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나쁜 뜻으로 그런 게 아냐.Part2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신해연

193호

2020.12.17


등장인물
이 도시에 불시착한 모든 것들이자, 둘리라고 불렸던 어떤 것.
희동이라 우기는 사람.
너는 아주 먼 옛날, 아주 먼 곳에서, 여기 이곳으로 왔다. 그래, 아주 멀고 먼, 어쩌면 하얀 빙하를 타고, 어쩐지 조금씩 녹아버리는 발밑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떻게든 떠밀리고 떠밀려서 여기 이 도시까지. 너의 친구들, 가족들, 애인은 이곳에 없다. 너는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 틈에 홀로 떨어졌다. 너는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왔고, 여전히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산다. 너는 누군가의 친구로, 누군가의 집에 앉혀 사는 처지다. 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너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버리지도 못하고, 현재 머무는 이곳을 사랑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너는 고독한 도시의 (아주 긴 사이, 드디어 답을 찾고선 확신으로) ‘둘리’이다. 너의 유일한 희망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헤어진 엄마를 다시 만나는 일이다.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너는 매일 이곳에서의 생존을 이어간다.
희동이라 우겼던 사람은 이제 자신의 둘리를 찾음으로써 완벽한 희동이 된다.

희동
귀여운 아기 공룡 나의 둘리
둘리
아니, 난 너의 둘리가 아니야.
희동
아니, 넌 둘리가 맞아. 왜냐면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울음만으로 이뤄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 이 집안에서 나는 그저 기저귀를 차고, 하루 세끼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자고 똥을 잘 싸는 것만으로도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존재, 만인의 어린아이, 희동이니까.
희동은 이제 꼬리 잡아당기며 장난을 건다. 둘리, 반항하다 이내 포기한다. 희동, 만족한다.

둘리
고로 너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누구나 한번쯤은 지나치는 그 시절의 애새끼다. 너의 울음엔 힘이 있다. 아직 울음만으로 떼쓰기만으로 욕망을 손에 쥘 수 있는, 그리고 그 사실을 당당하게 누리는 이기적 존재다. 너는 유학 가는 부모를 대신해 친척 집에 맡겨졌다. 너의 부모는 너의 유년기보다는 자신들의 꿈을 쫓는 일을 택했고, 그 사실이 더욱더 너의 울음에 힘을 실어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니 울음에서 슬픔을 읽는다. 부모를 잃은 아이의 서글픔을 상상한다. 그래서 넌 너의 욕망을 조금 더 쉽게 가질 수 있었다. 니 울음에 정말 그런 슬픔과 서글픔, 그리움과 결핍이 있었는지, 너 자신도 모르지만.
희동, 울음을 상징하는 어떤 것들을 반복한다.

희동
맞아, 난 희동이야. 그러니까 넌 나의
둘리
그래, 나는..
희동
귀여운 아기 공룡
둘리
그러니까 나는.
희동
둘리는,
둘리
나는...
희동
초능력 내 친구

둘리
아니! 이제 귀여운 아기 공룡 타령은 지긋지긋해. 난 더 이상 너의 둘리가 아니야.
이제는 둘리가 아닌 ‘한 때는 둘리라고 불렸던 어떤 것’의 선언.

둘리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버리기 시작한 순간,
희동
혹은 서로의 이름에 충실해지기로 결심한 순간, 함께 모든 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희동
나의 욕망
둘리
그리고 너의 욕망
희동
또한 그건 너의 욕망
둘리
아니, 너의 욕망.
희동
말해줘. 듣고 싶어.
둘리
무슨 말을 해줄까.
희동
내가 늘 듣고 싶어 하는 말.
둘리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지금처럼 앞으로도
희동
행복할 거야. 영원히.
둘리
그래, 영원히.
희동
계속 말해줘. 듣고 싶어.
둘리
무슨 말을 해줄까.
희동
뭐든, 너의 말, 너의 진짜 말. 니 안의 말.
둘리
나는.
기대에 가득 차서 침을 삼키는 사이

둘리
엄마가 보고 싶다. 고향으로 가고 싶어. 영원히.
희동
...영원히?
둘리
잊지 못 할 거야. 잊을 수 없을 거야. 나의 고향, 나의 엄마.
희동
배신자!
둘리
말해달라고 했잖아.

