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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선생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이한솔

191호

2020.11.19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 12월까지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배경
멸망을 앞둔 세계. 사람들은 이 세계를 버리느냐, 남느냐를 놓고 논쟁하고 있다.

등장인물
BA선생 : 302571번째 선생의 칭호를 얻었다.
ZAD : 탑 밖으로 나가 살아 최근에 살아 돌아왔다.
A : 원로
B : 원로
C : 원로
-
ZZ : 원로
FGG : UHI와 NMM의 친구
UHI : FGG와 NMM의 친구
NMM : FGG와 UHI의 친구
WEW : ZAD의 친구
-
멸망을 앞둔 세계에도 아직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등장인물로 쓰여지는 것보다 훨씬 더.

내레이션
작가
상상 속의 독자1
상상 속의 독자2
상상 속의 독자3
속마음

- 1막 세 친구
NMM
소식 들었어? 탑에서 사라졌던 ZAD가 돌아왔다는군!
FGG
응. 그것 때문에 긴급 원로 회의가 소집되었나 봐. 아무도 그 녀석이 살아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
UHI
지금 상황에 ZAD가 돌아온 것이 의미가 있을까? 괜히 더 분란만 만드는 거 아닌지 몰라.
NMM
그러게, 원로 회의에서는 어떻게 하려나. 혹시 뭐 아는 거라도 있어?
UHI
글쎄. 여하튼 이제 곧 세계가 멸망하고 말 거니까. 신들이 탑을 떠난 것을 보면.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 뭐.
FGG
그래, 이제 이 탑에는 신들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아.
NMM
(불안해하며) 그걸 어떻게 알아?
FGG
내가 전 층을 다 둘러보았으니까.
UHI
(휘파람을 불며) 와우, 대단하셔라.
NMM
(장난스러운 UHI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너 뭐, 다른 거 알고 있는 거 없냐고.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런 거 말고. 네 어머니는 원로회에서 서기를 맡고 계시잖아.
UHI
참 나, 여기서 원로회에 아는 사람 없는 이가 어디 있어?
NMM
뭐?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
FGG
(화를 내는 NMM을 말리며) 잠깐 진정 좀 해 봐. 불안한 건 알지만, 우리끼리 이럴수록 다들 겁을 먹게 될 거야. 두려움은 쉽게 전염되니까 말이야.
NMM
(약간 진정하며) 그래. 그 말이 맞아. (사이) 나만 아무 소식도 모르는 것 같아서. 다들 나만 두고 어떻게 할까 봐 무서워서 그래.
UHI
(미안해하며) 이봐, 울지 마. 우리가 자네만 두고 어딜 가겠어.
FGG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그들을 바라보다) 그럼 한 번 가볼까?
NMM
(눈물을 닦으며) 뭐? 어딜?
FGG
원로회.
UHI
다행이네.
FGG
뭐가?
UHI
난 또 자네가 탑 밖으로 나가보자고 얘기할까 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거든.
FGG
(웃으며) 아무리 나라도 그런 짓을 하진 못하지. (어깨를 으쓱하며) 뭐 탑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야 원로회를 살짝 보고 오는 건 아무것도 아닌 일 인거나 마찬가지지.
NMM
그래도…. 들키면 큰일일 텐데.
UHI
걱정 마. 우리 엄마가 원로회 서기니까 엄마를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원로회가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고 하면 될 거야.
FGG
너 엄마를 찾아가 본 지 얼마나 됐어?
UHI
글쎄? 한 1년? 아니…. 그때 이후니까 2년이 넘었나? …3년인가? 뭐, 어찌 되었든 자식이 부모를 보러 가는 거야 언제가 되었든 당연한 일 아니겠어?
NMM
넌 참…. 어디 가서든 잘 살 거야. 너와 소식이 끊어져도 네 걱정만은 안 할 거야.
UHI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이제 가보자.
NMM
어디로 가야 하는데?
UHI
응? 나는 모르는데? (발끈하여) 가보자고 한 사람이 있으니까 그 사람이 알고 있겠지!
FGG
맞아. 내가 길을 알아. 가자.
셋 퇴장한다.
- 2막 원로회
ZA는 다급한 표정으로 뭔가를 주장하고 있고, 원로들은 심각하게 옆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메모를 하거나 몇몇은 아예 자포자기한 표정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BA선생이 고심하며 앉아있다.
ZAD
지금 한시가 시급합니다! 여기 말고도 아직 살 수 있는 다른 곳이 있다고요!
A
지금 그걸 우리가 몰라서 이러고 있는 줄 아나?
ZAD
그럼 대체 어떤 걸 모르시나요? 이 세계는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는 걸 아직 모르시는 건가요?
B
아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니까 그러네! 젊은 녀석이 혈기만 믿고 날뛴다고 일이 해결되는 줄 알아? 쯧쯧.
