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갈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배해률
192호
2020.12.03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 12월까지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 12월까지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나
너
무대
너의 아지트
나
너
무대
너의 아지트
1.
네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보일러실.
네가 주워온 반짝이는 것들이 이곳을 가득 메웠다.
나, 그 사이에 자리한다.
너, 나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네가 주워온 반짝이는 것들이 이곳을 가득 메웠다.
나, 그 사이에 자리한다.
너, 나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 너
- 어떤 이름이 어울릴까-.
- 나
- 글쎄-.
- 너
- 말을 하네!
- 나
- 비밀이야.
- 너
- 비밀! 그래, 비밀을 듣고 싶었어. 어쩌면 그래서 널 데려온 거야.
알지? 니가 있었던 그 계곡. 계절마다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 각 계절에 어울리는 장소들로. 봄에는 꽃이 많은 곳, 여름에는 물이 흐르는 곳, 가을에는 노을이 예쁜 곳, 겨울에는 함박눈이 쌓인 곳! 아, 운이 좋다면 아직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 곳.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눈 속에서 끓여먹는 라면은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맛있다구.
그때, 그날, 꽤 깊었던 그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던 중이었어. 바닥에서 뭔가 반짝이는 거야. 꺼내보고 싶었지. 내 동생이 “원해?” 그러더니, 갑자기 잠수를 하는 거야. 동생 말에 따르면 십 초도 안 돼서 다시 물 밖으로 올라왔다고 했지만, 난 그 순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길게 느껴졌거든. 동생이 마침내 물 밖으로 튀어나와서 드디어 내 손에 너를 올려줬을 때, 와, 모든 걸 다 가진 것만 같았어.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잠만 잤는데, 그 와중에도 내가 너를 품에 꼭 안고 있었대. - 나
- 알아. 조금 답답하더라.
- 너
- 미안.
- 나
- 비밀을 듣고 싶다고...? 음...
그 계곡, 실은 나도 우연히 도착한 곳이야. - 너
- 그럼 원래는 어디 있었는데? 더 깊은 산속에? 계곡물을 타고 흘러 흘러 다닌 거야?
- 나
- …아니!
- 너
- 그럼?
- 나
- 아니야, 그만둘래.
- 너
- 괜찮아, 해봐.
- 나
- 한도 끝도 없을 거야. 듣기 싫은 이야기도 있을 거고. 그래도 괜찮겠어?
- 너
- 마침 이름을 정해주려던 참이었잖아. 내 이름은 우리 부모님의 러브스토리를 바탕으로 지어졌거든. 엄청난 이야기야. 고난을 딛고 마침내 만나게 된 꿈같은 순간. 그런 아름다운 순간을 나한테도 주고 싶었대. 너한테도 내가 너의 그 비밀에 걸맞은 이름을 찾아줄게.
- 나
- 넌 전에 나를 주웠던 사람들과는 다른 것 같아.
- 너
- 내가 처음이 아니었어?
- 나
- 당연하지.
- 너
- 신기해. 궁금해. 내가 그 사람들이랑 어떻게 다른데?
- 나
- 특별해지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것 같아, 사랑을 주는 것과 받는 것에도. 자기 자신의 역사에서 사랑을 가장 중요한 흔적으로 삼고 싶어 해.
- 너
- 어려운 말을 좋아하는구나.
- 나
- 어렵지 않아. 여름을 좋아하면서도 겨울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함박눈이 내리던 날 먹었던 라면과 함박눈이 내릴 어느 날 먹게 될 라면까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 너
- 음... 그래.
- 나
- 만약 니가 조금 더 늦게 혹은 조금 더 일찍 계곡 아래를 내려다봤다면, 반짝이는 건 내가 아니었을 거야. 우연한 타이밍! 그 순간의 햇빛과 계곡의 물결과 너의 시선이 정말로 우연히 나를 가리켰지.
- 너
- 엄청난 거네!
- 나
- 그냥 우연이라니까.