희동
너에겐 늘 결핍이 있었어. 빙하타고 내려와 친구를 만났지만, 친구로선 채워지지 않는 호올, 너만의 구멍, 깊은 심연. 나는 그걸 채워줄 수가 없었어. 왜?! 왜? 형아! 우리 행복했잖아. 빙하타고 일억 년 전 옛날은 너무 멀어. 그냥 지금 여기서 행복하면 안 돼? 우리 좋았잖아. 엄마 꼭 찾아야 돼? 형 나이를 생각해. 이제 엄마 타령할 때 지났잖아. 엄마는 나도 없어!
둘리
고향으로 가고 싶어, 엄마가 보고 싶다. 그게 내 욕망이야.
희동, 희동다운 떼쓰기와 울음을 과시한다.

희동
하나
둘리
우리 헤어지자.
희동
둘리
난 더 이상 니 둘리가 아냐.
희동
둘리
울어도 소용없어, 날 놔줘.
더욱더 악다구니를 쓰며

희동
아니, 난 희동이야! 나는 계속 울 거야! 계속 계속 울 거야! 니가 더는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그래서 결국은 내 울음을 들어줄 때까지!
둘리
도대체 니 울음으로 니가 얻고 싶은 게 뭔데?
희동
너.
다시 희동의 다채로운 떼쓰기와 울음. 그러나 통하지 않는다.

희동
생각해 봐. 우리가 여기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둘리
그래. 즐거운 시간이었어. 고독한 시간이었지.
희동
제발 기억해봐. 매일 밤 벌였던 파티들을.
둘리
그래. 술이 덜 깬 채로 혼자 눈을 떴을 땐.
희동
곁에 늘 내가 있었지.
둘리
외로웠어.
희동
아니, 내가 있었어. 우린 한 집에서 잠들고 일어나고 밥을 먹었어. 내가 먹는 고등어를 너도 먹었고 니가 먹은 웰빙 건강 잡곡 혼합 19곡 밥을 나도 먹었어. 식후엔 나란히 식후 땡, 돗대라도 사이좋게 나눠 피웠지, 난 히츠 브론즈, 넌 필라멘트 라이트!
둘리
팔리아멘트야.
희동
니 겨드랑이에 난 하얀 털 한 가닥, 내가 거기 이름도 붙여줬잖아. 흰수염고래털!
둘리
흰수염고래털..
희동
바로 내가 붙여준 이름! 그뿐이니? 니가 첫 신발을 사던 날, 그 색깔을 골라준 것도 나고, 그 신발이 네 발을 아프게 하던 날, 부축해준 것도 나야. 니 발에 맞는 신발을 찾을 수가 없어 온 골목을 헤매던 날, 그 옆에서 함께 손잡고 걸었던 것도 바로 나라고, 나, 나, 나!
둘리
알아! 알겠어, 그만해.
희동
우린 가족이야. 이젠 여기가 너의 집이야.
사이.

둘리
생각해 봐. 나 없이도 즐거웠던 너의 일상들.
희동
기억 안 나. 난 다 잊었어. 니가 없던 나의 일상들은.
둘리
내가 오면서 포기했던 너의 어떤 것들.
희동
아니, 그런 건 없어. 난 다 잊었어.
둘리
옛날 같았으면 열 개의 소시지는 모두 다 네 몫이었어. 지금 봐. 넌 고작해야 다섯 개의 소시지를 먹을 수 있을 뿐이야. 혼자 있을 땐 맘껏 누리던 어떤 것들을 나와 나누느라.
희동
그게 뭐? 나는 이제 다섯 개의 소시지에도 행복해.
둘리
아니, 난 이제 아냐.
희동
아니, 넌 아닌 게 아니야.
둘리
아니, 난 아니야! 고등어를 함께 먹었다고? 그래, 너 때문에 생선 뼈 바르는 덴 이골이 났어. 넌 콩이 싫다고 했지? 니가 하도 울어서 밥통 안의 콩을 일일이 골라주는 건 다 내 몫이 됐어. 신발? 날 부축해줬다고? 니가 하도 다리 아프다고 징징거려서 택시 탄 거 기억 안 나? 택시비도 내가 냈어. 신발은 발 편한 것 보다 디자인이 최고라며, 니가 골라 준 신발 하나도 내 발에 안 맞아. 내 취향 아니야. 니가 억지로, 내가 오기로, 서로가 서로에게 짜 맞춘 것뿐이야. 제발 다섯 개의 소시지를 생각해.
사이

둘리
나 때문에 니가 양보하고 포기했던 것들.
희동, 떼쓴다.