WEW
방금 그 발언 굉장히 꼰대같았습니다. 원로님.
B
뭐, 뭐? (뒷목을 잡고 쓰러진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놀라 쓰러진 B를 부축한다)
WEW
(신경도 쓰지 않으며) BA선생님 어쩌면 좋을까요?
BA선생
…….
C
그렇게 입만 다물고 있지 말고 이렇다 저렇다 생각이라도 말해보게!
ZAD
(BA선생에게 다가가 정중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선생님. 무례한 줄은 알지만 지금 이딴 소모적인 얘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저는 봤어요. 이미 주변 세계들은 거의 무너져 내렸다고요. 하지만 그 너머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제가 길을 알아요.
D
세계가 그렇게 쉽게 멸망하진 않아 젊은 친구. 그리고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우리 원로회는 멸망하는 세계를 기리며 그 자리를 지킬 걸세. 갈 거라면 젊은 자네들이나 가도록 해. 자네들의 앞길이 평탄하길 기구도는 해 주지.
ZAD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묘비명을 새겨줄 사람이 없어서 아쉽네요.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다른 젊은 세대들도 분노하며 모두 ZAD의 뒤를 따른다. WEW만 BA선생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천천히 나간다.
B
(실눈을 뜨며) 다들 갔나?
BA선생
네. 갔습니다.
C
자네 연기력이 아주 그냥, 응? 배우 뺨치는 수준이야?
B
흐흐, 어떻게 알았나. 내가 왕년에 연극 좀 했지.
C
뭐 어떻게 이 정도면 우리의 의사는 충분히 전달된 것이겠지.
BA선생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D
그럼. 젊은 녀석들 앞길을 우리 같이 오래 산 늙은이들이 막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더 이상 저 젊은 애들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못해. 저 애들이라도 이 세계를 탈출해서 살아가야지.
A
그럴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은 우리가 끝까지 보듬고 말이야.
W
그러는 선생이야말로 정말 저들과 같이 가지 않아도 되겠나?
BA선생
네. 저도 이제 선생 이름을 물려 줄 때가 되었지요. 그런데 아직 마땅한 재목이 보이지 않아 걱정입니다.
Z
꼭 그럴 필요가 있나? 자네는 우리 같은 이에 비하면야 아직 살 길이 창창한데. 그리고 저 애들에게도 자네가 필요할 거야.
BA선생
(망설이다) 사실 저는 아직도 이 결정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저 애들은 약한 자들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평생을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C
그럴 수야 있겠다만, 역시 죄책감을 갖고라도 살아가는 쪽이 좋지. 우리와 이런 다 낡아빠진 세계와 함께 죽는 것 보단 말이야.
BA선생
하지만……!
D
어허, 이미 끝난 이야기 반복해서 뭐하겠나.
그때 회의실 밖에서 FGG가 난입한다. 그 뒤에 NMM이 FGG를 말리고자 사색이 되어 뛰어 들어온다. 그리고 잠시 후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의 UHI가 따라 들어온다.
FGG
갑자기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정말로 우연히 원로님들이 하시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W
하하, 요즘 젊은이들의 패기란. 좋아요, 어떤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들어나 봅시다.
FGG
지금 저희만 떠나게 하기 위해서 원로님들은 같이 움직이지 않기로 결정하신 건가요?
D
이거야 원. 연기한 것이 소용없을 정도로 다 들었구만.
B
그걸 말하고 다닐 생각은 아니겠지?
FGG
네.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제 입으로 하고 다닐 생각은 없습니다.
A
(발끈하여) 부끄럽다고? 우리가 지금 자네들을 위해서 희생하겠다고 하고 있는데, 지금 부끄럽다는 얘기가 나왔나?
C
진정하시죠. 자기들이 부끄러워진다는 뜻이겠지요.
FGG
아닌데요. 원로님들이 부끄럽다는 뜻이었는데요.
B
뭐? (또다시 뒷목을 잡는다)
FGG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멸망하는 세계에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맞이하는 원로들이라니, 얼마나 한심스럽습니까.
NMM
야아, 왜 그래, 너 진짜.
FGG
가만히 앉아서 죽는 건 쉽습니다. 그런데 이 세계 밖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줄은 아십니까? 검은 강을 수천 개, 아니 수만 개는 지나야 다른 세계에 겨우 도착할까 말까인데, 젊은 저희들만 믿고 손 놓고 계실 생각이라니요. 하물며 같이 따라나서서 길잡이가 되어 주시고…….
W
(말을 끊으며) 그걸 몰라서 우리가 여기에 남기로 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보다 짐이 될 일이 더 많을 겁니다.
