고 해요. 최근에는 이런 소설이 없을까? X(구 트위터)에 추천 도서가 55작품이나 있네. 몇 작품은 이미 읽었고, 국내 발간된 작품은 도서관이나 중고책방에서 구해야겠다. 중고가가 15만 원?1) 으르르…. 이 소리는 재미있다. 나중에 써먹어야지. 그러고 보니 일본에 6시간 분량의 전통 괴담이 있던데 끔찍한 여성 귀신이 사내들을 쏙쏙 저주해서 죽인대. 남성 공연자가 혼자 해도 괜찮은 내용이려나? 읽어보자. 유진 오닐의 희곡 제목이 코스믹 호러 소설과 닮았던데 두 작품을 섞어보면 어떨까?

『Top 10 Games You Can Play In Your Head, By Yourself』의 표지 사진. 빨간색 배경의 책 커버 상단에 영제가 쓰여있고, 가운데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테두리 지어진 공간에는 체스판을 배경으로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헬리콥터, 말을 탄 중세 기사, 체스말, 20면체 주사위,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아서 총을 쏘는 군인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다. 일러스트의 하단에는 편집자와 출판사 정보가 적혀있다. 책 표지의 테두리가 약간 닳아 있다.

덕분에 최근에는 생각만으로 풍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에도가와 란포의 『백발귀』라는 작품을 읽으려고 해요. 알렉산드르 뒤마의 『몽테 크리스토 백작』에 영향을 받아 쓴 마리 코렐리의 『복수』를 쿠로이와 루이카가 『백발귀』로 번안한 소설을 에도가와 란포가 대대적으로 개작한 작품입니다. 열화하고 비약하고 오해하고 종종 아름다워지는 과정이 멋지죠. 연극과 무연한 취미는 요즘 배운 마작 정도인데, 이건 장롱면허의 운전 연습이랑 닮아서 흥미로워요. 마작과 운전이라니, 아직 나는 극장에서 못 본 거 같아. 희곡을 써볼까? 어라! 얼마 전에 산 괴담을 무한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 보드게임이 배송준비 중이래. 이번엔 이쯤 해둘까요. 비수기에는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이 글도 공연처럼 느껴졌다면, 저는 또 놀면서 하나 만든 셈이죠.

[사진: 필자 제공]

  1. 원고를 마감하고 다시 찾아보니 누군가가 구매한 모양이다. 분하다.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김은한

김은한
매머드머메이드 명의로 2015년부터 매년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신작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쉽고 즐거워서 나도 당장 하고 싶은 작고 좋은 연극을 추구합니다.

2024. 4.12 ~ 4.14 인천 응접실 《퍼포먼스 스터디: 메타 씨어터》에서 신작 <영법사의 꿈> 준비 중.

정보/문의 인스타그램 @mammothmermaid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