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부부
홍혜영
제75호
2015.09.03
없는부부,홍혜영
등장인물
혜주(36)
태규(36)
때
현대
공간
신혼집
작지만 아기자기 꾸며진 원룸. 방 중앙에 침대가 놓여있고, 한쪽 구석에 작은 화장실이 있다. 침대 위에서는 부부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
- 혜주
- 잠깐!
- 태규
- (이불속에서 머리를 빼내며) 왜?
- 혜주
- (옆에 둔 핸드폰을 보며) 지금이... 11시 반이니까, 조금만 있다가. 의사가 12시에서 1시 사이랬어.
태규 아랑곳하지 않고, 혜주를 다시 안으려 한다.
그러나 혜주가 기어코 밀쳐낸다.
- 태규
- 의사가 무슨 삼신 할매야. (옆 탁자 서랍을 열어 담배를 찾는다.)
- 혜주
- (비꼬듯) 없어. 아무리 찾아봐도 없을 걸.
- 태규
- 진짜 없네. 버렸어? 그거 내 용돈으로 산거야.
- 혜주
- 서로 협조합시다. 지금 남의 아이 가지려고 이럽니까.
- 태규
- 내 유일한 기호식품이야. 그걸 없애?
- 혜주
- 차라리 술을 마셔.
- 태규
- 알콜 분해효소 없는 거 알면서.
태규 이내 포기하고, 핸드폰을 들고 게임을 시작한다.
혜주도 그 옆에서 핸드폰을 한다.
- 혜주
- (시선은 여전히 핸드폰에 가 있는 채로) 진짜 신기하지 않아? 배란기가 되면, 피부도 고와지고 가슴도 커진대. 나도 그런가?
- 태규
- (핸드폰 게임에 집중한 채) 현질을 못하니 쓸 만한 아이템이 없네.
혜주 핸드폰을 내려놓고 태규를 쳐다본다.
분위기 파악이 안 된 태규, 곁눈질로 혜주를 슬쩍 보고는 다시 게임을 한다.
- 태규
- (시선은 핸드폰에 둔 채로) 넌 애초부터 커질 가슴도 없으셔.
혜주, 태규를 뚫어질 듯 째려본다.
그제서야 분위기 파악한 태규. 핸드폰을 옆에 잠시 내려두고.
- 태규
- 에이 그래도 니가 작은 가슴들 중에서는 제일 크지.어디 커졌나, 안 커졌나 확인 해볼까?
태규와 혜주는 이불을 뒤집어쓴다. 이불 속에서 들려오는 둘의 웃음소리.
- 혜주
- 맞다!
- 태규
- (여전히 혜주를 안으려고 시도하며) 뭐.
- 혜주
- 아까 낮에 집주인한테 전화 왔어. (태규에게 손가락 5개를 펴 보인다.)
- 태규
- (행동을 멈추지 않은 채로) 오백? 까짓 올려줘.
- 혜주
- 오천.
- 태규
- (당황해서 자세를 고쳐 앉으며) 오천?
- 혜주
- 오천.
- 태규
- (버릇처럼 담배를 찾다가) 에잇. 집구석에 있는 게 뭐야.
둘은 잠시 동안 멍하니 가만히 앉아 있다.
- 태규
- 이사를 하던, 전세 연장을 하던 돈을 다운받긴 해야겠지.
- 혜주
- 돈을 대출 받는 거겠지. 게임 아이템이냐? 다운 받게.
다시 잠시 정적.
- 혜주
- 내가 친정에 말은 해볼게. 여보, 아무리 힘들어도 오케이캐시백 같은 데는 안돼.
- 태규
- 오케이캐시백? 오케이저축은행이 아니고? 왜? 부동산 가서 통신사 할인을 해달라고 하지.
둘은 어이없어 웃다가, 다시 정적.
- 태규
- 이러니 대출 해준다는 문자보면 혹하는 거구나. (괜히 더 과장해서 화내며) 그래도 그렇지. 없는 사람들 꾀여서 더 없게 만드는 나쁜 놈들. 아니 내 번호는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이때 혜주의 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 혜주
- 12시네.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여보~~~
- 태규
- 이 분위기에?
혜주 이불속으로 들어가 계속 유혹을 시도한다.
한두 번 튕기던 태규도 못 이기는 척, 넘어 간다.
- 태규
- (이불속에서 얼굴만 내민 채) 이렇게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꼭 애를 낳아야 할까?
- 혜주
- (한숨을 크게 쉬며) 그럼 언제까지 미룰 건데? 4년 뒤면 우리 마흔이야.
- 태규
- 생각해봐. 돈 모아야 한다고 4년 동안 내내 맞벌이했어. 그런데 저축은 고사하고 오르는 전셋값도 감당이 안 돼서 결국 빚쟁이 신세잖아. 여기에 애까지 생기면? 그리고 너 지금 쉬고 있는데, 공과금에 보험금 내고 나면 내 월급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 혜주
- 나 내내 일하다, 두 달 쉬었다. 눈치 주기는.
- 태규
- 그게 아니고, 니가 아이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것도 싫고. 우리 둘만 놓고 보면 문제없잖아. 다른 부부 봐봐. 걔넨 자식과 돈은 있을지 몰라도 사랑과 애정이 없어.
- 혜주
- 난 눈에 보이는 게 있었으면 좋겠어. 돈, 집, 아이 이런 거.
혜주 태규에게서 살짝 등을 돌려 앉는다.
태규, 미안한 듯 혜주를 바라보다가
- 태규
- (분위기를 전환하며) 어? 지금 12시하고 10분이나 지나가고 있어. 의산지 삼신 할맨지가 점지해 준 시간이.
혜주 여전히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 태규
- 에이 이리 와봐. 비록 내가 능력 없는 가장이지만, 파이팅만큼은 있다 못해 넘치는 거 알지? 혜주야~~~
혜주, 못 이기는 척 태규에게 안긴다. 태규 혜주를 안은 채로 이불을 뒤집어쓴다.
- 태규
- 잠깐.
- 혜주
- 왜 또?
- 태규
- 미안. 나 화장실 좀. 배가 살살.
태규, 배를 움켜잡고 화장실로 간다.
- 태규
- (화장실 안에서 목소리만) 나 담배 하나만 주면 안 돼? 그거 없이 쾌변은 힘들단 말야.
혜주는 숨겨둔 담배를 꺼내 들고 화장실로 가서 문틈으로 넣어 준다. 그리고 화장실 문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 혜주
- 이렇게 없이 살다 지쳐서, 있던 사랑까지 없어지면 그땐 우리 어떡하지?
- 태규
- (화장실 안에서 목소리만) 야! 담배만 있으면 뭐해? 라이터가 없잖아.
- 호들갑 작가소개
- 열네 살의 어느 날 UFO를 봤다. 그렇게 나는 특별해졌다. 언젠가 UFO가 다시 나타나 우리별로 데려 갈 거라고 믿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UFO 목격담은 넘쳐났고, 뒤늦게 나는 특별하지 않음을 깨닫고 좌절하던 중 연극을 만났다. 살아있는 진짜 사람들이 내 눈앞에서 특별한 인생을 살아내고 있었다. 이거다! 내가 다시 특별해 질수 있는 방법. 그러나 연극의 주변만 서성이며, 여전히 특별하지 않은 채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