FGG
글쎄요. 여기서 가만히 죽는 것보다야 더 도움이 될 일은 많을 것 같은데요. 하다못해 미끼라도 되던지요. 젊은이들이 잡아먹히기 전에 몸이라도 던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그렇게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아서 미리 죽으려고 자리 깐 거 아니십니까? 그러니 원로님들이 부끄러울 수밖에요.
BA선생
말이 심하군.
FGG
하나도 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처참한 꼴을 당할지 몰라도 살기 위해 세계를 버리고 떠나겠다는데, 당신들은.
NMM
FGG…….
FGG
(감정이 더욱 격해져서) 당신들만 좋은 꼴로 죽겠다고.
NMM이 FGG를 달래며 회의실을 나간다. 원로들은 침통한 표정이다. 작게 울음소리도 들린다.
BA선생
제게 붙어 있던 과분한 선생 칭호를 이제야 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BA선생의 가벼운 목소리에 원로들이 모두 그를 쳐다본다.
BA선생
선생으로서의 마지막 결정입니다. 그런 만큼 원로님들도 따라 주시리라 믿습니다.
BA선생 자신의 결정을 말하고, 남아 있던 UHI가 그 이야기를 듣고 ZAD 일행을 찾기 위해 뛰쳐나간다.
- 3막
내레이션
아마 BA선생과 사람들이 결국 모두 함께 네모난 세계를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세계에 도착하기까지의 험난한 여로, 그 사이에 있을 눈물 없이 못 볼 이별, 마침내 살아남은 이들이 새로운 세계에 도착하여 다시 보금자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 이것들이 모두 3막에서 다뤄질 만한 것들일 것이다. 하지만 3막은 쓰여 지지 않는다.
- 4막
‖: (도돌이표)
내레이션
(긴 사이) 그해 우리 집에는 바퀴벌레가 들끓었다.
:‖ (도돌이표)
희곡은 여기서 끝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이라고 쓰였어야 할 곳에 도돌이표가 있다. 마지막 내레이션이 다시 시작된다.
- 5막
5막은 도돌이표로 돌아간 4막의 삭제 된 문장들이다. 불이 밝아지면 작가가 글을 쓰고 있다. 내레이션은 작가의 글을 읽는다.
내레이션
그 해, 우리 집은 재개발 지역에서 제외되었다. 한끗차이였다. 우리의 낡은 아파트보다 더 낡고 낮았던 아파트들이 모두 헐리고 여름날 긴 밤 내내 뜨겁게 울리던 맹꽁이 소리는 영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 집 앞은 바로 공사장과 맞닿아 있다. 지금은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하게 보이는 하늘 아래 멸망한 세계의 잔해들이 널부러져 있다. 그 잔해마저 깨끗이 치워진 후에는 내 상상으로는 닿을 수도 없을 만큼 높은 아파트가 지어질 것이고 그만큼 하늘은 좀 더 비좁아지리라. 그리고 우리 집에는 바퀴벌레들이 들끓었다. 저 멸망한 세계를 건너오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우리 집에서 살던 바퀴벌레들이 평화를 만끽하며 증식한 것뿐일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해 여름, 우리 집은 새까맣고 반들반들한 바퀴벌레들에 장악당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도 없는 우리 집에 들어갈 때면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다. 현관문을 열고 복도의 불빛이 갑작스럽게 집 안으로 들이닥치면 어두운 형체가 순식간에, 츠츠츠 소리를 내며 집 안으로 스며들 듯 사라지는 것을 몇 번 목격했다. 어느 날은 타자를 치고 있는 내 머리 위로 NMM이 떨어졌다. 발을 헛디딘 모양이다.
NMM
어이쿠!
작가
응? 이게 뭐야…아악!
내레이션
천장에서 툭 떨어진 바퀴벌레가 내 머리 위에 안착하고는 자기도 소스라치게 놀라서 허둥댔다. 작가의 머리 위에서 떨어진 NMM은 빠르게 방 한쪽 구석으로 사라졌다. NMM은 아마 신의 머리 위에 떨어지고도 살아 돌아온 이로 자신들의 세계에서 칭송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에 나는 핵폭탄으로 멸망 위기에 처한 인간들이 살아남기 위해 거대한 바퀴벌레가 되고, 학교에 모여 인간의 역사를 공부하는 꿈을 꾸었다. (사이) 어쩌면 이 문장들은 전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 한 문장도. 가장 완벽한 결말은 좀 더 간결한 것일 텐데. 여기서 중요한 문장은 단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나의 떨쳐버리지 못한 미련처럼 쓸데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사이) 악보에 도돌이표가 있는 것처럼 글에도 도돌이표가 있다면 어떨까? 그래서 그 하나의 문장이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생성되는 문장들이 어떤 것일지 알 수 있다면 어떨까. 고민하며 앞 문장을 전부 지운다. 아니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 고민하다, 반쯤은 드러내고 반쯤은 지우는 길을 선택한다. 가운데 밑줄을 긋는다. 이렇게 애매모호한 태도로 살아가니 삶이 이 모양인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포기하지도 선택하지 못하고 밑줄을 찍찍 긋는 것으로 대충 지웠다고 생각하고 다음 문장으로 서둘러 나아가는. 그런 삶. 이 문장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 지워진 이 문장들, 이제 문장을 넘어서 한 문단도 훌쩍 넘어가는 쓸모없는 생각의 흐름. 읽기도 힘든 이 문장들을 읽어도 좋고 읽지 않아도 좋다. 어떤 독자들은 눈이 아플지도 모르겠다.