- 너
- 엄청난 우연인 거지. 데려오길 잘했다. 물어보길 잘했어.
- 나
- 너... 내 비밀들이 그렇게나 듣고 싶어?
- 너
- 말했잖아,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주려면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해. 고르고 골라서 가장 어울리는 걸 붙여줄게. 아, 근데 혹시 벌써 이름이 있는 건 아니지?
- 나
- 있을 때도 있었고, 없을 때도 있었지.
- 너
- 그럼,,, 어느 때가 더 좋았어?
- 나
- 너, 어쨌든, 어떻게든 나한테 이름을 붙여주고 싶잖아. 얼굴에 다 쓰여 있어. 혹시 내가 거부하면 어쩌나 떨고 있는 거 다 알아.
- 너
- 티나?
- 나
- 엄청.
- 너
- ...부탁할게, 이름 꼭 지어주고 싶어!
- 나
- 한번은...
- 너
- 한번은?
- 나
- 한번은 바다였어. 그 해안가에서 파도에 밀리고 쓸리며 왔다갔다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어. 그때는 지금보다 몸집도 더 컸지. 계절이 분명하지 않은 어느 날이었어. 겨울에서 봄이었나. 가을에서 겨울이었나. 어쨌든 바닷물은 얼음장 같았지. 그 파도에 그 사람이 발을 담갔어. 더 깊은 곳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다가, 그 사람 발에 내가 닿은 거야. 그 사람... 나를 건져 올리고, 한참을 바라보더니, 걸음을 돌려 다시 해변으로 올라갔어. 내가 반짝였대. 자길 살렸대. 그렇게 나는 그 사람 집에서 한 동안을 지냈어.
- 너
-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 나
- 그래. 나도 그 사람이 나를 발견했던 그 순간, 정확히 그런 말은 아니었지만, 그런 생각은 했던 것 같아. 나는 언제나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됐었어. 그 사람을 살리는 방법은 그걸로 충분했어. 그런데... 너, 익숙해진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
- 너
- 더 이상 조마조마하지 않게 되는 것.
- 나
- 너는 그 사람과 정말 다르구나.
- 너
- ......?
- 나
- 어느 날, 그 사람은 나를 두고 집을 나갔어. 돌아오지 않았어. 아마도 나를 건졌던 그 바다에 다시 간 게 아닐까 싶어. 거기서 우연히 마주친 또 다른 반짝이는 것들이, 익숙해져 버린 나로 인해,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그 파도 속으로 천천히...
- 너
- (말 자르며) 무서워. 그만해!
- 나
-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며. 내 이야기가, 내 비밀이 궁금하다며. 내가 말을 해서 다행이라며.
- 너
- ...집에 갈래!
- 나
- 지금 떠나면, 나는 영영 말을 하지 않을 거야.
비밀은 영원히 비밀로 남을 거고. - 너
- ......
- 나
- 그 사람이 집을 나가고 한참이 지나서, 그 사람 애인이 나를 찾아왔어. 나를 사정없이 바닥에 내리쳤지. 그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게 마치 내 탓인 것처럼. 내 몸 이곳저곳에 남아있는 상처들 중 일부는 그때 생긴 거야. 내팽개쳐진 건 나였는데, 우는 건 그 사람 애인이었어. 그다음날 새벽에, 나를 들고 산을 올랐어. 상처를 내서 미안하다면서, 니가 나를 찾았던 그 계곡의 상류에서 나를 풀어줬지.
- 너
- 그 사람들은 너를 뭐라고 불렀어?
- 나
- 서로의 이름으로.
사이.
- 나
- 자, 너는 나를 뭐라고 부를 거야?
2.
한참이 흐르고,
네가 이따금 들리는 어느 오피스텔. 너의 작업실.
네가 쓰다만 글들이 한 가득이다.
나, 그 사이에 자리한다.
너, 내 옆에서 열심히 글을 쓴다.
네가 이따금 들리는 어느 오피스텔. 너의 작업실.
네가 쓰다만 글들이 한 가득이다.