둘리
내가 널 외롭게 만들던 순간들.
희동, 더욱 떼쓴다.

둘리
그래, 계속 울어봐.
희동, 울며 때린다.

둘리
우는 것만으론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는 때가 올 테니까.

희동
울면 됐는데. 그저 목이 터져라 울면 됐는데. 울음도 소용없어지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어요. 어떻게 해요? 어쩌면 좋아요? 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고! 난 우는 것 빼곤 아직 배운 게 없는데!
흐느끼는 희동. 아주 작게 어디선가 음악. 각자 부유하는 먼지들처럼, 잠시 흔들흔들.

희동
둘리.
둘리
왜?
희동
나 이상해.
둘리
또 뭐가.
희동
그러니까, 뭔가, 낯설고, 무섭고, 아찔하고, 까마득해.
둘리
그럴 땐, 상상해 봐.
희동
뭘?
둘리
눈을 감고. 널 행복하게 하는 것들.
사이

둘리
보여?
희동
그냥 까만데. 야광 별 가루 같은 게 둥둥 떠다니는데.
둘리
너 형광등 너무 오래 봤나 봐.
희동
왜 아무것도 보이질 않지.
둘리
형광등 때문이야.
희동
둘리, 넌 뭐가 보여?
둘리
나?
희동
그래, 너. 넌 뭐가 보여?
둘리
음. 푸른 초원. 도저히 끝을 알 수 없는 얼음 산들. 그리고... 엄마.
희동
엄마?
둘리
그래, 엄마!
희동
엄마는 무슨 색이야?
둘리
말간 노란색, 내 시린 발가락을 간지럽히는 봄날의 햇살.
희동
엄마가 막 따끔거리니?
둘리
아니. 그 앞에 등을 내맡기고 있으면 (사이) 그대로 녹아버릴 것만 같아.
희동
엄마가 그렇게 좋아?
둘리
너도 상상해 봐. 엄마를 상상해 봐. 울고 싶어지지 않니? 너무 행복해서 울고 싶어지지 않아? 꼬리뼈가 간지럽지 않아? 코끝이 시큰하지 않아? 정수리가 찌릿하지 않아?
희동
니가 고아였으면 좋겠어.
둘리
엄마, 둘리가 왔어요, 이제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래.
희동
그렇게 좋아?
둘리
응. 이게 바로 내가 내내 찾아 헤매던 거야.
음악은 사라지고 둘은 현실로 돌아온다.

희동
여기엔 없어?
둘리
응, 단 하나도.
다시 희동의 얼굴에 울음이 시작되려 한다.

둘리
넌 좋겠다. 울기만 하면 뭐든 다 가질 수 있다고 믿으니까.
희동
난 처음으로 실패했어, 너 때문에.
사이

둘리
미안해.
희동
난 세상에서 미안하다고 하는 것들이 제일 싫어.
둘리
그치만 난 떠날 거야. 오늘이 마지막 밤이야.
희동
둘리야, 나 아파. 나 아프다고. 머리도, 목도, 배도, 무릎도, 발가락도, 눈썹도, 머리 어깨 무릎 발 귀 코 입, 안 아픈 데가 없어. 아파! 온통 아파!
둘리
엄마를 보면 뭐라고 말하지.
희동
꾀병 아니야.
둘리
(희동에겐 별 관심이 없이) 나 너무 늙지 않았니?
희동
진짜로.
둘리
엄마가 날 못 알아보면 어쩌지.
희동
제발.
둘리
(그제야 희동 보며) 그래, 제발! 아무리 정을 붙이려고 해봐도
희동
나 정말 아파.
둘리
이 도시가 낯설어.
희동
내가 아프면 니가 늘 내 머리칼을 세어줬잖아.
둘리
여기 한구석이 휑해.
희동
이번에도 그래야 되잖아.
둘리
절대로 채워지지가 않아. 여기, 이곳에선.
자신에게 등을 돌린 채 떠날 준비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희동.