상상 속의 독자1
(반쯤 읽다가 뒤에 그만큼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욕을 한다.) 이게 뭐야……. 읽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상상 속의 독자2
(신경질적으로 스크롤을 내리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읽는 사람은 생각 안 하고?
상상 속의 독자3
……. (말없이 스크롤을 내린다.)
내레이션
(사이) 두렵다. 독자와의 대화는 두렵다. 내 상상 속의 독자들은 언제나 화가 나 있다.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하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한다. 내 생각은 알아줬으면 하면서 마음대로 쓰면서 독자의 생각을 알게 되는 것은 두렵다. 그런데 또 궁금도 하다.
속마음
가운데 밑줄은 내가 생각해도 좀 너무했는데. 무난하게 빨간색 글씨로 쓰는 건 어때?
내레이션
(주눅 들어) 가운데 밑줄로 삭제를 알리려던 시도는 독자의 눈 건강을 위하여 포기하고, 조금 더 읽기 편하게 원고에서 삭제를 뜻하는 붉은 색으로 지우고 싶은 말의 색깔을 바꾼다.
속마음
오 아예 눈에 좋은 파랑색을 쓰는 건 어때.
내레이션
(바꿔본다)음, 파랑색.
속마음
아니 이런 쨍쨍한 파랑색은 눈이 더 아픈 것 같은데. 에라, 그냥 빨강색으로 가자.
내레이션
오케이.
속마음
고고. 근데 이거 왜 다 쓰여지고 있는 거야? 미친 거야? 이봐, 들려? 아니. 보여? 이거 왜 쓰고 있는 거냐고! 이거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속마음은 소리치고 작가는 아랑곳 않고 글을 쓰고 내레이션은 글을 읽는다.
내레이션
그리고 이 삭제 된 5막의 글들은 어떻게 공연될 수 있을까? 무대에서 내레이션 역할의 배우가 올라가 입만 뻥긋뻥긋하게 될까? 입 모양을 보고 사람들이 사라진 맥락을 읽을 수 있도록? 결국 읽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귀찮고 피곤하기만 한 이런 작업을 나는 왜 하고 있는 걸까?
속마음
음……. 있어 보이려고?
내레이션
(아니라고 말하며 다른 이유, 예를 들면 바퀴벌레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장면을 독자가 아무런 예고 없이 읽게 될 텐데, 그렇다면 독자들의 입맛이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다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짐짓 속마음을 무시한다) 아닌데?
속마음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데 있어 보이려고 그러니까 독자가 무서운 거 아니야?
내레이션
(아까보다 더 화내며) 아니라고! 아 진짜 아니라고!
속마음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화를 내.
내레이션
(속마음을 노려본다. 속마음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잠시 사이. 속마음에게만 들리게 작게.) 너 때문에 어디까지 말했는지 까먹었잖아.
속마음
아까부터 하려던 말은 한참 지나치고 완전 헛소리만 해대던데. (내레이션이 노려보자 사뭇 진지하게) 가장 완벽한 결말. 쓸데없는 건 다 지우고 가장 간결한 한 문장. 중요한 단 하나의 문장.
내레이션
(생각난 듯) 아 맞다. (그리고 멋져 보이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하지만 이런 과정들이 있은 후에야 마지막 한 문장이 나올 수 있었다. 오직 이 한 문장을 위해서, 이 세계가 만들어졌으니까. 이 희곡은 이를테면 거꾸로 쓰여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 5막 혹은 6막. 사실은 도돌이표 안의 4막
내레이션
6막은 도돌이표에 의해 반복된 4막이다.
(긴 사이) 그 해, 우리 집에는 바퀴벌레들이 들끓었다.
(더 긴 사이) FINE.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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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솔

이한솔
연극을 합니다. 하고 있습니다. 하고 싶습니다. 자유롭기 위해서 연극을 합니다. 희곡이란 것을 쓰고 있지만 아직 희곡이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쓰고 싶은 것을 씁니다. 일단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유로운 일인 것 같습니다. 다 쓰고 나면 후련해지니까요. 아니 그건 그저 마감에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려나. 검수를 하려니 눈 앞이 흐려집니다. 그런 병도 있나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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