나, 그 사이에 자리한다.
너, 내 옆에서 열심히 글을 쓴다.
- 너
- 내일이 마감이야.
- 나
- 알았어. 조용히 할게.
- 너
- 조용히 한다면서 조용히 하지 않는 게 너의 특기라는 거 알아. 마감을 앞두고 있을 때는 더 심해. 시간이 없다고 하면, 더 재잘재잘 떠들지.
- 나
- 그리워.
- 너
- 또 시작이네.
- 나
- 그 계곡. 그때의 우린 유난히 반짝였지-.
- 너
- 아이고, 낭만 납셨네. 낭만 납셨어.
- 나
- 언제 한번 같이 갔으면 좋겠어.
- 너
- 돌아가고 싶어?
- 나
-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네가 그 보일러실을 떠날 때, 반짝이는 수많은 것들 중에 나를 선택했을 때, 나는 네 곁에 더 있어보기로 했어.
- 너
- 고맙네-.
사이.
- 나
- 바빠?
- 너
- 어째 잠시 조용하다 했어.
- 나
- ......
- 너
- 가고 싶어도 못가.
- 나
- 어째서?
- 너
- 그 계곡, 입산금지 때문에 등산객을 더 이상 받지 않아. 한참 됐대.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라고 했어. 아쉽지. 거기 참 좋았는데. 하긴 그렇게 좋은 곳에서 넓적한 바위를 불판 삼아 고기를 구워 먹었지. 그 맑은 계곡물에서 샴푸로 머리를 감았어. 사람들이 안 가는 게 그 계곡 입장에서야 더 나아.
- 나
- 너 같은 사람들이라면 괜찮을 텐데.
- 너
- 고기도 샴푸도 다 내 이야기인데?
- 나
- ...테스트 같은 걸 하면 어때? 내 앞으로 줄을 서라고 해. 내가 질문을 하고 사람들이 답을 하는 거야. 내가 판단할게. 어떤 사람이 그곳에 가도 되는지. 엄격하게.
- 너
- 나 같은 사람들이라면 괜찮다며. 이미 판단 미스. 너한테 자격 없어.
사이.
- 나
- 기억나?
- 너
- 어째 또 잠시 조용하다 했어.
- 나
-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 했잖아. 너처럼 신중한 사람은 처음이야. 너를 만나고 한참이 지났어. 그 보일러실에서 너의 소중한 보석이 되었다가, 너의 친구가 되었다가, 너의 요정이 되었다가, 너의...
- 너
- (말 자르며) 조용!
- 나
- ......
- 너
- 내일까지 보내주지 않으면, 안 돼. 이미 미룰 만큼 미뤘다고.
- 나
- 알았어. 가만히 있을게.
사이.
- 나
- 혹시 내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 너
- (한숨)
- 나
- 어떤 이야기를 쓰는 건데? 어? 어?!
- 너
- 뻔하지 뭐, 사랑 이야기. 우연히 만난 서로가, 해소되기 위한 오해를 딛고, 결국에는 운명적으로 사랑하는 뭐 그런 이야기.
- 나
- 뻔하지 않아. 기억나? 너를 만나기 전에 만났던 그 사람. 그 사람과 그 애인. 그 사람들 나를...
- 너
- (말을 받으며) 서로의 이름으로 불렀다고 했지.
- 나
- 그래.
- 너
- 그런 사람이 나에게도 찾아올까 싶었어.
- 나
- 아니다. 그렇게 만은, 그 사람들의 이야기만큼은 쓰지 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다시 조각나고 깎여나갈 것만 같아. 아파.
- 너
- 그래, 그래.
- 나
- 지금 니가 만나는 사람은 그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닌가 봐?
- 너
-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 계속 줄을 타다가 어제야 정했지. 아, 얘는 아니다.
- 나
- 무슨 일이 있었는데?