희동
같이 가.
사이

희동
마지막이잖아. 배웅하고 싶어.
둘리
정말이야?
희동
응.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서, 뭐든 되기로 했어.
둘리
실은 마음이 불편했어. 니가 또 삼일 밤낮을 울면 어쩌나.
희동
이젠 울지 않을 거야. 우는 걸론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까.
조명, 벽에 걸린 바이올린을 비춘다.

둘리
니 덕분에 견딜 수 있었어.
희동
나에겐 전부였던 날들이 너에겐 그저 견디는 거였다니.

둘리
(모두에게) 안녕,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
희동
저게 널 데려간다는 거지?
둘리
기회는 단 한 번. 그 안에 정확하고도 아름다운 연주를 해야 해.
가고자 하는 곳을 분명하게 알릴 수 있는 연주를.
희동
실수하면 어떡해?
둘리
매일 생각했어. 꿈에서도. 실수할 리가 없잖아.
희동은 바이올린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둘리
넌 계속 이 도시에서 삶을 살아가는 거야. 아저씨도, 철수도, 영희도, 여기 있어.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욕망들도 생기겠지. 갖고 싶은 것, 손에 쥐고 싶은 것, 나 같은 건 까맣게 잊을 거야.
희동
내가?
둘리
응. 다들 어린 시절에 갖고 놀던 바비 인형 따윈 잊고 마는 것처럼.
희동
내가, 널?
둘리
정말이야. 잊혀 질 거야. 곧.
희동
넌 그렇게 말하겠지. 한 번도 버려진 적이 없으니까.
둘리
버리는 게 아냐. 그냥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야.
희동
넌 남겨지는 사람이 돼본 적이 없으니까.
둘리
나쁜 뜻으로 그런 게 아냐.
희동
그래. 다 각자의 방식이 있으니까.
바이올린 향해 돌아서는 둘.

희동
니가 마지막 발을 떼던 순간, 바이올린과 너 사이는 딱 세 발자국이었다.
둘리
한 발.
희동
니가 발을 내디뎠다.
둘리
다시 한 발,
희동
나도 발을 내디뎠다.
둘리
그리고 또 한 발.
희동
발을 내디디고.
둘리
드디어 마지막
희동
한 발!
둘리
안 돼, 하지 마!
희동, 활을 빼앗는다. 긴박한 연주.

둘리
무슨 짓이야!
희동
이건 니가 그토록 꿈꾸던 멜로디는 아니었다.
둘리
너는 무자비하게 활을 휘두르면서
희동
빼앗기지 않을 거야.
둘리
안 돼, 그러지 마!
희동
니가 포기해, 그럼 되잖아.
둘리
지금이라도 제발 멈춰!
희동
미안해, 이미 늦었어.
연주의 클라이맥스, 점점 잦아든다.

둘리
바이올린이 떠났어...
희동
너를 남겨 둔 채.
둘리
니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희동
나도 내가 원하는 걸 갖기 위해 애쓴 것뿐이야.
이제 정말 다시 둘리가 되어버린 어떤 것, 희동의 뺨을 친다.

희동
나쁜 뜻으로 그런 게 아냐.
툭-하고 떨어지는 꼬리와 아주 긴 사이. 떠나려 했었단 사실조차 잊은 듯 그저 같은 자리를 아주 천천히 맴돌기만 한다.

희동
사랑했어요. 갖고 싶었어요. 왜 내가 내 사랑을 위해서 한 일이, 그 사랑한텐 불행이 되는 거죠?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이렇게 널 사랑하는데, 난 그저 너와 함께 영원히 행복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둘리, 노래를 불러줘.
아주 작게 들려오는 허밍

둘리
너는 희동이다. 너는 너만의 방식으로 너의 욕망을 채운다. 너의 울음엔 그리움이, 서글픔이 있다. 그리고 이제 너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희동
사랑해, 둘리야.
둘리
나는 고향을 잃은 둘리이다. 나는 엄마를 잃은 둘리이다.
나는 영원히 낯선 도시를 떠도는 ‘둘리’이다.
막.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신해연

신해연 극작가
글을 쓰거나 연습 중이거나, 그 외엔 종종 지루해하고 자주 심드렁해집니다. 인스타그램 ddorshin

댓글 남기기