- 너
- 어제는 영화 보고 나와서 버스를 타려고 했어. 정거장이 아직 백 미터는 더 남았는데, 우리 옆으로 우리가 타야 할 버스가 쌩 지나가는 거지. “잡아야 돼! 저거 타자!” 하는 거야. “다음 거 타면 되지. 뛰기 싫어.” “아니야, 뛰어!” “뛰기 싫다니!” “뛰라고!” “싫다고-!!”
결국 뛰더라. 나만 두고. 나쁜 새끼. 혼자 타고 갔어. 전화를 해선 나한테 화를 내더라. 왜 지가 화를 내. 혼자 뛰어서 가버린 건 지면서. - 나
- ...안 뛰고 가만히 서버린 것도 너였잖아.
- 너
- ...이제 진짜 조용히 해. 마감 시간 다가온다. 쫄려.
- 나
- 만약 예전에 너였다면 어땠을까.
너, 듣지 않는다.
- 나
- 기억나지? 수많은 나의 흔적 속에서 그럼에도 좋은 것들만 찾으려고 했었잖아, 본능적으로!
너, 듣지 않는다.
- 나
- 어제 말고 다른 순간들도 기억해봐. 기억나지 않으면 새로 만들어. 그래, 함박눈이 내리는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건 어때? 버스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는 곳으로!
너, 듣지 않는다.
- 나
- 알았어. 조용히 할게.
- 너
- 고마워.
- 나
- 어?
- 너
- 덕분에 마감을 지킬 수 있었어.
- 나
- 그래? 다행이다! 내가 뭘 어떻게 도와준 거지?
- 너
- 나를 만나기 전에 너를 바다에서 건져냈던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애인. 그 둘의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랐지. 니가 계속 떠들어댄 덕분이야.
사이.
- 나
- 그 다음은...? 버스가 다니지 않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런 곳으로의 여행은?
- 너
- 그런 말을 했어?
- 나
- ......
- 너
- 좋은 생각이야. 그런 여행이라면 몇 번이고 해도 질리지 않겠어.
- 나
-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 너
- 언젠가는 가야지.
- 나
- 그래!
- 너
- 너도 꼭 데리고 갈게.
- 나
- 그래!
- 너
- 하지만 그 전에 하나만 더 쓰고 가야겠어.
- 나
- 뭘...?
- 너
- 너한테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들. 니 몸에 그어진 수많은 상처들. 아플수록 직면해야만 하는 것들.
- 나
- 누가, 니가?
- 너
- 우리가.
사이.
- 너
- 왜 갑자기 조용해진 거야?
- 나
- 글쎄.
- 너
- 떠들어도 돼. 나는 신경 쓰지 마.
3.
한참이 흐른 뒤.
비바람이 강하게 부는 어느 날.
오래전 내가 우연히 만난 계곡.
그 위에 지어진 너의 별장.
비바람이 강하게 부는 어느 날.
오래전 내가 우연히 만난 계곡.
그 위에 지어진 너의 별장.
- 너
- 언제부터였을까. 니가 말을 멈춰버린 거. 이제야 짐작이라도 해보는 거야. 지금의 나는 책상 앞에 꼿꼿이 앉기 위해 그때의 나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들여야만 해. 그때의 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은 노력. 니 그 끝도 없는 비밀들이 다시 듣고 싶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어땠는지. 그것도. 너라면 기억하고 있을까 싶어서.
니 입을 열기 위해 이곳에 별장을 지었어. 자격을 얻었거든. 이곳의 입산금지는 이제 나한테만큼은 예외야. - 나
- 몰랐어.
- 너
- 드디어!!
- 나
- 여기가 그곳이었다니.
- 너
- 창밖을 봐. 그 계곡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창을 엄청 크게 냈어. 가장 투명한 창을 골랐고. 어때? 맘에 드니?
- 나
- 나가봐야 알겠어.
- 너
- 듣고 있었겠지만, 나는 이제 일상을 보전하는 것에도 전보다 더 큰 의지가 필요해. 더 큰 용기가 필요하고. 저런 비바람을 이길 만큼의 의지와 용기는 없어. ...적어도 지금은.
- 나
- 그 의지와 용기가 생겼을 때, 다시 말을 걸어 줄래?
- 너
- ...미안해. 미안했어. 이 별장은 니 이야기들로 지은 거나 다름없어.
- 나
- 내 이야기라고만은 하지 말자. 너를 만나기 전에 마주쳤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했으니까.
- 너
- 그래 그들에게도 미안해. 그렇지만...
- 나
- 그렇지만?
- 너
-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이 계곡도 이 세상도.
- 나
- ...진짜야?
- 너
- 의사가 선고를 내렸어. 요양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짧더라도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꿈을 이룬 거지. 너의 이야기 덕에 내 마지막 순간을 남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고귀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어. 고마워.
사이.
- 나
- 무슨 말을 듣고 싶은데....
- 너
- 드디어...! 아직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들. 너의 시작?
- 나
- 너무 오래전이라.
- 너
- 생각나는 대로 말해줘.
- 나
- 믿기 힘들겠지만, 그때는 이 계곡의 그 어떤 바위들보다 큰 몸집을 하고 있었지. 매끄럽지 않았고, 울퉁불퉁, 모든 것이 규칙 밖에 있었어. 어쩌면 세상이 나를 통해 규칙을 만들어 갔는지도 몰라. 그만큼 나는 오래되었어.
- 너
- 죽기 싫어. 나도 너처럼 먼 미래에 오래된 무언가가 되고 싶어.
- 나
- 도와줄 수 없다는 거 알잖아.
- 너
- 약속해줘.
- 나
- 뭐를.
- 너
- 내가 눈을 감기 전까지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 기왕이면 더욱 오래된 것들로. 궁금해. 여기를 다 알지 못하고 떠난다는 게 억울해.
- 나
- 너... 다 잊어버렸네. 이름을 붙여주겠다고 했잖아. 신중한 건 줄 알았는데, 욕심이 많은 거였어.
- 너
- 이름이잖아. 그렇게 중요한 말을 섣부르게 뱉을 수는 없는 거야.
사이.
- 너
- 죽음이 나의 꿈에 영원히 갇히는 거라면, 당연하게도 악몽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계속해서 새로운 세계였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내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 나
- (말 자르며) 좋아, 들려줄게.
- 너
- 그래!
- 나
- 니가 눈을 감을 때까지.
- 너
- 그래!
- 나
- 어차피 나에게는 시간이 많아.
4.
네가 눈을 감고도 한참이 흐른 뒤.
너의 별장이 무너지고,
내가 다시 계곡에 가라앉았을 때.
너의 별장이 무너지고,
내가 다시 계곡에 가라앉았을 때.
- 나
- 너는 죽는 순간까지도 나의 이야기를 팔았어. 그것 때문에 결국 내가 입을 다물게 되었다고 말했는데도. 나에게 그 어떤 흠집을 냈던 것들보다 더 잔인했어.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너는 생의 고통마저 놓고 싶지 않다고 했지. 미안한데, 놓고 싶어지는 고통도 있는 법이야. 너는 끝까지 그걸 몰랐어.
니가 나를 위해 지었다는 그 별장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지. 오늘 그 별장의 마지막 기둥이 무너졌어. 거센 바람이 불지도 않았고, 벼락이 내리친 것도 아니야.
니가 나에게 이름을 붙여주기를 계속 기다렸어. 바뀌어도 좋으니까. 이것저것 돌려 가며라도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먼 미래에 오래 남는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했지. 너는 과연 성공했을까. 누군가 와서 그때의 너처럼, 너희들처럼, 나를 건져내야 알 수 있겠지.
너는 죽음이 또 다른 꿈에 영원히 갇혀버리는 것이라고 했지. 정말 그렇다면... 너,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으려나. 악몽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글쎄. 나는 그 꿈에서라도 니가 나로 살아보기를 바라.
……
아, 또 누가 온다.
너, 나를 건져 올린다.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